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ice 김의석(삼성전자 디자인 책임 연구원) Editor 김민정
칼 라거펠트는 그의 화려한 디자인 습성과 반대로 블랙 수트를 즐겨 입는다. 그것도 꼭 화이트 셔츠를 받쳐 입고 머리는 하나로 반질하게 묶는다. 그는 온갖 색은 다 알고, 그걸 어떻게 입어야 환호받는지도 아는 사람임에도 자신은 꼭 식상할 정도로 단순한 블랙만 입는다. 이는 비단 패션계만의 얘기가 아니다. 알록달록이란 형용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알레시(Alessi)의 디자이너 스테파노 조바노니도 항상 블랙 의상만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왜 이들은 디자인의 정점에 서 있음에도 블랙만을 추구할까. 그들이 그렇게 신봉해 마지않는 블랙은 과연 어떤 의미가 담긴 색일까.
요근래 ‘프리미엄급’이라는 명패를 달고 나오는 제품들이 많다. 그리고 그 제품들의 스펙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고급스러운 블랙 컬러’라는 문구. 단순 트렌드로 보기에는 우리 주위에 ‘블랙=고급’이라는 공식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다. 권위를 상징하는 대통령 의전차는 모두 블랙이고 비싸야 좋다고 생각하는 제품 역시 주로 블랙이다. 제품 디자이너들은 이것이 ‘페이크(Fake)’와 관련 있다고 설명한다. 과거 실버 휴대폰을 생각해보자. 스틸 소재의 강함을 상징하기 위해 실버 색상을 사용했지만, 실제 그것은 스틸이 아니기에 시간이 흐르면 색이 벗겨지면서 본래의 색이 드러났다. 이렇게 페이크, 즉 가짜라는 느낌은 곧 제품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한다. 그래서 원(原) 소재의 색을 사용하는 것이 고급스러움을 나타내는 첫 번째 명제가 되는 것이다. 가죽은 본연의 갈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요근래 등장하는 제품들은 ‘가짜’라는 느낌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벗겨지거나 변하지 않는 블랙을 주로 사용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진짜’를 추구한다. 따라서 전문가를 타깃으로 한 프리미엄 제품들은 블랙이 주 색상이 된 것이다. 더불어 블랙에서 느껴지는 권위를 제품에 그대로 오버랩시키는 것이다. 특히 최근 IT업계를 강타한 ‘하이글로시 블랙’ 같은 경우는 어렸을 적부터 갖게 된 고광택 블랙 색상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적용한 사례이다. 당신은 반짝이는 블랙 색상을 보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어렸을 적 거실에 놓여 있던 그랜드 피아노, 아님 매끈하게 빛나는 조약돌? 피아노가 고상함을 대변하는 아이템임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다. 그리고 그 단단한 조약돌에서 느껴지는 신뢰감 또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어디 이뿐이랴. 아버지를 처음으로 멋진 남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잘 다져진 몸에 블랙 수트가 절도 있게 피팅되었을 때였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블랙은 절제되고 단순하지만 강한 색상이며 이것이 곧 프리미엄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비자는 항상 기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몸을 끼워 맞춘다. 그들이 어렸을 적부터 우리에게 강조해온 블랙의 이미지는 오늘도 ‘프리미엄’이라는 미명 아래 학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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