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전성시대는 끝났는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과연 우리에게 ‘여배우 전성시대’가 있긴 했는지, 있었다면 언제인지, 그것이 과거의 영광이라면 현재는 끝났다고 단정 내려도 되는 건지, 이런 이야기들은 의외로 추상적이면서도 주관적인 평가이며 간단히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이 질문엔 의외로 심오하고, 의외로 거시적이며, 의외로 비판적인 구석이 있다.
사실 ‘트로이카 시대’니 ‘여배우의 황금기’니 하는 표현은, 실증적인 데이터 작업과는 무관한, 저널의 호들갑이거나 미모 중심의 평가인 경우가 많다. 여기엔 종종 음모론이 동반된다. 누가 누구를 키우고 있다더라, 어마어마한 스폰서가 있다더라, 재벌가의 누구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더라…. 가끔은 사실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확인할 수 없는 소문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여배우는 주체적으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한국 연예계의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배우 전성시대’를 이야기하다 보면 만만치 않은 장벽과 마주친다. 사실 배우를 평가할 때 개런티만큼 확실하면서도 유일한 근거는 없다. 따라서 어느 여배우가 얼마를 받고, A급 대우를 받는 여배우가 몇 명 정도 되며, 최근 몇 년 동안 그 추이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다면 ‘여배우 전성시대’에 대한 문제는 쉽게 정리되는 셈이다. 개런티가 꽤 구체적으로 공개되는 할리우드에선 간단했다. 데미 무어가 최초로 1천만 달러를 돌파했던 1990년대 중반과, 줄리아 로버츠가 처음으로 2천만 달러를 넘어섰던 2000년이 당대 여배우의 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배우의 몸값은 성역처럼 베일 속에 감춰져 있다. 세월이 흐른 후 강남에 소유한 빌딩의 시가를 통해서나 그 배우의 ‘과거 실체’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현재 시점에서 신뢰할 수 있는 배우 관련 데이터는 흥행 성적뿐이라는 이야기인데… 이것도 정확하진 않다. 흥행작에 ‘출연한 것’과 흥행을 ‘이끈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한국 영화 흥행 1위는 <최종병기 활>이었다. 여기엔 문채원이 나오지만, TV 드라마 <공주의 여자>로 한창 인기 몰이 중이었다고 해도, 그녀가 전국 7백48만 명 흥행을 이끌진 않았다. <써니>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엔 13명의 여배우가 나오지만, 그 누구도 7백45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이끈 주인공은 아니다.
하지만 <오싹한 연애> 같은 영화는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 영화의 관객 3백1만 명 중에 적어도 절반 이상은 ‘손예진’이라는 이름에 이끌려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손예진 ‘때문에’ 이 영화를 봤을 수도 있지만, 손예진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감이 더 크게 작용했을 거다. <블라인드>의 김하늘도 마찬가지다. 2백37만 명의 관객 중 상당수는 ‘김하늘의 시각장애인 연기’에 이끌렸을 것이다. 결국 ‘여배우 전성시대’는 양적인 문제다. 흥행의 견인차가 될 수 있기에 많은 개런티를 줘도 아깝지 않은 여배우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과거에 비해 늘었는지 줄었는지, 이 부분을 따지다 보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인 셈이다.
그런데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흥행이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는다는 거다. 프로야구 선수는 전년도 성적이 시원찮으면 연봉이 대폭 깎인다.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배우는 그렇지 않다. 이른바 ‘끕’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이나영이 주연을 맡은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2010)가 전국 20만 명도 안 되는 관객을 동원했다고 해서, 최근에 개봉한 <하울링>에서 그녀의 개런티가 파격적으로 내려가진 않았을 것이다. CF에서 위치도 여전하다. 왜냐고? 그녀는 ‘이나영’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끕’은 한 편의 작품을 이끌고 나갈 수 있는 배우의 힘이다. 그건 반드시 연기력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떤 배우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었을 때 관객에게 얼마나 큰 믿음을 줄 수 있고, 영화 자체가 얼마나 크게 보이는가. 오히려 그런 문제다. 이것은 관객 수나 시청률 같은 숫자로 환산할 수 없다. 10여 년 전 여배우 트로이카로 심은하와 고소영과 전도연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들 중 사실 심은하와 고소영은 ‘강한 흥행력’을 지닌 여배우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어떤 ‘오라’가 있었다.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시대의 대중이 원하는 그 무엇이 그들을 여신으로 만든 거다.
김태희나 전지현도 마찬가지다. 최근 그들의 영화는 모두 실패했다. 세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김태희는 단 한 번도 흥행한 적이 없다. 최근작 <그랑프리>(2010)는 전국 20만 명도 안 되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CF 파워는 여전하며, 최근엔 일본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전지현은 <데이지>(2006)부터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를 거쳐 <블러드>(2009)까지 세 편 연속 실패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원 톱 주연’이 가능한 여배우다.
‘여배우 전성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를 종합해야 가능하다. 현재 흥행작을 이끌 수 있는 여배우가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잠재적인 능력을 지닌 어떤 ‘끕’을 지닌 여배우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 여배우들의 상황이 조금 초라한 것은 사실이다. 단지 수사법에 그칠 때도 있지만, 한국 영화사에서 여배우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던 시절엔 언제나 ‘트로이카’ 체제가 구축되었다. 흔히 1970년대 초에 등장한 문희-남정임-윤정희를 트로이카 1세대로 꼽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1950~1960년대의 최은희-김지미-엄앵란을 0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세대는 1970년대 후반의 정윤희-유지인-장미희. 1980년대엔 원미경-이미숙-이보희가 있었고, 1990년대엔 강수연-심혜진-최진실이 트로이카를 이루었으며, 1990년대 말로 접어들면 앞에서 언급한 심은하-고소영-전도연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겹치지 않는 매력을 지니며 자신의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면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는 특별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여배우들을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일 코드 속에 가두었다면, 이른바 ‘문화의 시대’로 접어들었던 1990년대엔 좀 더 다양한 욕망이 터져 나왔고 그 선두에 여배우들이 있었다. 먼저 당대의 트로이카를 볼까? 강수연이 월드 스타였다면 심혜진은 ‘콜라 같은 미소’로 다가와 전방위적인 연기자로 변신했고, 트렌드의 정점이었던 최진실은 최루 멜로의 헤로인이 되었다. 여기에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가 있었고, 1980년대 하이틴 스타 그룹인 김혜수-채시라-하희라-이미연도 여전히 건재했다. 신은경과 김지호는 ‘신세대’ 이미지를 대변했고, ‘완벽 미인’이었던 황신혜와 이혜숙도 여전히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단아했던 최수지, <모래시계>의 고현정, ‘엉덩이가 예쁜 여자’ 정선경, ‘미단 공주’ 진희경…. 여기에 오연수, 김희선, 최지우 등 다양한 이미지의 신인들이 급성장했던 1990년대였다.
1990년대는 여배우뿐만 아니라, 영화와 TV와 가요계를 통틀어 ‘스타의 전성시대’였다. 그 결과 2000년대 초부터 거대 매니지먼트가 등장했고, 한국 영화의 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제작 편수가 급증하자 배우들의 몸값도 급상승했다. 강수연이 1억원에 세 편 계약한 것이 화제가 되었던 게 1980년대 후반이었다. 2000년대 초엔 2억~3억 원이 우습게 오가곤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부터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배우 전성시대는 끝났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남녀 따질 필요 없이 5~6년 전부터 ‘배우의 시대’ 자체가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다. 더 이상 박스오피스에서 절대적인 스타 파워는 찾아볼 수 없다. 데뷔작 <닥터 봉>(1995)이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한 이후, 1999년 <텔 미 썸딩>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한석규는 <이중간첩>(2002)부터 반타작도 못하고 있다. <리베라 메>(2000)부터 <박수칠 때 떠나라>(2005)까지 8연타석 안타를 친 차승원은 <국경의 남쪽>(2006)부터 쉽지 않다. ‘흥행 대마왕’들의 이름만으로 성공을 보장하는 시대는 완전히 끝난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원빈과 송강호 정도? 하지만 송강호도 최근 <푸른 소금>(2011)으로 고배를 마셨다.
여배우들에겐 더 가혹한 시절이었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남성 장르가 중심을 차지하면서 여배우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개인적으로 여배우의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던 마지막 영화가 이영애의 <친절한 금자씨>(2005)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솔직히 대형 신인의 느낌도 문근영이 마지막인 것 같다. 한편 이 와중에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여배우의 시대를 이끌었던 여배우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최진실과 장진영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고, 이영애와 김희선과 전도연과 고소영은 결혼과 함께 활동이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심은하는 아예 은퇴했다.
그럼에도 우리 곁엔 여전히 좋은 여배우들이 많다. 전도연, 김혜수, 엄정화, 김윤진 같은 역전의 용사들이 있고 임수정, 최강희, 수애, 공효진 등은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으로 어필한다. 손예진-김하늘-하지원은 이른바 ‘빅 3’를 형성하고 있다. 다시 묻는다. 여배우 전성시대는 끝났는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하지만 1990년대의 화려했던 과거와 비교해선 안 된다. 지금은 규모와 콘셉트와 아이템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바야흐로 ‘자본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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