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고등교육의 나라라고 알려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박사 학위자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 서울”이라는 농담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등장할 정도로 한국은 고등교육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대표적인 아시아 국가다. 이런 까닭에 외신에서 종종 국가가 제공하는 비효율적인 공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시장주의를 도입한 사례로 한국을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근대의 이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평등’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이 그토록 교육열이 높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1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대졸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고등학교 졸업자 비율은 거의 98%에 달했다. 지구상에서 문맹률과 가장 거리가 먼 나라를 꼽자면 한국이 상위권을 다툴 것임이 틀림없다. 이처럼 통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고등교육 수혜자의 비율은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지표라고 볼 수 있다.
몇 년 전, ‘디 워 사태’라는 것이 있었다. 코미디언 출신 심형래 감독이 할리우드의 기술력을 능가하겠다고 내놓은 CG 영화가 <디 워>였다. 그러나 영화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형편없는 작품성 때문이었다. 심 감독이 할리우드의 기술을 뛰어넘었다고 자랑스럽게 홍보한 것과 달리, <디 워>는 서사와 그래픽 수준에서 B급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졸작이었다. 영화 평론가들은 자신의 본분에 맞게 졸작을 졸작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물론
<디 워>에 대한 비판이 작품성에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쇼박스라는 거대 배급사가 상영관을 독점하고 물량 공세를 펼쳐서 다른 영화를 질식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런 비판을 제기한 이들 중에 김기덕 감독도 있었다.
여하튼 당시 쏟아졌던 영화 평론가들의 발언을 요약하면 <디 워>에 대한 홍보가 과장되었다는 것이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특정 영화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과대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일반적인 주장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엉뚱하게 돌아갔다. <디 워>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고,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을 넘어서서, 영화 평론가와 대중이라는 대립 구도로 담론이 양분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논쟁에서 영화 평론가라는 존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대중의 취향을 재단하는 허세 집단”으로 분칠되었다는 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디 워>를 둘러싼 사태는 영화 평론가 일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 또한 여기에 덧붙여서 ‘평론가’라는 지위로 명명되었던 ‘문화권력’에 대한 대중의 ‘항거’로 이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김어준이나 김규항처럼 <디 워> 논쟁을 ‘지식인 권력’에 대한 대중의 불만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생각이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류 역사에서 지식은 언제나 특정 엘리트를 통해 재생산되었고, 일방적으로 제도권의 지식 체계가 결정한 규범에 따라 참과 거짓이 분류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론을 벗어나서 좀 더 상황을 숙고해보면, 그렇게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사실에 기초해서 한국의 고등교육 현실을 감안한다면, <디 워> 논쟁에서 영화 평론가가 일방적으로 대중보다 우위에 있는 지식 생산 집단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중이라고 무차별적으로 불리는 집단도 영화 평론가 못지않게 지식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한국처럼 인터넷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소셜 미디어’의 역할은 지대하다. ‘소셜 미디어’야말로 지식을 생산하고 선별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작동하는 ‘게이트키퍼(Gate Kepper)’라는 사실을 무시하기 어렵다.
특정 포털이나 언론이 독점적으로 ‘게이트키퍼’ 노릇을 할 수도 있지만, 이를 수용하고 확산하는 과정에서 ‘소셜 미디어’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다. 따라서 <디 워> 논쟁에서 형성되었던 ‘영화 평론가 vs 대중’이라는 대립 구도는 사실 관계에 기초했다기보다 세계를 이해하는 일정한 관점 또는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태도에 가깝다. 이 이데올로기가 바로 ‘반지성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반지성주의는 반지식인주의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단순하게 지식인 일반을 반대한다기보다 철학, 과학, 예술 일반에 냉소를 보내고 지식 활동 자체를 조롱한다는 점에서 지성 전반에 대한 혐오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경우 이런 반지성주의는 파시즘의 발흥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파시즘은 귀족과 부르주아에 대항해서 계급 의식을 결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동원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 전략이었다. 당시 사회주의가 민주주의를 주요 이념으로 내세운 것에 반발해서 파시즘은 민족주의를 정치적인 의제로 내걸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관계라기보다, 계급 의식을 갖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반지성주의가 호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생산의 사회성은 어쩔 수 없이 노동자를 사회적 존재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정치와 결합한다. 파시즘의 정치는 이 과정에서 반지성주의를 활용한 것이다.
파시즘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각을 주장하는 개별 노동자라기보다 ‘노동자 일반’으로 호명될 수 있는 ‘떼거리’였다. 이 ‘떼거리’야말로 정치철학에서 가장 두려워하면서 억압하려고 하는 괴물스러운 정치의 에너지다.
대중은 원래 수학에서 계산할 수 없는 수의 덩어리를 의미했다. 근대는 세계를 수학의 원리로 설명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사회는 수학적인 방식으로 셈할 수 있는, 달리 말하면 집합으로 환원할 수 있는 재현들의 총합이다. 부분집합들이 모인 것이 사회인 것이다. 이 재현들의 재현이 바로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은 이런 재현 방식으로 셈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셈할 수 없는 존재를 과잉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과잉의 존재인 대중은 기존의 관습이나 규범을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원초적 상황이기도 하다.
대중은 분명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기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중이라고 이름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집단이 대중의 과잉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국민이라는 용어 못지않게 대중도 자의적인 방식으로 명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디 워> 논쟁에서 거론된 대중도 과연 앞서 말한 일반적인 대중의 특성을 체현하고 있었던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이 경우에 대중은 파시즘을 통해 동원되었던 ‘노동자 일반’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에서 대체로 ‘노동자 일반’은 대중으로 규범화하기 쉽지 않다.
노동은 일반적인 범주라기보다 ‘노동자라는 특정 신분의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흔하다.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를테면 한국에서 합의되어 있는 ‘훌륭한 삶’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에서 대중은 소비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자 일반’이 소비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이들은 노동자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유럽의 경우와 달리, 지금 한국에서 쉽사리 대중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OECD 국가 최고의 고등교육 졸업자 비율을 자랑하는 집단이다. 98%가 고등학교 이상 교육을 받았다. 파시즘이 출현했던 20세기 초반 유럽의 노동자와 처지가 다른 것이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일하는 산업 역군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에 자족하는 도시 중간 계급의 삶을 지향한다. 이런 이들의 태도에서 파시즘의 단골 메뉴인 반지성주의를 발견한다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반지성주의는 계급 의식에 반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배움을 통해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무지와 사슬일 뿐”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프롤레타리아와 지식인을 갈라놓는 것이 반지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이런 문제와 다른 광경을 보여준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 지식인을 불신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디 워 사태’ 이후에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반지성주의에 따른 ‘지식인 vs 대중’의 대립 구도는 한국의 지식 생산 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디 워>의 경우에 비해, 강신주를 둘러싼 현상은 더욱 명확하게 한국의 반지성주의가 노동자의 것이라기보다 중간 계급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제로 ‘강신주 신드롬’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를 기반으로 철학에 대한 요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강신주의 인기 비결은 여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계발이 한계에 도달한 시기에 그는 노골적으로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그런데 그의 비판이 목표로 삼는 것은 ‘계발’의 타파이지 ‘자기(Self)’의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계발’을 타파하는 ‘자기’를 가질 것을 역설한다.
강신주가 자본주의를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논리에 따른 필연적인 도출이다. 자본주의야말로 ‘자기’를 파괴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특별한 것이라기보다 19세기 이래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제기해온 문제의식을 변주한 것이다. 그는 강인한 개인이 되라고 주문하지 않고 완성된 자기를 가지라고 이야기한다. 이 완성에 ‘실패’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강신주에게 반지성주의의 혐오가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이런 논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철학자를 자처하는 지식인이지만, 다른 지식인과 다른 것이다.
한국의 반지성주의가 모든 지식인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신주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반지성주의는 작동하는 것일까. ‘자기’의 완성이라는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드라마에 대해 어떤 평론가가 분석을 했다. 그런데 분석이라는 행위가 그렇듯, 대상은 이 과정에서 해체되어서 합리적인 언어로 재구성된다. 그런데 이 언어는 드라마에서 ‘자기’를 확인했던 이들에게 불편한 것이다. ‘자기’의 판타지를 뒤흔들어놓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비평의 목적이지만, 고등교육을 통해 일정하게 텍스트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이와 같은 비평의 언어는 허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들릴 수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평이라기보다, 자신들의 이해를 확인시켜줄 친절한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완성을 위해 필요한 지식만을 지식으로 간주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의 고등교육이 만들어낸 특성인 것이다.
Words: 이택광(문화 평론가)
Editor: 조하나
ILLUSTRATION: 정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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