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검은색 수트는 김서룡 옴므, 옅은 회색 셔츠는 ck 캘빈클라인 제품.
송창의는 35부작 드라마 <대풍수>를 끝낸 직후 곧바로 뮤지컬
<요셉 어메이징>으로 무대를 옮겼다. 지난 4월 중순 작품이 막을 내린 후, 그는 바로 다음 작품을 택했다. 뮤지컬 <헤드윅>이었다. 2006년 송창의와 2009년의 송창의가 도전했던 바로 그 <헤드윅>이다. 그간 ‘헤드윅’으로 분했던 수많은 배우들은 “죽을 때까지 ‘헤드윅’을 완벽하게 표현해내지 못할 거”라 입을 모았다.
세상 온갖 모순과 욕망과 상처의 조각들로 얼기설기 기워진 ‘헤드윅’을 한 사람의 배우가 짧은 순간 표현하기란 불가능했다.
배우에게 주어진 역량과 인생만큼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헤드윅’은 복잡하고 어려운,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다. 2005년부터 시작해 시즌 8을 맞는 이 작품은 지금까지 수많은 배우들을 통해 그 숫자만큼 ‘헤드윅’을 탄생시켰고, 그 불완전한 조각들이 하나의 거대하고 완전한 ‘헤드윅’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
2013년, 또 다른 ‘헤드윅’을 준비하고 있는 송창의가 꾹 다문 입술과 깊은 눈매로 나타났다.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역력했지만, 시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무대로 돌아와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건 배우로서 분명 축복받은 일이다. 삶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덧씌워 더욱 성숙해진 캐릭터로 무대 위에 오를 수 있으니.
<요셉 어메이징> 끝내고 야구 자주 하더라.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한 운동이 야구였다. 멋지지 않나. 공 하나에만 집중하고 전체적인 팀워크도 중요하다.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고, 중간에 역전도 있다는 게 인생과 닮았다.
의외다. 정적인 성격일 것 같은데.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태섭’ 같은, 섬세하고 진지한 역할이 사람들 인상에 깊게 남아서일 거다. 뮤지컬은 무대에서 에너지를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니 좀 다르게 보일 거고.
3년 만에 세 번째 <헤드윅>을 택한 이유가 있나?
스스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헤드윅’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모노드라마 특성상 2시간 가까이 극을 끌고 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배우 자체가 가진 성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역할을 이해하는 폭이나 배우의 깊이부터 관객과 노는 여유까지 모든 게 드러난다. 2006년 시즌 2에서 ‘헤드윅’을 맡았을 땐 혈기만 가득해 멋모르고 부딪히고 절규했지. 서른 중반이 된 지금, 내가 표현하는 ‘헤드윅’은 어떤 모습일까. 나 스스로도 궁금하다. 그래서 도전해보기로 했다.
공백 없이 꾸준히 작품을 한다. 배우들이 얘기하는 소위 ‘재충전의 시간’이 없다.(웃음)
작품을 끝내고 특별히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연극영화를 전공해 무대라는 터에 오른 뒤부터 그저 ‘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무대에 서는 사람은 쉬면 감이 떨어진다. 배우는 계속 무대를 밟고 여러 역할을 해봐야 한다.
뮤지컬 무대는 드라마나 영화보다 에너지를 더 많이 쓰지 않나? 춤과 노래도 표현에 들어가니까.
식상한 질문이다.(웃음) 뮤지컬은 공연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어려운 장르다. 사실 그저 즐거워서 하는 거다.
식상한 대답이다.(웃음) 즐거워서 한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무대 위의 감정과 흥을 관객과 나누는 게 드라마와 영화와는 다른 뮤지컬의 맛이다. 연기만이 아니고, 음악적인 힘을 보태니 재밌는 거다. 어렸을 때 처음 뮤지컬을 본 느낌 그대로다.
<레미제라블> 아니었나?
어떻게 알았지? 작품 내용 자체는 무겁고 진중하지만 음악이 주는 힘이 대단했다. 그걸 내가 무대에서 직접 표현하고 불러보고 싶었다. 사실 뮤지컬이란 장르 자체를 연기로만 완벽하게 풀어버리면 연극과 다를 게 없다. 나도 연기할 때 드라마적인 부분이 풀리지 않으면 갈증을 내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뮤지컬에서 부딪히는 게 분명 있다. 근데 배우가 그것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뮤지컬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따로 찍은 장면들을 편집하는 형식이 아니니까. 장르 자체가 다른 거지. 하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달라도 결국 작품이 결정적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같다.
‘헤드윅’을 맡았던 배우들마다 별명이 있는데 ‘짱드윅’이더라. 미모가 가장 출중해서란다. 사실 생각이 좀 다르다. ‘헤드윅’ 자체가 불완전하고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캐릭터인데 ‘짱드윅’은 그러기엔 너무 예뻤다.
그래서 이번엔 다르게 해볼까 한다. 관객과 대화도 나누고…. 무게감은 유지하되 ‘헤드윅’의 과장된 제스처는 좀 덜어내고 음악에 포커스도 두고…. 고민 중이다. <헤드윅>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과 함께하지 않으면 절대 풀어낼 수 없는 공연이다. 그러려면 내가 정확히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얘기…. 이번엔 진짜 관객에게 직접 물어볼 거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았냐고, 결혼했냐고, 그래서 행복하냐고. 세상에 진정으로 하나가 된다는 게 인간일 뿐인데…. 여기서 말하는 ‘반쪽’은 연인일 수도, 친구일 수도 있고, 사회와 정치의 관계일 수도 있다. 우리 같이 고민을 한번 해보자는 거지.
2006년 ‘헤드윅’일 땐 이런 생각 못했겠지?
전혀 못했다. 2006년엔 말 그대로 ‘여자’처럼 보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과장된 말투에 몸짓, 그게 다였다. 2009년엔 나름 고민을 했는데 쉽게 풀리지 않은 것 같다. 이번엔 너무 어렵게 생각 안 하려 한다. 억지로 ‘헤드윅’이 되려고 하면 더 힘들다. ‘헤드윅’이라는 캐릭터와 연기하는 나, 관객과의 관계를 편하게 끌고 나갈 생각이다.
어깨에 힘 뺀, 성숙한 ‘헤드윅’을 만나겠다.
그럴 생각이지만 쉽진 않을 거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포커스를 맞춰 살아가지 않나. 배우들은 더 그렇지. 내 시선에서 ‘헤드윅’을 보는 게 아니라 주변에 그런 인물이 있을 때 내가 얼마만큼 마음을 쓸 수 있을까. 시선을 넓히고 객관화하면 잘 풀릴 것 같다. ‘토미’에 대한 ‘헤드윅’의 마음은 내가 여자가 아닌 이상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근본적으로 파고들어가면 그저 애정이 결핍된 한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감정이 아닐까? 이 사람 곁에 진정한 누군가가 있어주질 않은 거다. 그게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헤드윅’에 녹아 있는 감정은 인간 누구나 느끼는 본질적인 외로움이지, 미움이 아니었다. 근데 나는 ‘헤드윅’의 미움으로 뭉친 분노를 연기했던 거지. 예전엔 몰랐다. ‘헤드윅’은 가식적으로 표현되는 순간, 다 무너져버린다는 걸. ‘헤드윅’은 배우가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야 맡을 수 있는 역할이란 걸.
꾸준히 브라운관과 무대를 오가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뮤지컬에서 나는 아직도 끊임없이 부족한 점들이 보인다. 그건 곧,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나 스스로 안주하지 않으려고 계속 뮤지컬을 하는 거다.
2002년 데뷔해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 수많은 작품을 거쳤다. 기복이 심한 배우의 삶을 살면서, 꾸준히 작품을 해오며 수많은 기복을 겪었을 텐데, 연기 10년 해보니 어떤가?
내가 봐도 나의 연기 패턴이 정말 뚜렷할 때가 있었다. 내 스타일이 생긴 거지. 어느 순간, 그게 나를 무너뜨리고 있더라. 배우가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드라마로 이미지가 굳어져가고 있을 때였고, 분명 더 치고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좋은 작품들도 들어왔고. 그런데 그때 나는 뮤지컬 무대를 선택했다.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그대로 갔다면 아마 지금 비슷비슷한 역할들만 맡을 거다. 그때 깨달은 건 배우는 항상 ‘리셋’해야 한다는 거였다. 전작이 무엇이었든, 호평을 받았든, 혹평을 받았든, 인기를 얻었든, 사랑을 받았든, 작품이 새로 시작되면 배우로서 모든 게 다시 시작인 거다.
어느 인터뷰에서 “연기할 기회가 나에게 계속 올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늘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는 건가?
내가 제일 두려운 건 사람들이 날 찾지 않는 것도, 날 봐주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정말 무서운 건 나 자신이 열정을 잃는 거다. 그러지 않으려고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무언가 끌림으로 선택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내가 원하는, 내 길인가 보다 싶다. 부딪히고 힘든 순간도 있는데, 그저 이 길을 걷는 지금 내 모습 자체에 만족하기 때문인가 보다 싶고.
농익은 ‘헤드윅’ 기대한다.
농익지 않으면 어쩌지?
책임은 배우가 져야지.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외밀
STYLIST: 이진규
HAIR: 수안(아쥬레)
MAKE-UP: 권인선(아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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