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침묵 끝에 선배 Y가 말했다. “글 써봐. 여성 패션지에. 추천해줄게. 너 대중문화에 대해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서른이 다 되도록 홍대 뒷골목에 죽치고 앉아 술이나 마시고 있는 것보단 낫지.” 그것이 평생의 업이 된 잡지와 나의 첫 인연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대학 생활을 했던 1990년대는 참 대책 없는 시절이었다. 나를 포함해 친구들 모두 수업은 뒷전이었고, 고등학교 때와 하등 다를 게 없는 외우기 위주 시험 따위 봐서 뭐하냐고 핏대를 올렸고(그러다가 난 대학을 6년 다녔다. 의대도 아닌데) 누구나 시네마 키드였으며, 심지어 파리 키드이기도 했다. (앞선 386세대가 모스크바 키드였다면, 우린 분명 문화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파리 키드였다. 당시 우리의 조잡한 리포트와 나우누리(아! PC통신…)에 올리는 글에는 항상 푸코가 인용되곤 했다. 도대체 ‘광기의 역사’와 한국 영화 <서편제>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었겠느냐만.) 심지어 방탕하기까지 했다. 친구 녀석 하나가 한 달 정도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전편을 탐독하느라 냄새 나는 반지하 자취방에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고, 코에이 삼국지 2편에 푹 빠진 한 녀석은 천하를 통일하느라 한 학기를 통째로 날려먹고 말았다(그럴 거면 등록금이나 내지 말 것이지).
그 한 축에 또한 잡지가 있었다. 당시 한국 영화의 눈부신 전성시대(또한 예술 영화의 전성시대였다. 세상에!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20만 명이나 보다니. 물론 나를 포함해 절반 이상은 영화 중반을 넘기기 전에 졸아 떨어졌겠지만)에 발맞춰 <씨네 21>과 <키노>는 눈부신 약진을 했으며, <리뷰> <오늘예감> <이매진> <현실문화연구> 등 대중문화를 감각적으로, 또 학술적으로 분석한 (지금의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잡지들이 큰 호응을 얻은 시기였다.
난, 그 한쪽에서 짧은 영어로 더듬거리며 낡아서 닳아빠진 <라이프>와 <뉴요커>를 읽었다. 아니 읽는다기보다 보았다. 먼지 폴폴 풍기는 헌책방에서 수십 년 전의 <뉴요커>를 콜록거리며 뒤적였다. 아! 존 업다이크,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잡지에 이런 글도 썼구나. 아서 거츠의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은 그야말로 세련과 감각이란 무엇인지를 꽉! 뇌리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라이프>는…. 글이 아니라 사진만으로도 사람의 감각과 감성과 관심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한없이 게으른 대학 생활을 보내다 스물다섯에야 억지로 끌려간 군대에서는 나보다 한참 어린 선임병이 내무반 구석에 숨겨뒀던 모 남성지를 처음 접했다. 아, 난 남자구나. 남자로서 쌓아야 할 취향과 지식, 그리고 위트. 무엇보다 옷차림이 중요하구나.
잡지 에디터로 일하면서 무수한 잡지들을 조우하고 흘려보냈다. <누벨 옵세르봐퇴르>. 시몬 드 보부아르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포토그래퍼 아트 샤이가 문틈으로 촬영한, 40대 초반의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체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손질하는 뒷모습을 과감하게 표지로 쓴 프랑스 최고의 지성파 매거진. ‘아, 잡지가 이렇게까지 지성적이어도 돼?’라는 탄성을 저절로 자아내게 했던, 국제 분쟁 뉴스와 디자인과 명품 패션 아이템이 교차하는 세계 유일의 매거진 <모노클>. ‘똥’을 주제로 무려 백몇 페이지를 일관되게 채우는 말도 안 되는 잡지 <컬러스>. 그리고 앤디 워홀이 창간하고 파이엔 배런이 리뉴얼한 철저히 ‘인물’ 중심의 잡지 <인터뷰>. 요즘 남성지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포트>에 이르기까지.
아레나 창간 7주년. 나는 무엇보다 잡지라는 존재를 먼저 예찬하고자 한다. 18세기에 젠틀맨 또는 젠틀우먼이라는 특정한 타깃을 대상으로 신문보다 먼저 활짝 꽃피었던 전통적인 미디어. 항상 유행의 최선두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했던 존재. 실험과 도전 정신으로 디자인과 레이아웃의 새로운 전범을 창출해왔던 매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 위트, 패션 등 흥미로운 정보를 제시하는 인쇄물. 무엇보다 느림과 아날로그의 미학을 바탕으로 책장을 넘기는 행위, 그리고 비주얼과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만족감으로 당신을 뿌듯하게 채워주는 책.
이제 아레나는 지난 7년 동안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 패션지로서 수행했던 블랙칼라 워커들의 지식 창고, 스타일 바이블의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남성지, 나아가 잡지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재미있고 위트 있으면서도 가슴 한 켠을 때리고, 남성의 환상과 꿈을 제대로 반영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하고, 무엇보다 패션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며 트렌드를 리드하는 잡지. 수백 년에 걸친 잡지의 오랜 꿈을 지속적으로 진화시키는 것. 아레나는 항상 그 가장 앞자리에 서 있겠다고 다시금 굳게 다짐해본다.
P.S. 아레나가 드디어 창간 7주년을 맞았다. 3주년과 5주년 때 큰 요란을 떨었던 우리는 이제는 우아한 박수와 함께 차분히 넘어가기로 했다. 왜? 이제 우리는 중견이니까. 이제는 콘텐츠의 묵직함과, 열렬한 애독자와, 남다른 가치를 갖춘 대한민국 대표 남성 패션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으니까. 대신, 그동안 <아레나>를 마음 깊이 사랑해주고, 지지 보족해준 당신과 좀 더 길게 이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지금부터 7월까지 매달 깜짝 놀랄 선물과 이벤트가 당신 앞에 등장할 것이다. 특히 창간 7주년과 오버랩되는 7월, 당신의 상상 그 이상의 것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번 기회에 더욱 많은 대한민국의 블랙칼라 워커들이 <아레나>의 식구이자 지지자로 굳게 자리매김해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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