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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ocle in Wonderland

왜 세계는 지금 최첨단 아이패드에 서비스되는 것도 아닌, 구닥다리 종이 잡지 한 권에 이렇게도 열광하는 것일까. 그 의문의 근원을 찾아 직접 런던으로 짐을 꾸려 떠났다. 자, 여기가 바로 이상한 나라의 입구, <모노클>이다. 당신이 그렇게도 엿보고 싶어 했던

UpdatedOn September 08, 2011



히드로공항에 발을 내딛은 건, 요즘 신문의 주요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런던 폭동’이 벌어지기 불과 4주 전이었다. 그 짧은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메트로폴리탄과 사상 최악의 거리 약탈이라는 상반된 풍경이 펼쳐지다니.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런던이라는 복잡 미묘한 도시를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는 키워드일지도.
왜 아니겠는가. 세계 최초로 민주주의가 실현된 공화국이자 여전히 왕실의 권위가 공고한 나라, 애덤 스미스가 초기 자본주의의 권위를 확립한 도시이자 칼 마르크스가 말년에 <자본론>의 집필에 매진했던 도시, 최상위 계층을 위한 폴로, 크리켓 등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는 곳이자 클래시와 섹스 피스톨스 등 최전선 펑크 그룹이 공공연히 런던 시내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곳. 무엇보다 언제 내릴지 모르는 비 때문에 한여름에도 하이톱과 핫팬츠 위에 트렌치코트를 길게 늘어뜨린 늘씬한 여성들이 환상 속의 한 장면처럼 옥스퍼드 서커스의 한복판을 활보하고 지나가는 도시.
굳이 <모노클> 편집장 타일러 브륄레의 육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가 왜 하필 런던이라는 도시를 근거지로 삼았는지 익히 짐작할 만했다. 일본의 전통 공예품과, 가장 독창적인 버전의 에르메스 컬래버레이션 제품과, 동베를린 지구에 잔류한 아시아의 마지막 사회주의자들과, 서울의 소녀시대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레바논이라는 도시와, 삶의 질이 가장 높은 헬싱키를 동시에 다루는 이 미스터리한 잡지를 창간하겠다고 했을 때 과연 그 배후 도시로 어디를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건 마치 조앤 K. 롤링이 ‘머글’들이 사는 시내 뒷골목에 마법사의 세계가 존재할 거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을 때 오직 런던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이유일 테다. 

3개월 동안 <모노클> 측과 수많은 서신을 주고받은 끝에 확정된 인터뷰 날짜가 바로 오늘이다. 아침부터 명치 바로 아래에서부터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이 묘한 박동 소리는 도대체 몇 년 만에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인지.
기껏 어렵게 창간해 최정상의 위치에 올려놓은 <월페이퍼>를 하루아침에 놓아버리고는 <모노클>이라는 몽상을 꾸기 시작한 2006년, 타일러는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했더랬다. “잡지 시장은 완전히 허물어졌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미디어’라는 용어를 입버릇처럼 내뱉던 그 때 나는 근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은 물론, 공항 라운지와 대도시의 가판대에도 내가 찾는 정보를 다루는 매체는 전혀 없었다. 세상 모든 잡지들이 한없이 가벼워지고 부실해지는 지금, 과연 독자가 변한 것인가 잡지가 변한 것인가. 독자의 지성과 취향, 패션 감각 등 그의 존재 자체를 대변해온 역사상 가장 특별한 미디어, 잡지는 도대체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인가.”
불과 50명도 안 되는(초창기에는 8명) 직원만으로 국제 비즈니스에 대한 최고급 정보, 유혈이 난무하는 이집트 혁명 최전선에서 서술해낸 현장 에세이, 유수의 패션 명품들과 쉼없이 협업해 창조해낸 스페셜 에디션,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에 대한 위트 넘치면서도 적확한 분석 등 <모노클>은 그야말로 타일러의, 타일러에 의한, 타일러를 위한 잡지임이 틀림없다.
저널리스트로 경력을 시작한 타일러는 1994년, 아프가니스탄 분쟁 지역에 취재를 하러 갔을 때 총알 관통상을 당하면서 결정적인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저널리스트로서 평생을 살아가고 싶은 욕구와 무언가 다른 지향점을 고민해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어릴 때부터 깊이 매혹되었던, 아날로그적이면서도 트렌디한 역설의 매체, 잡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지옥의 출구가 열리기 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월페이퍼>를 28세에 창간한 그는 브랜드 마케팅 에이전시 ‘윈크리에이티브’를 설립하는 파격적인 행보로까지 나아갔다. 저널리즘과 상업성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비판에 ‘브랜딩을 할 때에도 저널리스트처럼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분석한다’는 단호한 반박을 앞세웠던 그의 고민은 결국 <모노클>로 그 결실을 맺었다.

여기까지가 서울에서 머리 한구석에 단단히 입력해온 타일러에 대한 정보의 총합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왜 런던 올림픽을 위한 공사로 곳곳이 시끄러운 옥스퍼드 서커스, 청량한 햇살과 스산한 빗줄기가 쉼없이 교차하는 메트로폴리탄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일까. 서울에 잔뜩 밀린 원고와, 에이어워즈를 비롯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각종 프로젝트들을 그대로 놓아둔 채 불꽃같은 마감의 한복판에서 굳이 런던행 비행기를 잡아탄 이유는 무엇일까.
맞다. 그 시작은 역시나 <모노클>이었다. 평소 가장 동경하던 매체의 수장, 타일러가 직접 지휘해 만들어낸 독일 <슈피겔> 방문 기사가 나의 호기심과 도전 의식을 자극했다. 그래, 당신이 자신만의 영감의 근원을 직접 찾아가 그 이면을 들여다봤다면, 나 또한 당신을 직접 만나 그 이면을 꼼꼼히 해부해보리라.
아이폰 구글 맵을 켰다 껐다를 반복하며 옥스퍼드 서커스 중심가에서 10분 정도 찬찬히 걸어가자 시끄럽던 경적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지도는 바로 10m 앞을 목적지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비슷비슷한 모양새의 18세기 빅토리아풍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거리에서 <모노클> 사무실을 분간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동행한 포토그래퍼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고서야 투명한 구리로 장식된 자그마한 간판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Midori House, Wincreative and Monocle’. 맞다. 당신이 익히 <상실의 시대>에서 접했을 그 미도리다. 이미 꽤 알려져 있다시피 <모노클>은 일본의 전통 디자인과 감성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세네카라고 불리는 책 사이드 면에 일본어로 ‘모노클’을 기입해 넣을 정도로. 그리하여 그들은 새롭게 찾아낸 4층짜리 보금자리에마저 ‘녹색’ 또는 ‘싱그러움’을 뜻하는 일본어를 그대로 붙인 것이다.

초행자가 찾기 힘든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베이커街와 연결되는 작은 두 개의 뒷길이 만나는 코너, 작은 터널처럼 생긴 뜰 안쪽으로 쑥 들어가야만 우리의 목적지 모노클 건물이 나오기 때문. 한시가 바쁜 때에는 흉물스러운 한국식 거대한 간판도 때로는 효용이 있다는 자각 아닌 자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때 주차장이었다는 뜰에는 모던하면서도 자연 풍광에 딱 맞춘 테이블과 의자들이 늘어 서 있었고(나중에 들으니 타일러의 어머니 작품이라고 한다) 자전거 40~50대는 족히 세울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또 앨리스를 매혹시켰던 비밀의 문에 비해 지나치게 모던하기는 했지만 특유의 강렬한 색감과 클래식한 디자인이 조화된 모노클의 상징물들이 유려하게 늘어서 있는 정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새하얀 블라우스와 롱 시폰 스커트를 입은 소녀풍 일본 여자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을 정도로 딱 떨어지는 수트 차림의 영국 남자와 나란히 마주 앉아, 모노클의 바이오그래피를 설명하는 리플릿을 접어서


캔버스 가방에 넣는 풍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이상한 나라’로 진입하였구나. 보아하니 1층은 리셉션 공간과 식당 공간으로 이뤄져 있는 듯했다. 비록 타일러를 비롯해 4명의 에디터들과 줄줄이 인터뷰를 하기에도 오늘 하루는 빡빡하겠지만, 아직 시작까지 1시간 정도 시간은 남아 있다.
순망한 눈망울과 모던한 안경테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청년 데이비드(그는 우리 식으로 치자면 어시스턴트다. 다만 파트타이머는 아니고, 정직원이다. 에디터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찾고, 각종 자료를 준비하고, 이번처럼 특별한(?) 손님이 찾아오면 영접하고 안내하는 역할까지 한다)가 기꺼이 우리를 안내했다. 2층이 에디터들이 일하는 작업 공간, 3층은 윈크리에이티브 사무실, 4층이 바로 우리의 히어로 타일러의 집무실과 접견실이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각 층은 커다란 통유리로 되어 있고, 창문을 열면 화사한 녹음을 곧바로 만끽할 수 있는 거대한 테라스로 나갈 수 있다.

젠장, 이곳은 천국이다. 테라스 바로 앞에(채 1m도 떨어져 있지 않다) 런더너들이 한가로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휴식을 즐기고 있는 패딩턴 스트리트 공원이 내려다보인다. 왜 이곳에 굳이 ‘미도리 하우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겠다. 멀뚱히 나를 관찰하던 데이비드가 설명을 시작한다. “구석구석 모든 디테일까지 타일러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답니다. 1층의 경우 스웨덴 건축가 안드레스 마틴 로프가 바닥을 리디자인해 리셉션 공간은 물론, 대기실과 주방, 응접실까지 만들어줬죠. 두꺼운 펠트 커튼을 달아 필요에 따라 식당과 이벤트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고요. 우리가 가장 신뢰하는 스위스 목공 블루머 슈크라이너는 메인 데스크와 리셉션, 수납공간, 문, 휴대품 보관소를 효율적으로 구성해주었죠. 아, 그리고….”
온갖 휘황찬란한 이름들로 벌써부터 머릿속이 꽉 차버린 느낌이다. 과연 실내로 시선을 돌려보니 비트라의 알루미늄 의자들, 산타&콜의 조명 기구들, 덴마크 잡지 어딘가에서 본 듯한 야외용 가구와 데크용 의자들…. 거 참, 타일러의 까탈스럽기 이를 데 없는 엄청난 취향이라니. 언뜻 둘러본 사무실 내부의 풍경만으로도 왜 그렇게 고급스러운 디자인 감각이 <모노클>에 배어들 수 있었는지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풍경은 사람들, 거대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수백 장의 시안 프린트를 잔뜩 늘어놓은 채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태프들, 짙푸른 초록색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채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큼지막한 지도를 유유히 들여다보고 있는 디자이너 한 명,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서는 주위를 돌아볼 틈조차 없다는 듯 긴박한 표정으로 자판을 마구 두드리고 있는 에디터 한 사람.
마치 서로 다른 팀에 속해 있는 듯 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 있건만 그들 사이에는 2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일단, 하나같이 이 사무실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완벽한 의상을 갖추고 있다는 것. 바쁜 업무 탓인지 1층 리셉션장과는 달리 완벽한 수트 차림은 없었지만 정확히 자로 잰 듯한 바지 길이, 자신의 얼굴에 딱 어울리는 안경테 등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심지어 런더너와 도쿄리언의 혼혈인 듯한 한 동양계 스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 셔츠를 천천히 몸에 걸치면서도 영화 속 한 장면을 보듯 스스륵, 그리고 완벽하게 몸에 맞춤한 핏을 즉석에서 구현하고 있었다.

더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는 마치 하버드대 공공 도서관을 연상케 하는 세련된 조명이 설치된 심플한 책상들이었다. 각자 개인용 책상을 갖고는 있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책상들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어 보였다. 모던하고 디자이너블하면서도 실용적인 책상, 하지만 그 주인이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완벽히 정돈된 책상의 자태는 사무실과, 집과, 런던과, 해외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모노클>인들의 일상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덧 점심시간. 데이비드가 부지런히 테라스에 식사용 테이블을 깔기 시작했다. 베지테리언을 배려한 파이와, 버섯 요리와 5종류가 넘는 풍부한 치즈와 1층 주방에서 막 구운 향긋한 빵 덩어리들과. 엇, 안쪽 사무실의 그들은 점심시간이 훌쩍 넘어섰는데도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 우리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어요. 그냥 아무 때나 1층 식당으로 내려가서 준비되어 있는 음식을 먹기도 하고, 자기 자리로 샌드위치나 과일을 갖고 와서 먹으며 일하기도 하지요. 일과 휴식과 놀이가 거의 구분되어 있지 않고, 그나마 스스로 알아서 일정을 조율하기 때문에 한 달의 테마를 정하기 위한 기획 회의 때를 제외하고는 공식 일정은 전혀 없는 셈이지요. 아, 무엇보다 해외에 나가 있는 스태프들이 워낙 많아서 얼굴 볼 일도 거의 없고요.”

이제 곧 타일러와 접속해야 할 시간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준비해온 갖가지 질문들을 새삼 머릿속에서 정리해본다. 아니, 에디터 생활을 시작한 이래 십수년간 머리 한구석을 무겁게 채우고 있던 무수한 질문들을 자문해본다. 아날로그란 무엇일까. 가장 느리면서도 가장 트렌디해야 하는 잡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파고 파도 끝이 없는, 기사의 차원을 넘어 전체적인 페이지네이션으로 수렴되는 잡지만의 매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작게는 같은 클래스, 크게는 같은 취향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매스 미디어가 아닌 스페셜 미디어라는 잡지의 존재 의의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리포터나 라이터가 아닌 에디터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걸까. 텍스트를 향한 보르헤스의 염원이 눈이 먼 다음에도 ‘바벨의 도서관’을 구축하는 이상향으로 이어졌다면 우리는 잡지를 통해 어떤 이상과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뒤 페이지부터 본격적인 인터뷰 기사가 펼쳐지기 전에 살짝 귀띔하자면 타일러의 집무실은 ‘판타스틱’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완벽했고, 아메리칸 스타일의 깔끔한 옷매무새는 물론, 웃을 때 한쪽 입술을 치켜 올리는 각도까지 완벽하게 계산한 듯한 타일러의 자태는 나도 모르게 볼을 꽉 꼬집고 싶을 만큼 리얼했다.

연달아 이어진 (집들이) 파티. 런던 곳곳에서 몰려든 패션 피플들과, 뜰 한구석을 점령한 헬싱키 시장을 비롯한 일군의 핀란디시 무리들과, LG 한국지사에서 왔다는 광고주와, 내일 불가리아로 돌아간다는 미모의 통신원과, 스위스 5성급 호텔에서 일하다 <모노클> 인턴으로 일해보기 위해 무작정 달려왔다는 한국 출신 청년이 서로 얽히고설킨 그 매지컬한 현장이라니.
달달한 샴페인 한 잔에 취한 채 ‘이상한 나라’의 문을 닫고 나오는 길. 비비안 웨스트우드 풍의 실루엣으로 무장한 20대 런더너가 다급하게 <모노클>로 가는 길을 내게 묻는다. 바로, 저기. 녹음이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곳. 런던 도르셋街 1번지 미도리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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