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브먼트의 설계부터 부품 가공, 조립, 피니싱, 케이싱,
스트랩 장착, 최종 검수까지 모든 과정이 한 지붕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브레게 역사는 곧 시계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75년 파리의 일드라시테에서 자신의 첫 공방을 연 아브라함-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는 단순한 시계 제작자를 넘어 시계 기술의 혁신가이자 예술가였다. 그가 개발한 셀프와인딩 워치(Perptuelle), 미닛 리피터, 브레게 핸즈와 브레게 숫자, 기요셰 다이얼, 파라슈트 충격 흡수 장치, 그리고 무엇보다 투르비용은 시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발명품이다. 그의 시계는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알렉산드르 푸시킨 등 유럽의 왕족과 문인, 정치가에게 사랑받은 역사의 유산이기도 하다. 이 혁신과 예술성은 오늘날 브레게 매뉴팩처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로 남아 있다. 매뉴팩처가 위치한 발레 드 주 로리앙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원지대에 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이곳은 겨울이면 눈이 가득 쌓이고, 여름에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이런 자연환경은 시계 장인에게 집중과 영감을 준다. 매뉴팩처에 도착한 순간 한 가지 놀랐던 점은 건물이 상당히 현대적이라는 것. 브랜드가 지닌 이미지와 역사만 두고 그린 모습과는 달랐다. 매뉴팩처의 건물은 전통적인 스위스 샬레 스타일과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루었고, 내부 역시 첨단 설비와 전통적인 작업 공간이 공존한다. 전통과 현대의 유기적인 소통, 이곳에서 브레게의 모든 시계가 탄생한다. 이곳은 수직 통합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무브먼트의 설계부터 부품 가공, 조립, 피니싱, 케이싱, 스트랩 장착, 최종 검수까지 모든 과정이 한 지붕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실리콘 밸런스 스프링 등 일부 특수 부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품을 매뉴팩처에서 자체 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공정이 한곳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브레게의 품질과 전통 그리고 혁신이 어떻게 완벽하게 관리되는지를 증명한다.
일정 중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머시닝 워크숍이다. 이곳에서는 CNC 머신과 전통적인 수공구를 활용해 무브먼트의 베이스 플레이트, 기어, 스프링 등 수백 개의 부품을 완성한다. 미크론 단위의 정밀도를 요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자동화 설비와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야 가능한 작업이다. 각 부품은 기능적 완성도뿐 아니라 미학적 기준까지 충족해야 하기에, 이곳에서는 부품 가공뿐만 아니라 각 부품의 표면 처리와 검사도 철저하게 이루어진다.
머시닝 워크숍을 지나 도착한 곳은 기요셰 아틀리에다. 메종의 정체성 중 하나인 기요셰 다이얼이 이곳에서 탄생한다. 기요셰는 과거 주로 가구 장식에 쓰인 장식 기법이다. 가구처럼 큼직한 사물에 사용한 기법을 1786년, 작은 시계에 최초로 적용한 인물이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다. 브레게는 시계 브랜드에서 기요셰 머신인 로즈 엔징 터닝 머신을 가장 많이 보유한 메종이다. 이 정도면 브레게에서 기요셰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오늘날 시계 장식에서 기요셰가 발전하는 데 브레게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이를 이용한 전통적인 핸드 기요셰 작업은 숙련된 장인만이 할 수 있는 기술이자 예술이다.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장인들이 플래티넘, 골드, 브라스, 섬세한 소재인 마더오브펄 네 가지 소재에 다양한 패턴을 정교하게 새긴다. 기요셰 작업은 단순히 심미성을 위해 고안된 패턴이 아니다. 빛의 반사를 조절해 시인성을 높이고, 작은 다이얼 안에 스몰 세컨즈, 날짜 인디케이터 등 메인 다이얼과 각각의 기능을 나눠 보여주는 역할까지 해낸다. 브레게 시계에서 기요세가 꼭 필요한 이유다. 기요셰 아틀리에 장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집중하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손길로 패턴을 새긴다. 이 작업이 얼마나 많은 훈련이 필요한지는 직접 체험해보고서야 알았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플레이트가 고정된 판을 이동시키고, 오른손으로는 고정된 끌을 앞뒤로 강약을 조절하며 세심한 패턴을 하나하나 새겨 넣는 과정에서 아름다움까지 챙기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평범했던 무브먼트가 빛을 얻는 피니싱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앙글라주와 인그레이빙은 시계의 완성도와 고급 시계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장인들은 루페를 쓰고, 미세한 파일과 버너를 이용해 무브먼트의 브리지, 플레이트, 휠 등에 아름다운 장식을 새긴다. 특히, 투르비용 브리지 같은 부품에는 수 시간, 때로는 수일에 걸쳐 수작업 인그레이빙이 이루어진다. 그중에서 앙글라주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금속 부품의 모서리를 45도로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이다. 이는 총 4단계를 거쳐 완성되는데, 나무 막대기 끝에 작은 알갱이가 배합된 파일을 문지르며 광을 낸다. 입자가 굵은 것부터 고운 것까지 차례대로 섬세하게 작업하고 마지막으로 연마제로 마무리하면 미러 폴리싱을 넘어 검은 광이 나는 블랙 미러 폴리싱을 한 앙글라주가 완성된다. 마지막의 연마제는 소재에 따라 총 다섯 가지 컬러를 사용해 소재가 더욱 돋보이도록 한다. 이곳에 있는 장인들은 모두 인하우스에서 양성한다. 스위스 시계 학교 등 다른 교육기관이 아닌 오직 브레게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는 얘기. 18개월 동안 훈련을 거쳐야 이곳에 합류할 기회가 주어진다.
또 다른 공간은 브레게의 장기이자 컴플리케이션의 정점인 투르비용과 미닛 리피터가 완성되는 공간이다. 투르비용은 1793년부터 1795년 사이,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처음으로 구상하고 개발에 착수한 혁신적인 메커니즘이다. 당시는 손목시계보다 회중시계의 사용이 보편적이었다. 회중시계는 대부분 수직 상태로 고정되어 있어 중력이 밸런스 휠과 스프링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시계의 정확도를 저해하는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했다. 브레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케이프먼트, 밸런스 휠, 밸런스 스프링을 하나의 케이지에 넣고, 중력을 상쇄시키기 위해 이 케이지가 1분에 한 번씩 회전하도록 설계했다. 이를 통해 중력의 영향을 평균화하여 시계의 정확도를 향상시키고자 했다. 브레게는 1793년 프랑스 혁명의 혼란을 피해 파리를 떠나 스위스로 향했다. 그리고 1795년 파리로 복귀한 후 6년이 지난 1801년 6월 26일에야 비로소 프랑스 내무부로부터 투르비용 레귤레이터에 대한 10년간의 특허권을 받는다.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805년 투르비용을 상용화했다. 브레게가 투르비용을 개발하고 안정적으로 구현하기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19세기에는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고, 한 점의 투르비용 시계를 완성하는 데 5~10년이 걸릴 정도로 복잡했다. 1796년부터 1829년까지 브레게와 그의 팀이 완성한 투르비용 시계는 단 40점에 불과할 만큼, 희소성과 예술적 가치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창립자의 유산을 이어받은 브레게 매뉴팩처에서는 투르비용의 모든 부품을 직접 설계하고, 전통적인 수작업과 현대적 기술을 접목해 제작한다. 오늘날에도 브레게의 투르비용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CNC 머신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여전히 장인의 손길과 전통적 피니싱 기법을 필수적으로 적용한다. 당시 현장에서는 아직 조립되기 전인 투르비용 무브먼트와 완성된 시계를 볼 수 있었다. 무브먼트는 581DPE였다. 나란히 놓여 있던 시계, 마린 투르비용 에콰시옹 마샹 5887에 탑재될 이 투르비용 무브먼트는 퍼페추얼 캘린더와 균시차, 투르비용을 더한 그랑 컴플리케이션 기능을 갖췄다. 클래식 투르비용 엑스트라-플랫 오토매틱 5377에 사용한 두께 3mm의 인하우스 셀프와인딩 무브먼트 581DR에서 파생한 무브먼트로, 1분에 1회전하는 투르비용에는 큼직한 티타늄 케이지와 브랜드 특유의 수평으로 길게 뻗은 브리지가 자리한다. 투르비용에는 아라비아숫자 8 형태의 독특한 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1년간 지구의 공전 궤도를 나타내며, 반투명 디스크를 통해 월을 나타내는 상당히 복잡한 기능을 갖췄다.
“브레게와 그의 팀이 완성한 투르비용 시계는 단 40점에 불과할 만큼,
희소성과 예술적 가치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화려한 투르비용 시계 옆에는 정갈한 디자인의 클래식 미닛 리피터 7637과 이에 탑재된 무브먼트 567.2를 볼 수 있었다. 미닛 리피터는 전기가 없던 17세기 어두운 밤에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시각이 아닌 청각을 활용할 방법을 고안하다 탄생했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는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종 유형의 미닛 리피터 타종법 대신, 1783년 공 스프링(Gong-spring) 블레이드를 타격하는 최초의 공 스프링 형태의 미닛 리피터 시계를 제작했다. 오늘날 미닛 리피터의 기준이 된 공 스프링 타종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브랜드는 미닛 리피터를 제작하기 위해 모든 부품을 자체적으로 설계하고 만든다. 미닛 리피터 시계에 들어가는 부품 수만 해도 300개가 훌쩍 넘으며, 공 스프링, 해머, 무브먼트 등 핵심 부품을 이곳에서 정밀하게 가공한다. 이때, 소리의 품질을 극대화하기 위해 케이스와 공 스프링, 무브먼트의 소재는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선정한다. 예를 들어, 케이스와 공은 골드, 무브먼트의 일부는 티타늄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소리의 울림과 전달을 최적화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 이후 워치메이커는 무브먼트를 조립하고, 음향 전문가와 함께 음향 테스트를 하며 조율해 최적의 소리를 찾는다. 미닛 리피터의 핵심은 바로 소리이기 때문에, 완성된 시계는 반향이 없는 특수 공간에서 공의 공명 주파수를 측정하고, 브레게만의 고유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밀한 조율이 이루어진다. 이로써 탄생한 클래식 미닛 리피터 7637의 소리를 워치메이커가 직접 들려줬다. 고요한 공방 안에 시와 15분 단위, 분을 나타내는 타종 소리가 맑고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계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닛 리피터뿐만 아니라 시계의 완성도를 위해 공들인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시계 전면 그랑 푀 에나멜로 완성한 블랙 다이얼이 고상해 보였다.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은 이산화규소와 산화물 분말의 혼합물인 컬러 에나멜 파우더를 물에 녹이고, 이를 세밀한 붓으로 플레이트 위에 바르고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한 후, 800°C 이상 고온의 가마에서 수차례 소성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 상당히 손이 많이 가는 다이얼이다. 매번 고유한 컬러를 내는 것이 쉽지 않고, 플레이트에 따라 발색도 다르게 되기에 수많은 경험을 통해 정확한 데이터를 축적해야 상용화할 수 있는 기법이다. 이로써 완성된 다이얼은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깊이 있는 광택과 특유의 기품이 겹겹이 드러난다. 또한 글라스백을 통해 보이는 무브먼트는 앞서 만난 인그레이빙 장인들이 시계 스토리에 맞는 예술적인 패턴을 한땀 한땀 새겨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까지 완성도를 높인다. 브레게 미닛 리피터 시계가 유일무이한 소리와 가치를 지닌 하이엔드 워치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브레게 매뉴팩처에서의 하루는 시계 애호가로서 그리고 한 명의 관찰자로서 메종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2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진 전통과 혁신 그리고 장인정신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구현되고 있음을 몸소 경험했으니까. 브레게 시계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아브라함-루이 브레게에서 시작된 열정과 예술, 기술이 집약된 결과물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이곳을 직접 봤다면 250년, 그 이상의 미래까지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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