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여름이면 각 잡지를 비롯한 온갖 매체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제모 얘기다.
남성지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자들도 제모에 동참하라 말한다. 과거에는 남자의 털이 ‘남성성의 상징’이었지만 요즘에는 지저분하고 흉측하다는 거다. 우선 인정한다. 여자보다 예쁘장한 남자가 사랑받는 시대니까. 꽃미남의 상징 격인 송중기나 닉쿤이 손을 번쩍 들었을 때 드러나는 풍성한 ‘겨털’은 남자인 내가 봐도 살짝 민망하다.
그런데 각 매체들이 기사를 풀어가는 방식에는 문제가 좀 있다. 대부분 제모 제품만 나열하고 끝나는 거다. ‘그걸 누가 모르나?’ 검색창에 남성 제모만 쳐도 제품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다. 독자로서 궁금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제모 하면 아프지 않나?’ ‘하루만 면도를 안 해도 수염이 덥수룩해지는데, 그렇다면 다리털은?’ ‘겨드랑이를 제모하면 땀은 나지 않나?’ 대체 이런 궁금증은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또’ <아레나>가 나서기로 했다. 총대를 멘 건 무성한 다리털 때문에 15년째 반바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털털한 남자’, 바로 나였다.
배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모 제품 선정에 돌입했다. 우선 국내엔 남성 전용 제모 제품이 없었다. 남자의 털과 밀접한 제품이 있기는 하다. 바로 남자들이 만날 사용하는 면도기다. ‘그럼 면도기로?’ 즉시 면도기 홍보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연 제모는 되죠. 그런데 남자 면도기는 짧은 수염에 초점을 맞춘 제품이라서요. 피부 손상이 좀 클 것 같은데요?”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말. “피 좀 보실걸요.” 그녀는 자신이 홍보하는 또 다른 회사의 여성용 제모기를 추천해줬다. 그러나 그것 역시 ‘패스’하기로 했다. 솔직히 좀 비쌌다. 수시로 제모하는 여성과 달리 여름 한철만 사용하면 되는 우리 남자들이 지불하기엔 아까운 돈이었다. 남은 건 왁스 테이프 제모제와 크림형 제모제였다. 결국 두 가지 모두 사용해보기로 했다.
먼저 사용해본 건 크림형 제모제. 마트에 가면 생리대 주변에 꼭 진열되어 있는 그 제품 말이다. 이 크림은 털을 녹여 없앤다. 동봉된 면도기처럼 생긴 분홍색 기구(?)는 피부에서 떨어져 나간 털을 버리기 쉽게 긁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용설명서에 적힌 대로 제모할 겨드랑이와 다리 전체에 크림을 발랐다. 염색약 같은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게 1분여가 지났을까. 따가웠다. 비슷한 ‘고통’을 느낀 적이 있다. 머리에 샛노란 물을 들이기 위해 두 번째 탈색을 할 때였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팔 안쪽이나 부드러운 피부에 미리 시험해보고 써야 한단다. 그리고 나와 같은 따가움을 느낀다면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다른 곳은 참을 만했다. 그런데 사타구니에선 진정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랐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그 고통을 안다.
아, 혹시나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결코 사타구니 쪽엔 크림을 바르지 않았다. 다만 다리 안쪽에 바른 크림이 사타구니에 자연스레 묻어난 거다. 남자의 신체 구조상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원치 않던 털들이 함께 녹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3분 후 내 피부는 털들과 원치 않은 이별을 고했다. 완전한 이별이었다. 다리와 겨드랑이가 민둥산처럼 말끔해진 거다. 만져보니 수염을 만질 때처럼 까끌까끌한 느낌도 없었다. 여자 다리를 만지는 기분이었달까. ‘이게 내 다리라니!’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이제 왁스 테이프 차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이 방법으로 제모를 완성 짓지 못했다. 왁스 테이프는 테이프에 묻어 있는 액체를 살짝 녹인 다음, 제모할 부위에 붙이고 잘 문지른 뒤 한 번에 떼어내야 한다. 그럼 그 부분의 털이
뿌리째 뽑혀나간다. 같은 회사 여자 후배에게 듣기론 매끈한 다리 상태가 4주 정도 지속된단다. 그런데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따랐다. 청테이프를 다리에 붙였다 떼어내는 고통이었다. 눈물마저 찔끔 났다. 결국 좀 전에 ‘실험’했던 크림을 다시 바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말끔한 몸’의 소유자가 된 나는 15년 만에 반바지를 꺼내 들었다. 깔끔하고 시원해서 보기 좋았다. 주변의 반응은 정확히 반반으로 나뉘었다. 보통 남자들은 ‘더럽다’ ‘역겹다’ 등의 반응을 보였고, 여자들은 호불호가 심했다. 재밌는 사실은 여자들의 연령이 어릴수록 반응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겨드랑이의 경우는 좀 달랐다.
남녀 모두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여자 후배가 말했다. “선배, 제발 팔 좀 들지 마. 보기 민망해.” 그녀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겨털’이 삐져 나오는 거랑, 제모하는 것 중 뭐가 더 보기 싫어?” 그녀가 답했다. “여자들이 원하는 건 둘 다 아니야. 그냥 딱 보기 좋을 만큼만 있는 거? 가위로 숱을 치면 되지 않나?” 거울 앞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 ‘겨털’ 숱을 정리할 생각을 하니 차라리 제모가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만 겨드랑이를 제모하면 땀이 좀 찬다. 전문가에게 들어본 결과 땀이 더 많이 나는 것은 아니란다. 다만 겨드랑이 털에 묻던 땀이 옷에 묻어나기 때문에 땀이 많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라고 했다. 당연히 보기 안 좋았다. 게다가 3~4일이 지나자 다시 털이 나기 시작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겨드랑이 부분이 따가웠다. ‘면도 안 한 남자와 키스하는 여자들의 기분이 이런 거려나?’ 그건 다리 쪽도 마찬가지였다. 봄철에 새싹이 돋아나듯 털들이 올라왔다. 반바지를 입자니 무성한 다리털보다 오히려 더 보기에 좋지 않았고, 긴 바지를 입으면 종아리의 새로 난 털이 바지에 닿아 간지럼을 태웠다. 결국 한 번 제모를 하면 꾸준히 제모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또다시 제모를 했냐고?’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제모 하면 아프지 않나?’ ‘겨드랑이를 제모하면 땀은 나지 않나?’ 대체
이런 궁금증은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말인가. 총대를 멘 건 무성한 다리털
때문에 15년째 반바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털털한 남자’,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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