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모든 롤스로이스가 만들어지는 곳이 있다. 지브리풍 이미지가 유행하는 AI 시대에도 여전히 장인들이 모여 수작업으로 차를 만드는 곳. 그래서 이름도 ‘팩토리 오브 롤스로이스’가 아닌 ‘홈 오브 롤스로이스’라 불리는 곳. 그곳에 가기로 했다. 사실 이번 출장의 최종 목적지는 바르셀로나였다. 새로운 전기차 ‘블랙 배지 스펙터’를 타는 것이 목표였지만, 롤스로이스는 인천-런던행 티켓을 먼저 보내왔다. 롤스로이스가 왜 특별한지 이해하기 위해선 타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자신들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지 두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롤스로이스는 영국 웨스트서식스의 치체스터 굿우드에 둥지를 틀었다. 치체스터는 영국 본토 남단에 있는 작은 도시로, 한반도로 따지면 경남 고성군 정도 되는 곳이다. 롤스로이스 본사가 외딴곳에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하지만 치체스터에 도착하자 눈앞에는 납득하기 힘든 풍경이 펼쳐졌다. 굿우드로 향하는 길에는 내내 지평선이 펼쳐졌고, 초록빛으로 뒤덮인 들판 위에선 양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에서 전 세계 부호들이 열망하는 차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홈 오브 롤스로이스 메인 로비에 들어서자 천장에 달린 문구가 우리를 반겼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라(Strive for perfection in everything you do).’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헨리 로이스 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1906년 찰스 롤스와 함께 롤스로이스를 만든 인물이다. 공장 투어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라색 가운을 입는 것이었다. 보라색은 건물 곳곳에 칠해진 ‘퍼플 스피릿’ 컬러와 같았는데, 가운을 들쳐보니 ‘노튼 & 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롤스로이스는 견학생 가운조차 새빌 로의 테일러 숍에서 만들었다.
몽상가들이 꿈꾼 자동차
롤스로이스 공장은 ‘팩토리’보다 ‘갤러리’에 가까웠다. 굿우드 직원들은 정말 두 손으로 차를 만들었다. 형형색색의 가죽을 재단하고, 전 세계에서 수집한 나무를 깎고, 붓을 쥔 채 커다란 보닛 위에 선을 긋는 식으로. 롤스로이스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처럼 어떤 재료도 허투루 고르지 않는다. 일례로 가죽이 그렇다. 롤스로이스는 높은 고도에서 자란 황소 가죽만 고집한다. 첫 번째 이유는 모기. 가죽에 모기 물린 자국이 남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모기가 살 수 없는 고지대의 소가죽을 사용한다. 두 번째는 가죽의 변형. 암소는 송아지를 배면 뱃가죽이 늘어나는데, 그 가죽을 피하기 위해 수소만 선택한다.
롤스로이스는 몽상가와 기술자들이 만든 차다. 공장 투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 섹션이다. ‘스타라이트 헤드라이너’는 실내 천장에 자리한 별자리로, 오늘날 롤스로이스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곳 작업자는 전부 여자였다. 이들은 수백 가닥의 광섬유를 마치 터키 카펫 짜듯 손으로 하나하나 가다듬으며 별자리를 만들어내었다. 그 별자리 역시 그냥 별자리가 아니다. 한 롤스로이스 고스트 천장에 수놓은 별자리는 어느 부부의 첫아이가 태어나던 날 밤하늘에 뜬 별들이었다. 굿우드의 밤하늘을 새기거나,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문장을 별자리처럼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회사가 아닌 페인트 회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날 롤스로이스가 차에 구현할 수 있는 컬러는 4만4000가지다.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는 롤스로이스는 고객의 머릿속에 있는 컬러를 구현해낼 때까지 컬러를 준비한다. 고객들의 요구도 남다르다. 어떤 차에 적용된 이글거리는 노을빛은 한 탐험가가 활화산 아래서 보았던 용암의 색깔이다. 저택 정원에 핀 수국, 반려견의 눈동자, 북극에서 본 오로라의 색깔도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온전히 이해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롤스로이스가 만들고 있는 건 자동차가 아닌 상징임을.
우리는 럭셔리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 궁금증이 들었다. 왜 하필 바르셀로나였을까? 시승을 하루 앞두고 롤스로이스 마케팅 직원이 설명했다. “바르셀로나는 예술의 도시입니다. 피카소가 이곳에서 처음 그림을 시작했고, 도시 전체는 안토니 가우디의 유산으로 가득하죠. 블랙 배지 스펙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죠.” 블랙 배지 스펙터는 롤스로이스 최신 기술의 결정체다. 롤스로이스 최초의 전기차 스펙터를 기반으로 출력을 한 번 더 끌어올려 고성능 모델로 완성했다. 그럼에도 롤스로이스 직원 중 누구도 이 차를 숫자로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날 무렵, 마케팅 담당자는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브랜드’가 아닌 ‘럭셔리 브랜드’라는 말을 덧붙였다.
시승 코스는 콜럼버스 기념탑 인근의 부두에서 출발했다. 약 7억원 되는 자동차를 낯선 도시에서 운전하려면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게 된다. 발끝 감각을 다듬고 고속도로에 차를 올릴 때쯤, 뒤늦게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차는 전기차였다. 스펙터는 보통의 전기차에서 느껴지는 주행 감각이 전혀 없었다. 페달을 밟을 때 인위적인 소리를 내며 앞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전기차 특유의 느낌이 없었다. 스티어링 휠을 좌우로 돌릴 때도, 깊숙이 가속페달을 밟을 때도, 다급히 브레이크 페달을 밟을 때도 그 감각은 다른 롤스로이스를 탈 때와 정확히 똑같았다. 스펙터를 ‘전기차’가 아닌 ‘롤스로이스’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목적지는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한 시간 떨어진 서킷, ‘마르크모터 카스테욜리’였다. 롤스로이스를 서킷에서 모는 경험은 롤스로이스 오너에게조차 드문 경험이다. 빨리 달리는 차가 아닌 편하게 달리기 위해 탄생한 차니까. 하지만 스펙터는 새로운 변화를 만든 차였다. 기존 스펙터의 오너 대부분은 동승자 없이 단독으로 차를 몰았다고 한다. 슬로바키아의 한 오너는 매일 프라하까지 400km를 스펙터를 타고 출퇴근하며 6개월 동안 9600km 이상 달렸다고 한다. 스펙터가 ‘운전하는 재미를 챙긴 롤스로이스’라면, 블랙 배지 스펙터는 그 재미를 최대치로 끌어올린 차였다.
서킷에서는 블랙 배지 스펙터에 새로 적용한 ‘인피니티 모드’와 ‘스피리티드 모드’를 시도해볼 수 있었다. 인피니티 모드는 쉽게 말해 부스트 모드다. 스티어링 휠에 자리한 ‘∞’ 버튼을 누르면 최대 659마력의 힘을 쏟아낸다. ‘스피리티드 모드’는 가장 극적인 가속력을 선사한다. 스피리티드 모드는 정지 상태에서 브레이크와 가속페달을 양발로 동시에 밟으면 자동으로 활성화된다. 여기서 왼발만 떼면 2900kg의 자동차가 4.3초 만에 시속 100km에 도달한다. 두 가지 모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한 전투기, 스핏파이어가 품었던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차 한 대에 수억원을 쓰는 사람들은 ‘비싼 물건’이 아닌, ‘나만 가질 수 있는 물건’을 원한다. 롤스로이스가 오너들의 모험담을 수집하고, 그 이야기를 수작업으로 빚어내는 이유다. 롤스로이스가 10대의 자동차를 만들면 10개의 이야기가 생긴다. 그리고 블랙 배지 스펙터는 지금 롤스로이스가 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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