- 남을 괴롭히고 죽어라
- 이제 다시 일어나
황현진 | 소설가
남을 괴롭히고 죽어라
미시마 유키오 | 문무출판사 | 1970년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읽고 소설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내게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 남의 은혜는 잊어버려라. 선생을 내심 깔보라. 낯선 사람하고라도 술집에 같이 가라.
죄는 남에게 덮어씌우자 등등. 나는 ‘내심’이라든가 ‘하고라도’라는 말에 방점을 찍는다. 참고로 책의 첫 챕터는 다자이 오사무를 나약한 엄살쟁이로 비난하면서 시작한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한다.
이제 다시 일어나
민주화운동청년연합 | 중원문화 | 1987년
2012년 영화 <남영동 1985>가 개봉했다. 그보다 한 해 전엔 김근태가 죽었다. 이 책은 1985년 남영동에서 정치군부가 김근태에게 자행했던 고문 기록과 옥중 서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근태는 이렇게 썼다.
‘육체와 정신 모두를 그들에게 빼앗기고 남은 것은 팬티 한 장 뿐.’ 며칠 후 전기고문대에서 그는 팬티마저도 빼앗긴다. 사지에서 피가 쏟아질 것을 고려한 고문기술자들이 그마저도 벗겨낸 것이다. ‘우려’가 아니라 ‘고려’다.
- 동천
- 구토
정영효
| 시인
동천
서정주 | 민중서관 | 1968년
모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책장에 놓인 서정주의 <동천>을 보고 눈을 흘겼다. 1968년에 발행된 민중서관의 초판.
미당의 서명까지 적혀 있었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선생님이 선뜻 선물로 주셨다. 당신은 한 권이 더 있다고, 필요하면 가져가서 보라고. 대개 이런 경우 한 번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런 예의도 없이 냉큼 가방에 넣었다. 이런 책을 가진다는 게 자랑스럽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달 뜬 밤이면 그때의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이 시집을 펼쳐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 이후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네요. 저에게도 같은 책이 두 권 생기면 필요한 누군가에게 한 권을 선물하겠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없구나. 동천처럼 내 마음은 겨울이구나. 제목과 어울리게, 또 내가 보낸 겨울밤과 비슷하게 표지도 까맣다. 출판사가 예지력이 있었나?
구토
장 폴 사르트르 | 문예출판사 | 1983년
책 욕심을 내던 시절이 있었다. 전집이나 시리즈 따위를 책장에 꽂아두면 읽지 않아도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곤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래서 헌책방을 뒤져가며 책을 사곤 했다. 그러던 중에 사르트르의 <구토>를 발견했다. 오래된 사르트르의 책 한 권 정도는 책장에 꽂아두어야 집이 근사해 보인다는 생각에 구입했다.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기억해내고 싶지도 않다.
일단 사고 본다는 마음 때문에 내 책장에서 먼지만 먹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책 먼지에 내가 구토할 지경이다. 역시 책은 읽는 사람이 최고의 주인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볼 때마다 저렴한 문고판 시리즈가 그립기도 하다. 소박한 디자인과 얇은 종이가 주는 따뜻함이 여전히 좋은 건 왜일까?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다. 책을 읽는 사람도 최고의 주인이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도 최고의 주인이다. 나처럼.
- 마술이야기
- 별을 보여드립니다
함성호
| 시인
마술이야기
제임스 랜디 | 동학사 | 1994년
어릴 때 한 번이라도 마술사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대통령이 된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동전마술을 좋아했다. 마술사의 손에서 동전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피어났다. 대단한 마술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동전마술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동전마술은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만이 해야 하는 마술이었다. 어릴 때 꿈을 그대로 이루어낸 사람은 마술사가 된 사람밖에 없듯이 나는 시인이 되었다. 몇몇 시인들이 모여서 ‘21세기 전망’이란 동인을 구성했고 우리는 매일 모여서 술을 마셔댔다.
술도 하루 이틀이지 심심해진 우리는 서로의 장기를 자랑했다. 알고 보니 함민복은 인간자석이었고, 연왕모는 치약을 먹는 기염을 토했다. 심보선은 담배마술을, 나는 동전마술을 펼쳤다. 나는 우리 동인을 ‘21세기 곡마단’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좀 더 체계적인 곡마단 모임을 위해 이 책을 샀다. 그러나 이사하는 도중 누가 버리는 책인 줄 알고 가져가버렸고, 나는 한 책방에서 이 책을 다시 구입했다. 이 책은 내가 유일하게 두 번 산 책이다.
별을 보여드립니다
이청준 | 일지사 | 1971년
이 책을 어디서 구입했는지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하고 어떻게든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순전히 내 전작주의 독서 습관 탓이다. 나는 한 작품에 홀리면 그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탐구심과 연구적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냐면, 그건 아니다. 단지 나의 수집벽이 책 쪽으로 확장된 것에 지나지 않나 짐작한다. 이 책을 구입한 것은 당시 이청준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시들해질 무렵이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판본과 달리 고색창연한 책의 꼴이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가졌다. 돈을 냈는지 훔쳤는지 얻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 친일파 99인 3
- 80년대 젊은 시인들
박성준 | 문학평론가,
시인,
친일파 99인 3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 돌베개 | 1993년
새내기 때 술 먹고 국문과 과방에서 훔쳐오고 나서 내 책장에서 그냥 4~5년 쭉 꽂혀 있었던 책이다. 최근에 ‘한국역사&친일파봇’하고 트친이 되면서, 이제야 읽게 되었는데 내가 훔친 3권은 문학과 음악, 미술, 종교계 인사들의 친일 내역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훔쳐도 딱 관심 부분만 훔쳐왔는지 역시 촉이 좋은 것 같다. 나는 예술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곳의 질서를 갱신하려는 목적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우겨볼 수 있는 깜냥이 예술가의 직관 아닐까. 그러니까 예술가들이 질서에 편입되어서 대대손손 잘살려고 한 시절 그랬다는 게 슬프다. 그런 윤리가 이 땅에 있었다는 것도 싫고! 물론 나는 과방에서 자주 책을 훔치는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 윤리는 여전히 진행 중임. 하하….
소제목들은 굉장히 강하게 그들의 행각을 고발하고 있는데 막상 본문을 읽어보면 기록문에 가깝다.
80년대 젊은 시인들
이성복 외 14인(최동호 편) | 시민문학사 | 1990년
고등학교 때 신촌 그랜드마트 뒤쪽 당집 골목 안에 있던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이다. 헌책방 상호가 ‘숨어 있는 책’이었다. 실제로 한 번 가고 나면 두 번은 절대 못 찾게 되는 숨어 있는 곳에 있었다. 지금은 당집도 많이 없어지고 주차장이 생긴 것 같던데 이 책방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이 앤솔러지에 있는 15명의 시인들은 내가 구입했을 당시에도 젊은 시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 시인에 가까운 사람도 꽤 되는데, 나는 이런 게 좋다. 이제 너무 어른들이라 저서가 10권은 훌쩍 넘는 분들만 있는데, 아, 기형도는 빼고…. 특히 각 챕터마다 ‘시인의 말’ 부분을 보면, 약간 콩닥콩닥할 정도로 패기가 모두 넘친다. 이분들은 이런 젊은 시절에 낸 앤솔러지가 헌책방에 돌아다니는 걸 알고 있을까? 내게는 부끄러운 분홍 같은 책!
Editor: 이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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