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요리책>, <추억은, 별미> 등의 책으로 감성적인 글 솜씨를 뽐냈던 요리 선생 라자냐. 20년 가까이 시간을 보낸 주방에서의 경험을 통해 때로는 동그란 단맛, 때로는 뾰족한 신맛이 나는 소소한 기억들을 들려준다.
봄에는 그 시작을 알리는 노란 개나리가 있고, 노란 햇빛이 있고, 그 노란 햇빛을 쬐며 졸고 있는 노란 병아리가 있고, 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향기를 뽐내는 프리지아가 있으니 봄바람에도 당연히 노란빛이 스며 있을 것 같다. 노란 빛깔의 봄은 나의 부엌에도 노란색으로 찾아든다. 지난했던 겨울의 텁텁한 공기를 단번에 산뜻하게 단장할 수 있는 향기와 지친 입맛을 새콤하게 살려 눈을 반짝 뜨고 새봄을 맞게 해주는 그 맛,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예쁜 노란색 레몬. 레몬처럼 3월에 어울리는 단어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부엌의 봄단장은 단연 레몬을 사는 일에서 시작된다. 레몬은 외국에서 수입하니 굳이 계절을 가릴 필요야 없지만, 레몬을 사서 큼직한 유리 볼에 가득 담아 놓는 것으로 주방이 환해진다. 레몬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소금과 베이킹소다로 뽀득뽀득 문질러 말끔하게 씻어둔다. 레몬이 부엌에 자리를 잡으면 내내 상큼하고 은은한 레몬 향기를 따라다니느라 코가 제일 바쁘지만 덩달아 바빠지는 것은 레몬 스퀴저와 레몬 제스터다.
레몬은 본디 새콤한 과즙을 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과일이라 여겨지지만 실상 레몬의 정체성은 노란 껍질 안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레몬은 겉과 속,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레몬즙을 짜기 위한 레몬 스퀴저와 레몬의 노란 껍질을 얇게 갈아주는 레몬 제스터(lemon zester)는 봄날 내 부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봄의 전령 같은 존재다. 나의 부엌에는 여러 개의 레몬 제스터와 그보다 더 많은 레몬 스퀴저가 있다. 꼭 쓸 만한 것만 두었는데도 수납장의 한 칸을 차지할 정도니 그간 내 부엌을 거쳐 간 레몬 제스터와 레몬 스퀴저를 모두 가지고 있었더라면 꽤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할 수 있었을 듯싶다.
이십 년 전쯤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처음 사용했던 레몬 제스터는 다소 남루했다. 그 당시 나의 레몬 제스터는 사실 감자 필러라는 엄연한 제 이름이 있는, 레몬과는 일면식도 없는 도구였다. 다만 감자의 껍질을 깎을 때처럼 레몬의 노란 껍질을 얇게 깎아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구라는 이유로 나의 부엌에서 ‘레몬 제스터 대행’이 된 것이다.
감자 필러는 의외로 꽤나 쓸 만해서 한동안 레몬 제스터를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제대로 된 레몬 제스터의 손맛을 한번 본 뒤로 나의 구차한(?) 과거에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지금은 섬세하게 날이 잘 서고 강도도 좋으면서 갈리는 느낌이 좋은 레몬 제스터를 보듬고 산다.
감자 필러로 레몬 제스트를 만들던 무렵에 장만한 생애 첫 레몬 스퀴저를 박살낸 뒤로 레몬 제스터는 무조건 튼튼하고 견고한 것이되 플라스틱 제품은 피하는데, 지금은 스테인리스 제품, 유리 제품, 전동 제품, 나무 제품, 프레스형까지 재질도 출처도 성능도 다양한 레몬 스퀴저들이 내 부엌을 차지하고 있다.
레몬 스퀴저를 그렇게까지 다양하게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비슷비슷해 보이는 손가락 열 개도 제각각 할 일이 따로 있지 않더냐고 말하고 싶다.
레몬을 한두 개쯤 짜서 드레싱을 만들 때는 용량이 적당한 스테인리스나 유리 제품을,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좀 폼 나 보이게 레몬즙을 살짝 짜서 쓸 때는 나무 스퀴저를, 레몬치킨이나 레모네이드처럼 레몬즙이 넉넉히 들어가는 음식을 만들 때는 전동 제품을 쓴다. 그중에 하나라도 없다면 내 부엌은 무척이나 불완전해질 것 같다.
봄이 오고 레몬이 있고 내 부엌엔 레몬 제스터와 레몬 스퀴저가 이토록 지천이다. 그러니 이 요리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주키니를 넣은 레몬파스타. 레몬 제스터가 먼저 나설 차례. 레몬 제스터로 레몬의 노란 겉껍질을 살살 벗겨 낸다. 딱 세 번쯤 갈고 나면 눈부신 청춘과 환희가 내 손 안에 가득 차 있는 듯 힘이 넘치는 싱그러운 레몬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레몬의 노란 겉껍질을 꼼꼼히 벗겼으면 레몬을 반 잘라 레몬 스퀴저에 꽉 눌러 돌려가며 짜내 레몬즙을 밭는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신맛을 지닌 액체가 레몬 스퀴저 안에 가득 고인다. 벌써 입안에는 새콤한 침이 가득.
팬에 올리브유와 저민 마늘 몇 쪽을 넣은 다음 슬슬 저으면서 마늘 향을 내고 여기에 제스터로 갈아둔 레몬 제스트를 더해 마늘과 레몬 향이 넉넉한 오일을 만든다. 그러고는 삶은 파스타를 넣고 파스타에 레몬 향이 듬뿍 배어들도록 잘 볶다가 채 썬 주키니를 넣고 한두 번 버무리듯 섞으면 완성이다. 여기에 소금과 후춧가루, 레몬즙을 더해 맛을 더하고 여건이 된다면 집에서 직접 만든 리코타치즈를 조금씩 얹고 애플민트를 살짝 뿌려 마무리하면 더 좋다.
주키니의 연두색이 파스타 면 사이사이에 봄처럼 스며들고 파스타를 감싼 오일에서 레몬 향기가 담뿍 묻어나는 이 맑고 산뜻한 파스타. 완벽한 봄의 맛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라자냐는
미국 요리학교 CIA의 컨티뉴잉 에듀케이션 센터(Continuing Education Center)에서 스타일링, 메뉴 플래닝 등을 수료하고 이태원 오키친 셰프 스스무 요나구니에게 서양 요리를 사사했으며 궁중음식연구원, 전통병과연구원에서 전통 음식을 배웠다. 푸드스타일리스트, 요리 관련 콘텐츠 기획 및 제작자로 활동하다 스튜디오를 마련해 요리를 가르쳤다. 현재는 한가한 전직 요리 선생으로, 여전히 맛있는 음식을 먹고 요리하며 요리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lasagna7
<수상한 요리책>, <추억은, 별미> 등의 책으로 감성적인 글 솜씨를 뽐냈던 요리 선생 라자냐. 20년 가까이 시간을 보낸 주방에서의 경험을 통해 때로는 동그란 단맛, 때로는 뾰족한 신맛이 나는 소소한 기억들을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