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 채널을 돌려보면 ‘생존’이란 단어로 아수라장이다. 이게 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활황에 따른 것인데, 눈을 돌리면 여기저기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느라 그야말로 난리다. 그래도 꽤나 흥미로운 그림이라 이것저것 다 챙겨 보게 된다. 그중에서 유독 내 이목을 집중시키는 프로그램이 있다. KBS2에서 매주 토요일 방영하는 밴드 서바이벌 프로그램 <톱밴드>가 그것. 수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 중에 시청률이 가장 낮을 것 같은,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톱밴드> 보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런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건 한국 대중음악 신에서 유난히 ‘언더그라운드’ 취급을 받는 밴드들이 출연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처음 <톱밴드>를 접했을 때의 신선함은 오랫동안 브라운관에서 보기 힘들었던 한국 록 뮤직의 총아들이 대거 출연하기 때문이다. 시나위의 신대철, 백두산의 김도균, 넥스트의 김세황, 한국에서 가장 기타 빨리 치는 이현석 등. 과거 나의 청춘 시절을 팔딱팔딱 뛰게 만들었던 이들의 얼굴을 TV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톱밴드>는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프로그램의 첫 론칭 때 출연했던, 지독히도 아마추어적인 밴드들 탓에 이걸 지속적으로 봐야 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2회쯤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예고편에서 언뜻 스쳐가는 한 밴드. ‘와, 이 밴드도 나오는 거야?’라는 호기심 때문에 다음 주가 기다려졌다. 바로 게이트 플라워즈라는 하드 록 밴드였다.
이 밴드는 내게도 의미 있는 팀이다. 2009년 10월, 나는 문화콘텐츠진흥원과 EBS <스페이스 공감>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헬로루키’라는 오디션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그때 게이트 플라워즈가 무대에 올랐고, <톱밴드> 1차 예선에서 심사위원 남궁연을 기겁하게 만들었던 ‘FM’을 연주했다. 그들의 무대가 끝났을 때 난 ‘한국에 이런 밴드가 있구나’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함께한 심사위원들 대부분의 반응도 그러했지만, 방송에서 보기에는 ‘비호감’이라는, 마치 <톱밴드> 2차 예선에서 심사위원 전태관(봄여름가을겨울 드러머)이 표현한 것과 같은 이유로 고심했다.
그럼에도 나와 음악 평론가 박은석은 게이트 플라워즈에게 높은 점수를 주며 무조건 1등이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이들은 실제로 그 달의 헬로루키로 선정되었다. 이후 게이트 플라워즈는 2010년 EP <게이트 플라워즈>를 발표했고, 그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과 최우수 록 노래 부문을 수상했다. 잘나가는 듯했다. 한마디로 인디 신의 총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으며, 게이트 플라워즈는 1990년대의 펄 잼(보컬 박근홍의 노래를 직접 듣고 있으면 펄 잼의 에디 베더가 딱 떠오른다)처럼 한국 록계의 거물이 될 것처럼 보였다. 물론 ‘비호감’이라는 단어에 이미 함축되어 있듯 덧없는 일장춘몽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톱밴드>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것이다. 그런데 프로그램 입장에서는 이게 문제가 됐다. <톱밴드>는 밴드 서바이벌이란 슬로건을 걸고 아마추어 밴드들의 진정성과 실력을 겨루는 승부의 장인데 이토록 걸출한 실력을 지닌 밴드가 등장했으니 ‘프로 논란’이 일어났다. 더욱이 공중파 방송이라 주말 밤에 TV를 시청하는 이들의 눈도 의식해야만 했다. 직장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밴드 활동을 하고 순수한 열정으로 연주해 감동을 주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 록 페스티벌 스테이지에 올라도 부족하지 않은 팀이 올라오니 분명 난감했을 것이다.
더욱이 EP 앨범도 발매했고, 홍대의 공연장에서 단독 공연까지 펼쳤던 밴드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록 스피릿 위반이라는 진정성 문제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 남궁연이 “전 이 팀을 심사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우리 심사위원들이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갈 수 있도록 섭외를 해주는 게 낫지 않냐”라는 심사평까지 내놓았으니 그런 논란이 일어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게이트 플라워즈는 아직 전속 계약이 되지 않은 밴드고, 정규 앨범이 아닌 미니 앨범만 발매한 상태라는 판정(이건 높은 점수를 받았던, 기타 없이 건반이 리드하는 밴드 POE도 마찬가지였다) 하에 계속 출연이 결정됐다. 하지만 보컬이자 리더인 박근홍의 가슴에는 인디 신 동료들의 비난과 시청자들의 편견으로 시퍼런 멍이 들었을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아니 나라도 가슴 찢어지는 답답함을 느꼈을 것 같다. 2차 예선이 방송되기 전부터 그는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최종 24팀에 선정됐음을 밝혔고, 주말 밤 브라운관에서 게이트 플라워즈가 몇 주간 더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을 알렸다. 그가 공표한 희망은 절망에서 피어오른 한 줄기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박근홍은 ‘<톱밴드> 출연에 대한 변명’이란 글에서 ‘앨범은 3백여 장 팔렸고, 그 어느 록 페스티벌에 초청받아본 적도 없으며, 세 번에 걸쳐 연 단독 공연에는 평균 20명도 안 되는 관객이 들었다’고 했다. 더욱이 이렇게 TV에라도 출연하지 않으면 밴드 자체의 존속이 어렵다는 고통 어린 호소도 했다. 자신은 출판사에 다니기 때문에 회식이라도 있으면 저녁 공연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고, 기타리스트 염승식은 영어 강사로 생활비를 벌고 있고, 디자인 프리랜서로 일하는 드러머 양종은은 일에 치여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며, 베이시스트 유재인은 학생이지만 앞으로 진로가 막막해 휴학을 했단다. 이런 상황이다. 과연 게이트 플라워즈가 TV에 출연할 자격이 없는, 그러니까 앨범과 공연만으로 최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프로 뮤지션인가?
지금 나는 게이트 플라워즈가 <톱밴드> 2차 예선에서 연주했던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의 영상을 무한 반복해서 보고 듣고 있다. 수많은 김광석 ‘다시 듣기’ 형식의 리메이크 앨범이 나왔지만 이만큼 호소력이 강력한 연주를 이제껏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난 이들이 상금 1억원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고, 추후에 문자 메시지를 통한 시청자 참여가 있다면 서슴지 않고 그깟 전송료 몇 푼을 소비할 생각이다. 한국에서, 특히 공중파 방송에서 밴드 음악은 천대와 멸시를 받는 소수 장르다. 그런 프로그램에 기껏 5곡짜리 미니 앨범 하나 발매한 팀이 살아보겠다고, 밴드를 지속해보겠다고 출연한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문득 최근 MBC 스페셜 <나는 록의 전설이다>란 프로그램이 오버랩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 헤비메탈의 역사 속, 현재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재범, 김종서, 이승철, 김태원, 신대철, 김도균 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살기 위해 솔로로 나선 보컬들, 또 살기 위해 다른 가수의 세션을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연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척이나 슬펐다. 그들에게 산다는 건 음악을 할 수 있는 환경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기타를 가장 잘 치면 뭣하나. 아직도 김도균은 수십 년 된 수동 변속기를 장착한 소형차를 타고 다녔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는 신대철은 신중현의 장남이란 허울 좋은 명예만 가졌을 뿐, 그의 밴드 시나위는 오랫동안 앨범을 발매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록계의 스타다. 그런 이들마저 이런 상황인데 저 어두운 늪 속에 침잠되어 있는 인디 밴드들의 상황은 오죽할까. 1980년대에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부터는 인디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많은 밴드들은 자부심으로 음악을 해왔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는 과거에는 레드 제플린을 꿈꾸었고, 현재는 뮤즈가 되기 위해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서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드린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런 시장이 없다. 단지 철저한 기획 속에 태어난 앵무새들만이 자유를 얻는 기이한 형태의 도박판만이 있을 뿐이다.
<톱밴드>는 어찌 보면 그런 이들을 위한 하나의 탈출구임이 틀림없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을 위한 (방송을 위한 프로그램이란 점에서) 썩은 동아줄이다. 과거의 노장 스타들이 살기 위하여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세월을 등지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처럼, 더 어두운 곳에서 기어오르는 밴드들에겐 이 썩은 동아줄마저 희망이다. 그러니 “저 팀은 너무 프로 아니야?” “순수함이 없어” 등의 얼토당토 않는 잣대로 폄하하지 말길 당부한다. 그럴 손가락이 있다면, 그들의 공연 티켓을 한 장 더 사주고, 그들의 앨범을 한 장 더 구매해주고, 그들의 음원을 하나 더 구입해주길 바란다. 그야말로 음악을 하는 이들이 살아가도록 하는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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