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 홍대 앞의 한 클럽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지. 너 자신을 믿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하는 순간이 있는 거라고. 클럽 안에 들어서는 그녀는(어쩌면 약간은 술에 취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청바지가 날씬하게 감겨 있는 다리를 약간은 흐느적거리듯 움직이고 있었어. 문득 지금이 바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잔뜩 어두운 실내에 신경을 어지럽히는 조명만 번뜩이고 있었던 탓에, 꼼꼼하게 이목구비 따위를 살필 상황은 아니었어. 하지만 막 잡지 표지에서 오려낸 것처럼 정교한 미인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겠더라고. 그래도 날씬한 콧날만큼은 근사해 보였고, 웃을 때마다 살짝 입을 찌그러뜨리는 모양 역시 흡족할 정도로 귀여웠어. 억지스럽지 않은 색으로 화장한 입술, 어깨쯤에서 가볍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한번에 깎아낸 것처럼 매끈한 허리를 만지고, 쓰다듬고, 두 손으로 꼭 안고 싶다고 생각했지. 혹시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지만, 이런 경우가 내게도 흔한 건 아니라고. 아무튼 나는 어느 틈엔가 그녀 옆으로 다가갔고, 말을 걸었고, 함께 웃고 있었어. “우리, 나갈까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말을 뱉어버렸지. 그녀는 잘생긴 콧날을 살짝 구기고, 입매를 약간 찌그러뜨린 채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음, 좋아요.” 주위가 시끄러웠던 탓에, 그녀가 내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이야기하더군. 다가왔다 멀어지는 입술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지. 문득 귀 끝이 얼얼하고 기분이 훅해지는 것 같더라고.
SCENE 2 : 그의 아파트, 거실 그녀는 내 아파트 거실에 자리 잡은 널찍한 소파에 내던져진 것처럼 몸을 묻고 있었어. 혀로 살짝 건드리자 그녀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리더군. 여자가 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고, 나는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좀 더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내렸지. 팬티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 했는데, 여자가 나를 제지했어. “속옷 위로 만져줘. 그런데 잠깐, 혹시 일회용 비닐 장갑 같은 것 있어?”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부엌 서랍을 뒤지기로 했고, 기어이 한 묶음을 찾아냈지. 두 손에 비닐 장갑을 낀 채 애무해달라니, 아무래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더라고. 미끌거리는 비닐 장갑 너머로 만져지는 여자의 몸은, 피와 살과 가죽인 척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종류가 다른 그 무엇인 것 같더군. 그녀가 입술을 비틀어 신음을 흘렸고, 나는 팬티 위로 클리토리스를 어루만지는 손가락 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어. “괜찮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난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거든.” 대담한 그녀의 말에 놀란 건 오히려 내 쪽이었지. 하지만 한편으로 꽤 재미있게 놀아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고. 탁자 위로 손을 뻗어 시가를 하나 집어들었고, 그걸로 그녀의 팬티 안쪽을 간질이기 시작했어. 점점 높아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시가를 그녀 안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넣었지. 혹시라도 싫은 기색을 보이면 당장 그만두려고 했지만, 입술을 좀 더 비틀었을 뿐 내 손을 밀어내려 하지는 않더라고. 사실 그녀는 이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했어. 시가를 그녀의 몸에서 떼어냈고, 입에 문 뒤에 불을 붙였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자도 내게서 시가를 빼앗아 한 모금을 깊이 빨았어. 얼굴에 끼치는 담배 연기를 느끼면서 그녀의 가늘게 내리깐 눈이 음탕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지. 이쯤 해서 다음 단계를 시도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더군. 그런데, 아뿔싸. 콘돔이 떨어진 것을 이제야 발견한 거야. “콘돔을 아무리 많이 사두어도, 그건 결코 낭비가 아니란다.” 할아버지께서는 항상 이렇게 말씀… 하셨을 리가 없잖아! 나는 애매한 미소를 띤 채 여자를 살폈는데, 단호한 표정으로 벌써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있더라고. “잠시, 49.15초만 기다려.” 간신히 그녀를 붙들어두고 냅다 편의점으로 달려갔지, 뭐.
SCENE 3 : 그의 아파트, 부엌 돌아와보니 그녀는 내 옷장에서 큼지막한 셔츠를 하나 찾아 걸친 채, 냉장고를 열어보고 있더라고. “배고파요.” 높낮이는 없지만 끝이 뾰족한 목소리로 여자가 말하더군. 일단은 두 손에 꼭 쥐고 있던 콘돔 곽을 내려놓고 함께 냉장고 안을 살피기로 했지. 큼직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을 보자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가 떠오르더군. 바닐라가 강력한 최음제라는 사실 말이야. 심지어 바닐라라는 이름 자체가 ‘질’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이라니 말 다한 거지. 한 성 심리학자의 보고서에 의하면, 방문했던 바닐라 가공 공장의 남성 노동자들이 항상 발기 상태를 보였다고 하더군. 이건 아무래도 믿거나 말거나 식의 전설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지만. 초콜릿 역시 기분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 남아메리카에서는 바닐라를 초콜릿에 타서 먹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도 있고(스티븐 아노트 저, 사용 설명서 <섹스> 참조). 나는 아이스크림 위에 초콜릿 시럽을 잔뜩 뿌려서 그녀 앞으로 가져왔어. 크게 한 스푼을 떠서 입 안에 넣고 녹이면서 우리는 뻣뻣해진 분위기를 누그러뜨렸지. 그때, 여자가 셔츠 앞섶을 열고 맨손으로 아이스크림을 크게 뜨더니 자신의 가슴 사이에 바르더군. 그녀가 허리를 뒤로 젖혔고, 나는 가슴부터 배꼽까지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따라가고 있었어. 한참 몰입하려는 찰나, 내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몸을 떨기 시작하더라고. 일단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붙잡았지만, 폴더를 열 생각은 아니었지. 대신 기운차게 진동하는 녀석을 그녀의 클리토리스 쪽으로 가져갔다가 다리 사이를 지나 엉덩이 쪽으로 움직였어. 과연 지금 내게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은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할까. 이내 전화기는 울음을 멈췄고, 결국 내 손에서 미끄러져 툭 하는 무딘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어. 갑자기 발가락 끝까지 온몸이 통째로 빨갛게 된 것 같은 기분이더군. “좀 더운 것 같아.” 숨을 흘리는 듯한 그녀의 말에 우리는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앞에 자리를 잡기로 했지. 여자가 다리를 벌렸고, 나는 그 사이에 머리를 묻었어. 혀끝을 단단하게 세워 그녀를 건드리면서 손가락 끝으로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던 감기약을 찾았지. 박하 향이 강한 물약을 조금 입 안에 흘려넣은 다음, 다시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어. 강한 맛이 냄새를 덮어주는 데다, 그 얼얼한 느낌 자체도 두 사람 모두에게 꽤나 자극적이니까. 한껏 옥타브가 높아진 소리를 내던 그녀가 내 머리를 끌어올려 입을 맞추었어. 그리고 손으로 이미 오래전에 바지를 벗어던진 내 허리 아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지. 편의점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달렸던 보람을 이제야 찾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만 웃어버릴 뻔했다니까. 그녀가 콘돔의 포장을 벗겨 페니스 위에 끼워주었는데,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더군. 일단 콘돔 하나는 귀두까지만, 두 번째는 음경의 중간 위치까지, 결국 페니스를 완전히 덮는 데 콘돔을 3개나 사용하더라고. 과연 결과적으로 페니스 위에 2개의 돌출이 자리 잡게 된 것인데, 솔직히 큼지막한 손잡이가 달린 딜도가 된 기분이었어. “나쁘지 않을 거야. 날 믿어.” 흠, 일단 생각만큼 답답하지는 않을뿐더러 ‘찢어진 콘돔’이라는 인디안식 이름의 아들을 얻는 것보다 이쪽이 낫겠다 싶기도 하더라고. 점점 피스톤 운동에 가속을 붙이다가 기회를 틈타 그녀의 몸을 뒤집었지. 삽입을 시도하려는데 윤활제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더라고.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장면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가 벌이던 후배위 섹스. 나는 버터 조각을 하나 손 안에 꼭 쥐어서 녹이기 시작했지.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게 쉽지가 않아. 항상 기름칠을 해둘 필요가 있단다.” 역시 할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나 옳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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