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기념호를 만드느라 지난 몇 개월을 겅중겅중 건너뛰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깜빡했는데 올 초 파리에 다녀왔다. 편집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첫 방문한 컬렉션장이 바로 파리 패션위크였던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파리를 다.시. 걷다 돌아왔구나.
겨울 내내 지겹도록 백색 테러에 시달려야 했던 서울 못지않게 파리도 ‘10년 만에 내린 대폭설’이라는 헤드카피가 가판대의 신문 표제를 점령하고 있었더랬다. 물론 10~20cm 정도 쌓인 눈 따위는 애교로 봐주는 서울의 상황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만, 짙은 새벽에도 총출동해 도로 위에 맹렬하게 염화칼슘을 들이붓는 수백 수천의 공무원 부대가 존재하는 서울과 달리, 단 5cm만 눈이 쌓여도 교통이 마비되는 곳, 바로 파리.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한국인들(물론 원조는 일본인들)이 상상하는 고즈넉하고 낭만적인 파리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펼쳐냈던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와 살바도르 달리와 피카소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했던 파리라는 가슴 벅찬 공간은 이젠, 몇몇 지식인들의 자위에 가까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담배꽁초와 가래와 개똥으로 범벅이 된 인도. 진눈깨비가 눈에 섞여 으스스 쏟아지는데도 숍의 처마 끝, 아니면 지하철 환풍구 바로 위에 지저분한 솜이불을 부린 채 초점 잃은 눈으로 담배(인지 마리화나인지)를 빨고 있는 부랑자들의 행렬. 조금만 차가 막혀도 휙 하니 중앙선을 가로지른 채 차의 머리부터 들이밀고 보는 성질 급한 드라이버들.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지만 10년 전만 해도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금세 흥미를 잃은 채 “쎄울? 쎄울이 어디야?”라고 코웃음 치던 라틴의 일족들.
그래도 결국 그래서 파리인 것을. 담배꽁초를 우수수 집어던져도, 상의를 훌렁 벗고 다녀도, 시내 중심가에서 한 달 내내 노숙을 해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 눈이 펑펑 내려 교통이 마비될지언정 청소부에게 시간외 근무를 시키지 않는 도시. 그리고 그 청소부들을 묘파한 수채화가 시를 홍보하는 책자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그 가치관.
그러고 보니 내가 ‘파리’를(아니, 어쩌면 파리라는 이미지를) 가장 처음 접한 게 언제였더라.
참, 내 안엔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심상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소가 금빛 울음을 우는 곳’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등 고즈넉하고 아련한 자연 풍광을 묘사한 노래를 불러야 했을 때였다. 그렇다. 내 어린 시절의 대다수를 흘려보낸 마산과 창원은 ‘자연’과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는 회색빛 공단 도시였다. 마치 북악산과 남산과 양재 시민의숲이 서울의 중심을 잡아주듯 삼성과 현대와 효성의 대규모 공장이 도시의 큰 줄기를 긋고 있는 곳이었다. 아스팔트 틈바구니를 뚫고 샛노란 민들레 꽃잎이 살짝 얼굴을 들이밀듯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는 자그마한 공터와 놀이터가 그 틈바구니 사이사이에 애처로이 박혀 있는, 짙푸른 공장 굴뚝의 연기가 애달픈 도시.
아버지는, 그야말로 젊었다. 초로의 노인이 된 지금과는 달리 새까맣다 못해 흑진주처럼 번들거리던 피부도, 쩌렁 울리던 호쾌한 음성도, 웬만한 주변 남자들을 압도하던 굵은 팔뚝까지 그의 가장 빛나던 한때. 아마도 가족을 동반한 공단 체육대회였나 보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현장이었으니. 따가운 햇살, 톡 쏘는 사이다의 기포, 입을 한없이 오물거리게 했던 달콤한 카스텔라 빵의 촉감, 한시도 끊이지 않고 거대한 운동장에 울려 퍼지던 젊은 남자들의 껄껄 웃음소리와 고함과 시큼한 땀내와….
그 맨 앞에 서서 줄다리기를 하며 호탕한 웃음을 멈추지 않는 아버지가 애틋하면서도 낯설었다. 눈가를 끊임없이 찌르던 햇살 탓인지, 왠지 모르게 낯설어 보이던 아버지 탓이었는지 어느덧 나는 운동장을 빠져나와 주변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막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되었을까. 문득 주위엔 아무도 없고, 한없이 착한(아니 착해 보이고 싶었던) 아이였던 나는 감히 울음을 빼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큼직해진 눈을 껌뻑거리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나중에 아버지는 너무 의젓하게 혼자 앉아 있길래 멀리서 웃음 띤 채 5분 정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회상했지만 당시 내게는 1시간 아니 족히 반나절은 꼬박 지난 것 같은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 앞이 레코드 가게였는지, 아니면 어느 집 담장에서 흘러 나왔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재미 삼아 ‘굿모닝’과 ‘아이 러브 유 베이비’를 주워섬기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의 귓가에 분명히 들려오던 노래 한 자락은 이랬다. “아이 러브 패리스…모닝.” 귓가를 온통 감싸던 그 차분하면서 풍성한 음색이라니.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노래가 엘라 피츠제럴드의 ‘I love Paris’라는 것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그 패리스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와 이음동의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황량하면서도 설핏 아련한, 진부하면서도 역동적이었던 나의 20대는 ‘파리 키드’라는 단어와 함께 조용히 그 첫 발걸음을 내딛으려 하고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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