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은 서울에서 외박하면 안 되나?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 안국동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다음 주말 오후 2시, 나는 북촌의 게스트하우스 파인스위트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나무집 냄새.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북촌 여행의 숙박지로 이곳을 선택한 것은 이 아름다운 한옥에 모더니즘의 옷을 입힌 사람이 건축가 김경수라는 점과 옥상에서 창덕궁 안이 들여다보인다는 것 두 가지 때문이었다. 여행 준비물은 카메라와 속옷 한 벌이 전부. 대낮이었지만 일단 방에 누워본다. 유년기부터 오늘까지 지나간 세월이 단숨에 뒤섞이는 감동이 뿜어져 나온다. 부모님의 얼굴도, 은모래 반짝이던 강변도, 보리밭 종달새도 천장에 있는 것 같다. 나무와 벽지, 그리고 이 집에서만 특별히 볼 수 있는 해주 반상, 가구, 장, 벽지 등 모두가 잊었던 그리움과 편안함을 안겨주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룻밤 잠만 자고 돌아가도 테라피 효과를 볼 것만 같은, 그야말로 ‘치유 공간’이 되기에 충분한 곳이다.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창덕궁 뜰을 내려다본다. 궁궐의 소나무는 역시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1박 2일 북촌 여행은 단순무치를 주제로 하기로 했다. 북촌다운 것만 보는 것이다. 첫째 기와지붕이다. 한옥은 올려다볼 때도 유쾌하지만 내려다볼 때의 평화로움 또한 대단하다. 둘째, 골목이다. 추녀와 담장이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걷노라면 마치 미로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북촌 5·6경이라 불리는 가회동 언덕길 주변부터 삼청동 내려가는 길까지 모두 그렇다. 공방과 박물관 탐험도 북촌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한옥 안팎을 살피고 싶다면 개방 공간인 북촌문화센터에 가면 된다. 체험 가능한 공방 주제로는 민화, 매듭, 전통 연, 퀼트, 젓대(대금), 한지, 옻칠, 자수 등이 있고 장신구박물관, 북촌생활사박물관 등 마음 끌어당기는 박물관도 가볼 만하다. 1박 2일이면 충분히 둘러볼 만한 동선과 공간이다. 첫째 날 마지막 코스로 창덕궁 달빛기행이 심하게 끌어당겼지만 예약 성공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한 번은 일정을 맞춰볼 만한 코스이다. 나는 포기했다. 그래서 창덕궁 담장과 붙어 있는 파인스위트를 선택한 게 아닌가. 대신 첫날 밤을 삼청동에서 놀기로 했다. 가회동 골목을 빠져나가 삼청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길과 북촌 8경인 암반 계단을 내려간다. 싱그러운 봄바람 맞으며 미니어처 같은 숍들의 윈도를 서성대기도 하고 정원이 있는 카페에 앉아 맥주도 몇 잔 마신다. 조금 과한들 어떠하랴, 10분만 걸으면 스위트한 소나무 한옥에 누울 수 있는데.
넘치는 게 늘 문제다. 성북동 길상사 가는 길이 지나치게 진지했던 건 사실이다. 템플 스테이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누구나 조금은 그랬다. 출가하는 것도 아니고 달랑 1박 2일, 그것도 다음 날 아침에 절을 나오는 짧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지만, 템플 스테이에라도 참여하겠다고 마음 먹을 때의 복잡한 심사가 떠오르기 때문에 마음이 신산한 것이다. 길상사 입구에 서면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기대감 때문이다. 시방부터 휴대폰도 꺼놓고 일체의 미디어와 접촉을 중단하고 자신을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삐삐가 등장한 후 오늘날까지 어느 하루도 통신 없이 살아본 날이 없다. 익숙한 모든 것들과 잠시나마 헤어져야 하는 밤, 그 새벽에 나의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의심이었다. 사찰 예절을 배우고 안내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마음은 신기함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저녁 예불에 몰입하며 졸다, 깨다를 거듭하는 참선 와중에 지나간 인연들이 떠올라 울컥 울대가 뜨거워지기도 한다. 새벽, 미치는 거다. 3시 반이면 잠자리에 막 들어가기도 했던 시각이다. 그런데 기상이라니. 이 신비로운 체험의 성패는 108배에서 판가름 난다. 우리가 평생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108배를 해볼 기회가 있을까? 마음 약한 사람들은 108배 도중 급기야 눈물을 터트리기도 한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108배 시간이 끝나면 아침 공양과 간단한 작별 행사를 한 뒤 절을 나온다. 시간이 무지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다. 아침 공양을 6시에 했는데 또다시 허기가 몰려온다. 마치 그 시간까지 한 잔 마신 까칠한 기분이다. 성북동 설렁탕에 가서 아침 2차를 결행한다. 육식을 하니 다시 속세로 돌아온 실감이 제대로다. 그러나 도량에서 느낀 편안함을 단박에 내버리고 싶지는 않다. 혜화동 쪽으로 내려가다 빈곤한 언덕을 올라 심우장을 기웃거려본다. 시인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계곡 건너편에는 한국 최고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데 독립운동을 하다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선생의 언덕은 여전히 가난이 덕지덕지 땅바닥을 문대고 있다. 성북동에는 세 곳의 뮤지엄이 있다. 간송미술관, 성북구립미술관, 그리고 최순우 옛집이 그곳들이다. 간송미술관은 봄과 가을에 꼭 한 번씩만 기획전을 연다. 대박급 전시가 대부분이니 그 시기를 알고 템플 스테이를 계획해볼 만하다. 성북구립미술관은 모더니즘 뮤지엄이다. 최순우 옛집은 하마터면 헐릴 뻔한 것을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유산1호로 매입, 평생 한국의 미를 위해 살다 간 선생을 기념하고 있다. 혜화문으로 가 다시 성곽길을 따라 와룡공원 어귀까지 산책한다. 성북동 여행을 여행답게 만들어주는 절정의 코스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요즘은 순전히 잠만 자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잠을 자기 위해 가방을 꾸리고, 자동차에 기름 가득 채우고, 먼 길 운전을 위한 점검도 한다. 건축가가 만든 펜션이 그런 곳들이다. 서산 황락저수지 상류 호반에 가면 부티크 펜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수화림과 빈티지 스타일의 리빙 공간 제로플레이스가 나란히 있다. 이곳들은 모두 건축과 디자인이 우리 삶에 어떤 풍요와 위안을 안겨주는지 보여주고 있다. 한 채의 집에 4개의 완벽한 독립 공간을 만들어낸 수화림은 디자인 그룹 오즈에서 설계한 작품으로 모더니즘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제로플레이스는 20년 동안 음식점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건축가 이상묵 씨와 노경록 씨가 리모델링, 매력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건축가는 제로플레이스를 가리켜 ‘하루집’이라 했다. 건축은 물론 내부에 배치된 가구 하나하나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카레 클린트의 스칸디나비안 가구에 퍼니그람의 침대, 행어, 키친을 보고 눈이 돌아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잠자리에 들기 전 마당에 나가 산책을 한다. 적막이란 이런 것이다. 산중 저수지에서는 물결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숲은 깊고 하늘은 어둡다. 두려움? 그런 건 없다. 엄마의 자궁으로 되돌아간 듯한 안온함이 온몸을 감쌀 뿐이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갖고 침대로 들어간다. 누에처럼 웅크린 자세로 간만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제로플레이스를 떠날 때는 안녕히 계세요 하고 인사하지 않는다. 마치 제 집인 양, 다녀올게요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간다. 오늘 저녁에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다 집에 돌아가 지름신을 불러 몇 달 치 월급을 집 고치는 데 날리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하루집에서의 문화 충격은 그러나 이름도 어여쁜 해미읍성에서 맞은 해풍이 어지간히 씻어준다. 해미읍성은 조선 시대 때 건설된 성곽인데, 산성에 익숙한 사람에게 평지 산성이란 신기함 그 자체다. 해미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중요한 유적지 가운데 한 곳이다. 천주교 해미성당에는 병인박해 때 이 일대에서 맞아 죽고, 생매장당해 죽고, 돌에 던져져 목숨을 달리한 당시의 비극이 기록되어 있다. 서산에 와서 간월암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최초로 세웠다고 하는데, 왜 하필 갯바위 언덕에 암자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무학대사가 풍수지리의 대가라 하던데, 그래서 간월암은 물론 이 일대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일까?
순천에 갔다면 꼭 대대마을에서 자야 한다. 펜션도 좋고 민박이면 더 좋다. 만과 한걸음이라도 가까운 민가면 금상첨화다. 집착해도 좋다. 첫 번째 이유는 안개. 천재 작가 김승옥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의 문장은 대표작 <무진기행>에 남아 있으니.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은 오늘의 순천만 자연생태공원 바로 앞 대대리를 말한다. 학창 시절을 순천에서 보낸 감성 덩어리 김승옥만이 표현할 수 있었던 순천만의 풍경이다. 순천의 아침이 안개에 점령당하는 것은 그곳이 습지이기 때문이다. 암흑보다 무서운 게 안개다. 난반사된 빛이 서로 뒤엉켜 시계 제로 상태를 만들어버리는 자연의 오묘함. 순천만 일대, 특히 대대리에서 아침을 맞을 수 있다면 평생 잊을 수 없는 안개의 장관을 경험할 수 있다. 안개를 떠나서는 아니 아니 아니된다. 서서히 걷히면서 문득문득 보이는 지붕, 갈대, 전봇대 등이 마치 안개꽃처럼 아른거리는 순간을 놓칠 수도 있다. 순천만은 장엄한 습지대다. 우리나라에서는 여간해서 볼 수 없는 해안 하구의 자연 생태계가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전되고 있는 곳이다. 람사르 협약에 등록되고도 남을 만하다. 관광객들의 시끄러운 수다와 해장술에 취한 노인들의 꼬부라진 노랫가락도 도무지 하늘로 날아갈 수 없다. 습기가 언어마저 흡입해버리는 것이다. 만의 S자 수로는 그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사진을 취미로 삼는 사람치고 이곳으로 출사를 나와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습지로 들어가기 전, 자연생태관은 꼭 들러봐야 한다. 무식하면 눈앞의 보석도 놓칠 수밖에 없다. 생태관에서 개론이라도 습득한 후 나가야 생태계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전망대에 올라가면 부감 컷을 만들 수도 있다. 순천만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데크로 조성된 산책로가 있다. 생태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유치한 걸 즐기는 성격이라면 빨간 색깔의 갈대열차가 제격이다. 개인적으로는 선상 투어가 좋았다. 습지대 여행은 역시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움직이는 배가 최고다. 대대 선착장에서 출발해 순천만의 대표 코스인 S자 갯골을 돌아오니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칠면초 없는 순천만도 생각하기 싫다. 칠면초는 1년에 일곱 번 색깔을 바꾸는 수생식물인데 여름철 빨간색으로 변신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순천만의 마지막 감동은 저녁 7시 무렵에 펼쳐진다. 갯벌과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마을을 감싸며 떨어지는 황금 불덩어리 하나, 바로 와온의 낙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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