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울 남자들이 발렌티노의 카무플라주 스니커즈에 ‘환장’해 있고, GD가 뮈글러의 쇼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을 곱씹어볼 때, 명백한 건 한 시대를 장악했던 빅 브랜드들이 이미 세련된 방식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한물간 배우처럼 씁쓸했지만, 다행히도 다시금 유행의 중심을 파고들고 있다. 이들에게 시대착오적인 아집이나 고답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하우스의 맥은 지탱하면서 가장 최신 것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로써 느끼했던 발렌티노나 1980년대 ‘라텍스 페티시’에 정지되어 있던 뮈글러는 종결되었고, 매끈하게 단장한 채 새로운 세대들에게 수용되고 있다. 과거에 비축해놓은 아카이브를 근거로 아주 현명해졌다.
이런 변화는 대부분 한동안 조용했던 디자이너 브랜드들 사이에서 이뤄지고 있다. 베르사체의 부활과 함께 J.W 앤더슨이 참여한 베르수스 베르사체는 야하고 현란한 브랜드의 정체성은 고집한 채, 스트리트와 하이 패션이 뒤범벅된 캡슐 컬렉션과 코어 컬렉션을 내놓았다. 시대 코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 iceberg
- cerruti 1881
유치한 카툰 프린트 옷쯤으로 기억되던 아이스버그도 날렵해졌다. 과잉에 과잉을 덧입혔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질 샌더 혹은 닐 바렛 수준으로 클린해졌다 볼 수 있다. 아마 예전의 아이스버그였다면 바우하우스적 미니멀리즘을 시즌 테마로 채택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더 이상 언급조차 되지 않던 체루티는 지금 당장 입고 싶을 정도로 모던한 옷들을 소개하고 있다.
- roberto cavalli
- perry ellis by duckie brown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되는 건 로베르토 까발리의 행보다. 오직 기름진 이탈리아 남자들을 위한 것 같던 컬렉션에서 도발과 노골적인 야함을 덜어내고 드레시함과 고급스러움을 부여했다. 영영 캠피함을 버리지 못할 줄 알았던 브랜드였기에 이 같은 선택이 꽤 파격으로 느껴진다. 너무나 안전해서 기대할 것도 없던 대중적인 미국 브랜드들에게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정제된 테일러링과 스포티즘을 접목한 더키 브라운의 페리 엘리스, 럭셔리하고 고상한 스포츠웨어로 굳히기 중인 노티카의 블랙 세일(Black Sail) 컬렉션이 그렇다.
디젤은 이들보다 더 본격적인 보수 공사에 나섰다. 프리미엄 진 시장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브랜드이지만, 리바이스를 주춤하게 할 정도로 쿨하던 시절은 이미 지났다. 디젤의 렌초 로소는 안일한 브랜드에 변화를 원했다. 그리고 새로운 아티스틱 디렉터로 니콜라 포미체티를 지목하며 새로운 세대의 디젤을 주문했다. 두 남자의 프로젝트는 ‘디젤 리부트(Diesel Reboot)’로 이름 지어졌고, 거의 획기적인 수준의 변화를 시작 중이다.
디젤 블랙 골드는 니콜라 포미체티의 취향을 입어 미니멀한 컬렉션을 선보였으며, 새로운 시즌 캠페인은 텀블러를 통해 모은 창의적인 젊은이들을 모델로 세워 다소 심심했던 최근 캠페인보다 훨씬 명확해지고 간결해졌다. 렌초 로소의 지원과 니콜라 포미체티의 깐깐한 브랜딩은 마치 크리스토퍼 놀런과 잭 스나이더가 코스튬을 바꾸면서까지 ‘리부트’했던 새로운 ‘슈퍼맨 시리즈’ 처럼 전혀 다른 디젤을 기대하게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켜오던 것을 해체하고 세련되게 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잃을 뻔했던 브랜드들이 다시 살아났고, 살아나는 중이다. 패션계의 호흡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그래서 질 좋은 아카이브를 소비하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됐다. 이들의 복귀가 반갑다.
Re-branding
잠시 놓치고 있던 브랜드들의 재정비와 일련의 복귀를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동시대적으로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EDITOR: 고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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