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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펄프 팩션

<응답하라 1994>가 인기라기에 199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그들의 1980년대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잡다한 것들(Pulp)’을 섞어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결합한 장르인 ‘팩션(Faction)’으로 풀어냈다. 이름 하여 <1984 펄프 팩션>. 1980년대를 배경으로 등장한 문화와 인문학을 잡다하게 버무려 무치고 비튼, ‘김경주식 패러디’ 되시겠다.

UpdatedOn December 17, 2013

김경주의 <해적판>
문학과 예술의 한가운데 서서 자신이 발을 담근 예술계를 비틀고 꼬아 보는 아웃사이더로서의 시각을 고수하는 시인이자 극작가 김경주. 한국의 대중문화와 예술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날카롭고 새로운 시선을 매달 건넨다.

루이스 브룩스의 유성기 복각 음반
루이스 브룩스는 대학에 입학하자 엔리케 산토스 디세펠로, 엘 카마론 데 라 이슬라와 함께 녹색 벨벳 음악당에 가입하고 고전 음악 감상실을 드나들며 디제이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영묘한 민속음악이나 민요 멜로디에 심취해 협주곡이나 조성의 세계에서 비켜간 신비주의 음악에 심취했지만 실비아 케이헌이 쓴 <음악의 현대적 뮤즈>나 알렉스 로스의 <20세기 음악산책사> 같은 책을 뒤적거리면서 점점 둘레를 이해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쇤베르크 진영과 바르토크 민요적 진영의 세계에서 자신의 현학과 무희들을 토론하고 즐겼으며 재사와 미인들을 파리에서 리비에라로 실어 나르던 열차의 이름인 ‘르 트렝 블뢰’의 미학 토론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들은 공명이 통하는 동료를 만나면 서로 소개하기 전 ‘피아노 넉 대가 도착했습니다’ 같은 은어를 상용했으며 동성애자들의 하부문화에 열렬한 지지를 표현하며 자신들의 살롱에서 여러 형태의 낭독회나 시극 모임을 만들기도 하면서 독자적인 방식의 삶을 가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들을 지적으로 열광하게 했던 것은 유성기 복각 음반이었다. 루이스 브룩스는 어린 시절 축음기 속에서 나오는 행진곡을 듣고 전쟁의 무서움을 알았고, 축음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미사곡을 듣고 홀로 교회를 찾아 회원 가입 원서를 작성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레퀴엠을 듣고 아버지의 죽음을 미리 상상해보기도 했다. 루이스 브룩스가 ‘끔찍한 것을 향해 미리 미끄러져 나가는 상상력’을 자신의 미적 태도라고 여기기 시작했던 것도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유성기 복각 음반 덕택이었다.

루이스 브룩스는 ‘미요’ 같은 닉네임으로 여러 음악 잡지에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잡지사와 평화협약이 이루어지고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 속에서 재즈와 클래식 블루스에 관한 한복판의 글을 써 나갔다.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와해로 인해 나기 스젠트 미클로스 같은 땅이 루마니아에 귀속되고 포조니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듯이 잡지사에 자신의 예술운동이 귀속되자 그만두었다. 루이스 브룩스는 점점 주위를 맴도는 조성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여행을 다니며 집시나 유랑 음악에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제3세계로 불리는 나라들의 민요들 속에서 시적 영감으로 충만해져 돌아오곤 했다.

그는 살롱에서 생각들을 정리했다. 루이스 브룩스는 헝가리 집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대평원’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뛰는 자신을 발견했다. 부다페스트는 실패한 첩보원들이 모여서 축음기를 틀어놓은 채 진토닉을 마시면서 룰렛을 하며 자살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루이스 브룩스는 자신의 음악적 활동은 늘 비공식적인 일이 되었으면 한다. 음악은 공개되면 관계를 얻어 오히려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비밀스러운 개별적 공명으로만 존재하는 음악에 세계의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게 루이스 브룩스가 알고 있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열망이자 노고였다. 미소가 공허하듯이 지나간 음은 이제 자신의 음성 속에서만 복기된다. 이 세계는 언어가 유령이므로 음악은 그 유령들을 데리고 여러 아이를 낳았으므로.

바넷 보리스의 솜사탕
바넷 보리스는 어린 시절 휴일에 아버지 손을 잡고 서커스를 구경하러 간 적이 있다. 늘 바쁘시던 아버지가 그날은 비번이었는지 아침부터 누이들 얼굴을 씻기고 깨끗한 옷을 손수 챙겨 입히고 어서 나가자고 하셨다. 바넷 보리스와 누이들은 오랜만에 외식도 하고 서커스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다. 명절날 TV에서만 보던 서커스 매직 유랑단은 환상적이었다. 몇 년에 한 번 지방으로 올까 말까 하는 순회 서커스단의 가설 천막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빽빽해서 치일 지경이었다. 쇼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대 위의 단원들은 신기 그 자체였다. 처음 보는 묘기와 무대 세팅, 연기력까지. 쇼가 진행될수록 구경꾼들은 점점 긴장의 부피감과 깊이감을 더해가는 서커스의 리얼리티에 압도당해갔다.

원근법을 무시한 채 기울어진 세트와 난간들을 뛰어다니는 동물들이며 허공을 날아다니는 공중묘기, 마술쇼까지. 단원들은 극단적인 왜곡의 형태로 관객에게 최대한의 놀라움과 신비감을 제공해주었다. 나중에 바넷 보리스는 이때 처음 본 서커스 무대의 압도적인 경이를 자신의 공연 작업에 도입시켜 보여주고자 애쓴 적이 있다. 서커스 단원들처럼 기괴한 자세와 태도로 움직이는 프리츠 폰 운루의 연극
<혈통>에서처럼 자신도 그런 기법들을 쓰고 싶었다.

서커스 쇼가 끝나자 사람들은 기념 촬영를 하기 위해 코끼리 주변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고 (대부분 남인도에서 온 코끼리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몸이 미루나무처럼 휘어지고 파라마운트사의 특수효과처럼 변하는 단원들과 팔짱을 끼고 폴라로이드 즉석 사진을 박기도 했다. 플롯은 진전되어야 하고 구도는 배우가 움직이면 깨지기 마련이다. 바넷 보리스와 누이들은 그날 하루 종일 마음껏 솜사탕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계속 밥 대신 솜사탕을 사주셨기 때문이다. 솜사탕을 손에 쥐는 날은 즐겁지만 언제나 끼니는 대충 넘어간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솜사탕처럼 달콤하듯이. 배가 고프지만 성공한 혁명단원들처럼. 바넷 보리스는 혁명군들이 솜사탕을 든 채 진군하는 꿈을 그날 밤 꾸었다. 솜사탕은 뱃속에서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의 풍금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혼자 빈 교실에 남아 풍금을 치고 있다. 저녁 빛살이 창가로 내려앉기 시작하는 빈 교실이다. 발로 페달을 밟고 건반을 누르자 풍금 소리가 처음엔 무겁게 일어서더니 점점 찰랑찰랑한다. 나무 널빤지 바닥 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눈을 뜬 채 꿈틀거린다. 피아노와 달리 풍금은 우아한 주변 세팅을 강조하지 않는다. 낡은 교실이어도 좋고 지하 예배당에도 잘 어울린다. 영화 <곡마장의 위험한 말 타기>에서 들리는 사운드트랙에도 풍금의 잔향은 강하게 존재한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의 어린 시절 음악 선생님은 풍금을 자꾸 리드 오르간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이 건반 악기에 대한 설명을 상세하게 훈육시키곤 했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몰래 교실로 들어왔다. 유령처럼, 어느 대학살의 유일한 생존자 엘사릴처럼,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20여 년 만에 자신이 다녔던 이 작은 시골 학교에 찾아 들었다. 방죽을 따라 등교하던 길은 사라졌고 아파트가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 뒷길로 연결되는 능선과 작은 산맥은 존재한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와 친구들은 그 산을 ‘안테나 산’이라고 불렀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가 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도둑이 세 번 들었다.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세 번 모두 풍금을 훔쳐갔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풍금을 훔쳐가는 사람은 없겠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풍금을 가져갔고 그때마다 교장 선생님은 다시 풍금을 들여야 했다. 마을의 항구가 얼어붙어 봄까지 배로 풍금이 오지 못해 음악 수업이 시시콜콜했던 기억을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자신이 졸업하기 전 마지막 풍금이 멀리 배에 실려 항구로 들어오던 날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프랑스 소년처럼 설레었다. 프랑스 소년들이 설레는 일이 생기면 산에 올라가 풀 위에 누워 구름들에게 고백을 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풍금이 배에 실려 있고 그 배 위에 또 ‘유령마차’가 있는데 그 안에 실려 있어. 왜냐면 이번엔 정말 도둑맞지 않기 위해 유령들이 자신들의 마차에 싣고 쇠사슬로 꽁꽁 묶어서 데려오는 중이래.”
“정말?”
“응.”

세바스찬 이라디에르의 형은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신의 신부가 될 여인을 몰래 교실의 풍금 위에 눕혀놓고 못된 짓을 했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의 형은 결국 ‘대도시의 아이’를 가졌다. 에브게니 바우어 같은 팜므 파탈과 함께 형은 살림을 차렸고 모기향을 만드는 ‘예몰리에프사’에서 일했다. 형은 의처증으로 인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다가 취하면 최면에 걸린 듯한 눈으로 어린 시절 학교의 풍금 이야기를 자주 한다고 한다.

결국 형은 2월혁명에서 10월혁명 사이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형을 병문안 갔다가 그곳에도 풍금이 있는 것을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보았다. 죽어가는 백조처럼 생긴 연인이 건반을 교살하듯이 내려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복잡한 트래킹 쇼트를 사용하듯 건반에 귀를 대고 기울이고 있었다. 병원 사람들은 그녀를 ‘하얀 교생’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어느 학교 교생 실습을 하던 중 귀갓길에 차 사고를 당해 머리가 이상해졌다고 했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대학 졸업 후 영화 특허권 회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몇 년 후 독립 배급사를 차렸다. 인기는 없었지만 꽤 인지도가 생긴 몇 편의 독립 연작을 개봉했다. 하지만 단편에만 집중해온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다시 얼마 못 가 시장에서 밀려났다. 소속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세무서에서 자신의 회사를 페이퍼 컴퍼니로 만들고 빈 사무실에 앉아 그는 문득 고향 생각을 했다. 고향을 떠나온 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다. 세바스찬 이라디에르는 그대로 차를 몰고 고향으로 향했다. ‘풍금을 훔쳐간 세 명의 도둑 이야기’를 토대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키네마토 그래프 카메라맨의 복수>의 주인공들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인 배짱이는 자신을 모욕하는 딱정벌레의 간통 행위를 영화화한다.

카를로스 누베스의 참빗
하얀 달력의 뒷면을 펼쳐두고 참빗으로 머리를 긁어내리면 우두둑 떨어지던 머릿니들을 보셨나요? 살이 통통하게 오른 녀석을 발견하면 어머니는 그놈을 뚱니라고 부르셨습니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뚱니를 참빗 꽁무니나 손톱으로 툭 눌러 죽이곤 하던 나른한 오후, 마당 사립 평상에 앉아 한 명씩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머리를 바닥으로 긁어내리던 날엔 목욕탕에 가는 것과는 또 다른 상쾌함이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벌레가 사는 데도 부끄러움보다는 머릿니를 새로 발견하는 설렘이 있었어요.

지금은 아이들 머릿속에 살림을 차리지 않지만 머릿니들은 아이들 대가리 얇은 가죽의 피를 쪽쪽 빨며 살았더랬어요, 모로코인들의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정에 모여 살듯이요. 고데기는 집에 없어도 참빗은 하나씩 집집마다 있었던 시절이었지요. 한 달에 한 번 오시는 외할머니는 카를로스 누베스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눕히고 슥삭슥삭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 내려가시곤 했어요. 얇은 가죽 사이를 긁어주며 지나가는 참빗의 빗살 맛이 참 시원했습니다. 대나무살에 명주실이 촘촘히 엮여 있던 참빗, 외할머니는 참빗의 가운데 있는 대나무를 등대라고 알려주시며 좋은 참빗은 3년생 대나무로 만든 등대가 있어야 하며 쪼갠 대나무 빗살이 댓가지에서 고르게 갈라져야 하고 염료와 함께 충분히 뜨거운 열을 거쳐야 맑은 참빗이 된다고 하셨지요.

카를로스 누베스는 머릿니를 모두 긁어낸 후 참빗을 햇볕에 말렸습니다. 참빗에 붙어 있던 희뿌연 머리 가루들이 신기루처럼 타는 것을 오래 지켜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반대로 카를로스 누베스는 이제 가끔씩 자신을 못 알아보시는 외할머니의 머리를 무릎에 눕히고 참빗으로 머릿결을 긁어내려갑니다. 이름표를 차고 돌아다니셔야 하는 외할머니는 어디서 머릿속에 이렇게 깨알 같은 식구들을 데려오셨을까요? 외할머니는 이제 누구든 자신의 머리를 눕혀주시면 캐러멜처럼 녹아 잠드십니다. 외할머니가 떠나실 때 어머니는 시집 때 가져오신 참빗으로 자신의 어머니의 머릿결을 마지막으로 정리해드렸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누베스는 어느 날 새벽 파고다 공원을 지나가다가 좌판 노점에서 팔던 참빗 하나를 오래 만지작거립니다.
“할아버님 이거 중고잖아?”
“응. 몇 번 안 쓴 거야.”
“얼마?”
“천원만 줘.”
“여기요.”
여름밤 카를로스 누베스는 지난번에 구매한 누군가의 머릿속 속살을 지나온 중고 참빗을 손에 쥔 채 우두커니 바라보며 창가에 앉아 있습니다. 우두커니 가려운 머리를 자꾸 긁적이며….

Words: 김경주(시인, 극작가)
Editor: 조하나
ILLUSTRATION: 이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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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Words 김경주(시인,극작가)
Editor 조하나
Illustration 이우식

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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