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미국 월가 시위 현장. 극심한 빈부격차와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반발하는 성별, 인종, 삶의 지향점이 서로 다른 99%가 1%의 기득권을 향해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모여들었다. 슬라보예 지젝이 시위대와 함께 구호를 낭독하고, 탈립 콸리가 집회에서 발언을 하고, 여러 뮤지션들은 시위대를 격려하는 노래를 불렀다.
카니예 웨스트도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환호 대신 비아냥을 들었다. 그가 입고 온 지방시 셔츠 때문이었다. 99%에 해당하는 시위대에게 카니예 웨스트는 분명 1%의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이 해프닝은 ‘카니예 웨스트=지방시’라는 공식을 대중에게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사실 지방시를 향한 그의 열렬함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제이 지와 함께 만든 앨범의 아트워크를 지방시 수장 리카르도 티시가 맡았다는 건 유명한 사실.
그 앨범 속 트랙 ‘니거스 인 파리’의 뮤직비디오 역시 온통 지방시에 대한 헌정이다. 리카르도 티시가 특별히 제작한 지방시의 옷을 입은 카니예 웨스트와 제이 지가 등장하는데, 더 압권은 영상 효과다. 마치 지방시의 그래픽적인 작업처럼 데칼코마니 기법을 적용한 세련된 영상은 지방시의 캠페인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지방시를 사랑하는 흑인 래퍼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스위즈 비츠, A$AP 로키, 와카 플라카 프레임처럼 스타일 좋은 래퍼들은 새로 나온 지방시의 컬렉션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한다. 때론 랩 가사에 지방시에 대한 애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패볼러스의 ‘스웩 챔프’라는 곡에서는 나이키 에어조던 3, 뱀피로 된 스냅 백 모자, 에르메스의 H 버클 벨트, 그리고 ‘올 블랙 지방시’가 언급된다. 테오필루스 런던의 ‘빅 스펜더’에선 지방시의 9백 달러짜리 데님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좋고 싫음을 명확히 표현하고, 자신의 부와 취향을 과시하길 좋아하는 래퍼들은 거침이 없다. 최근 랩 가사에 자주 등장하는 브랜드로는 오데마 피게,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위블로, 람보르기니, 랑방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그중 지방시를 넘어서는 건 없다. 1980년대 그 대상은 베르사체였고, 1990년대는 랄프 로렌이었으며, 얼마 전까지는 루이 비통, 구찌, 펜디 정도였다.
우아함의 대명사였던 지방시가 힙합 문화에 흡수되기 시작한 건 작년 F/W 컬렉션에서 로트와일러 프린트 티셔츠를 내놓으면서부터였다. 이 티셔츠는 1990년대 초반 투팍이나 우탱클랜이 팬들을 위해 만든 조악한 프린트의 티셔츠를 연상케 하는 비주류적 코드가 있다.
그러나 리카르도 티시가 이때부터 힙합에 빠진 건 아니다. 그는 첫 지방시 컬렉션을 내놓을 때부터 힙합적인 요소를 다소 적용해왔다. 테일러링이 강한 날씬한 수트들 중간중간 쿠튀르적인 힙합풍 의상을 꾸준하게 집어넣었다. 건장한 흑인 모델들은 여타 우아하고 럭셔리한 하우스에서 도통 볼 수 없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는 래퍼들이 좋아할 만한 재료들을 더 많이 집어넣었고, 실루엣의 변화도 그것을 따라갔다. 흑인 모델의 비중도 늘어났고, 광고 캠페인에도 흑인 모델을 메인으로 썼다. 그가 이토록 힙합에 애정을 표하는 데는 그의 취향이 지속적으로 반영된 것이라 한다.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가난하게 자란 저에게 뉴욕은 꿈의 도시였습니다. 뉴욕의 화려함을 사랑하지만 빈민가에서 생겨난 하위문화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브롱크스 지역의 느낌을 좋아하죠. 전 클래식을 듣는 사람이 아니에요. 힙합을 비롯한 흑인 음악은 저에게 언제나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1990년대 흑인 래퍼들은 자신의 이름을 단 브랜드를 만들어 옷을 자급자족했다. 힙합 패션의 시장은 커졌지만 당시 힙합 브랜드가 지닌 성격은 폐쇄적이었고 생존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은 사뭇 다르다. 힙합이 전 세계 음악 시장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자급자족할 필요도, 선택의 권리를 감출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이 패션에 대한 안목과 취향을 드러낼수록 그들은 트렌드의 중심에 설 수 있다. 지방시가 가장 화두가 되는 건 힙합 문화가 지닌 패션 코드를 가장 세련되게 완성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래퍼들은 친구와 적을 동물적으로 구분해낸다. 리카르도 티시의 힙합 문화에 대한 진정성을 그들이 읽지 못했다면 지금의 지방시를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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