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긴 시간 해변도로를 달리는 시승 코스는그란투리스모 성향과 스파이더 모델의 특징을제대로 즐기라는 페라리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주행 컷 촬영을 위해 대서양과 맞닿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운전석에 앉아 실내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에 짜디짠 바닷바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맞았는지 페인트 도장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녹이 슨 차 한 대가 12칠린드리 스파이더 옆으로 스윽 다가왔다. 차에 탄 한 사내가 창문을 내리면서 나에게도 창문을 내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고는 지금 탄 차가 어떤 차냐고 물었다. “이 차는 페라리 12칠린드리 스파이더야. 최근에 나온 페라리의 신상이지.” “스파이더? 그럼 뚜껑도 열리는 거야?” “물론이지. 보여줄까?” “응!” 센터패널에 있는 버튼을 눌러 지붕을 열었다. 그때 그 사내의 눈빛은 아주 경이로운 무언가를 접했을 때처럼 반짝였다.
“미안한데 배기음도 한 번 들려줄 수 있어?” 사실 공회전 상태에서 가속페달을 밟아 엔진 회전수를 올리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차에 무리가 갈 수 있기에. 그럼에도 그의 요청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같이 좋아하는 모습을 봤다면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을 거다. 가속페달을 밟아 최대 회전수인 9500rpm으로 올리고, 두 번 정도 반복했다. “우루루 팡팡팡, 우루루 팡팡팡.” 그는 소리를 듣고 포르투갈어로 말했는데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제스처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포르투갈어 ‘오브리가도(Obrigado)’를 연신 외치며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페라리를 시승하면 종종 겪는 일이다.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몇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 신사도 페라리를 만나면 호기심 많은 꼬마로 변한다. 나 역시 그랬다. 자동차에 관심이 전혀 없던 때에도, 다른 자동차 브랜드는 몰라도 페라리는 알았다. 페라리는 남자의 로망이자 성공의 좌표와도 같았으니까. 수많은 페라리 모델 중에서도 12기통 엔진을 품은 모델은 역사와 전통, 정체성, 성능을 상징한다. 12기통 엔진은 페라리의 첫 번째 엔진으로 수많은 모터스포츠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데 기여했고, 양산차에도 12기통 엔진을 넣으며 엔진의 ‘끝판왕’ 자리를 지금까지 양보하지 않는다. 친환경과 엔진 다운사이징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여느 브랜드들은 12기통 엔진을 포기하는 분위기지만, 페라리는 온갖 기술을 총집약해 12기통의 명맥을 여전히 이어간다.
페라리 12기통 모델의 최신판 이름은 12칠린드리다. 이탈리아어로 12기통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12기통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이 대단하면 이름까지 12기통이라고 지었을까? 사실 이번 해외 시승은 그 대단한 자부심을 확인하는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작인 812 슈퍼패스트는 얼마나 빠른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는데, 이름을 도전 과제로 내세운 게 아닌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이번 시승 모델은 스파이더다. 배기 파이프에서 나오는 12기통 날것 그대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페라리의 의도
10대가 넘는 12칠린드리 스파이더가 호텔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페라리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색 계열인 로쏘 코르사가 아닌 토스카나 그린 컬러라 약간의 아쉬움을 표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푸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컬러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페라리 12기통에 스파이더 모델인데. 이전 812 라인업의 디자인과는 궤를 달리한다. 812는 조각적인 형태와 디테일이 특징이었다면, 12칠린드리는 일체감과 통일감 있는 디자인에 집중했다. 게다가 과거 클래식한 스타일과 현대적인 기술 요소를 결합한 게 눈에 띈다.
12칠린드리의 디자인 뿌리는 1968년 출시된 페라리 365GTB, 즉 원조 페라리 데이토나의 디자인에서 영감받았다. 특히 앞부분에 검은 스트립과 긴 보닛, 그 위에 공기흡입구를 배치해 데이토나의 부드럽고 간결한 얼굴이 그대로 이어진다. 여기에 플러시 도어 핸들을 달고 플랩차 뒷부분의 작은 날개인 플랩을 활용해 에어로 다이내믹과 성능을 살뜰히 챙겼다.
옆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긴 엔진을 품어 보닛은 길고 깊으며 그에 따라 운전석에 앉았을 때 시트 등받이가 바퀴에 닿은 기분이다. 앞 끝점에서 시작한 선은 펜더를 가로질러 도어를 거친 뒤 펜더 위로 돌아 나가는데, 앞부분은 날렵하게, 뒷부분은 풍만한 볼륨감을 강조한다.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달리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 전통적인 앞모습과는 달리 뒷모습은 미래지향적이다. 테일램프 사이에 오목한 후면부 전체를 가로지르는 얇고 긴 바(Bar)를 설치했다. 최근 자동차 뒷모습 트렌드인 로&와이드(Low & Wide)를 그대로 따랐는데, 트렁크리드와 리어 스포일러 사이 안쪽 깊숙이 집어넣어 입체감을 살렸다.
‘치지직치지직.’ 외관을 구석구석 살피던 중 컵홀더 사이에 껴 있던 무전기가 울렸다. 곧 출발한다는 신호다. 시승 코스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숙소가 있는 카스카이스를 출발해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호카곶을 거쳐 해변도로를 쭉 달리다 궁전으로 유명한 마프라를 찍고 다시 카스카이스로 돌아오는 코스다. 거리로만 따지면 150km, 고속도로 비중이 적어 순수 시승 시간만 3시간 남짓이다. 페라리의 신차 시승 행사에 여러 번 참여했지만 이번만큼 긴 시승 시간을 확보한 건 꽤 이례적이다. 이렇게 긴 시간 해변도로를 달리는 시승 코스는 그란투리스모 성향과 스파이더 모델의 특징을 제대로 즐기라는 페라리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언제나 그랬다. 페라리 운전대를 잡으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여전히 운전대에 있는 시동 터치 패널이 낯설기도 하지만, 그 앞에 위치한 주행 모드 변경 레버는 페라리 세계에 접속했음을 알린다. 12칠린드리 스파이더의 시작도 다를 게 없다. 시동을 켜는 순간 울리는 12기통의 날카롭고 분주한 점화음이 들리자 페라리를 탔다는 게 실감 난다.
실내는 로마와 푸로산게에서 시작된 디자인 언어를 그대로 따른다. 듀얼 콕핏 구조로, 운전자와 동승자를 위한 공간을 명확히 구분해 운전자로 하여금 운전에 집중하게 한다. 레이싱에서 태어나 여전히 레이싱에 전념하는 페라리의 신념이 느껴진다고 할까? 푸로산게처럼 브랜드 라인업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만큼 최고급 소재를 둘렀지만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손도 가지 않는다. 손은 운전대에, 눈은 전방을 응시하며 운전의 쾌락을 좇을 뿐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달려야만 페라리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의외로 12칠린드리 스파이더의 매력은 천천히 달릴 때 드러난다. 페라리의 최상위 엔진이 들어간 모델에는 모진 대우가 아닐 수 없지만, 사실이 그렇다. 카스카이스 시내로 빠져나가 해변도로까지 제한 속도는 시속 50km다. 듀얼클러치 8단 변속기를 오토 모드로 두고 운전대 왼쪽 아래 범피로드 모드를 선택해 마그네틱 댐퍼를 부드럽게 바꾸면 도로와 바퀴 사이에 얇은 가죽 한 장을 덧댄 듯 편안한 그란투리스모처럼 달린다. 서킷에서만 그 능력이 출중한 게 아니라 일반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로서도 충실하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가 컸다.
시내를 빠져나와 어느덧 해변도로에 도착했다. 바다가 보인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지붕을 열어야 한다. 시속 45km 아래로 속도를 낮추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지붕이 열리는 시간은 14초. 다른 모델에 비해서 그다지 빠른 시간은 아니지만, 기다리며 볼 수 있는 우아한 자태는 여느 컨버터블 중 최고다. 전통적인 쿠페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했기에 12칠린드리 스파이더의 하드톱을 열더라도 크게 개방감을 느끼긴 어렵다. 12칠린드리 스파이더가 선사하는 ‘오픈 에어링’은 공간보다 소리에 대한 봉인 해제다. 지붕 뒤 기둥에 플라스틱 로브가 있어 지붕이 열릴 때 뒤쪽에서 발생하는 와류를 정리해 소음을 줄이고 후방 데크에 공기가 충돌하는 것을 방지한다. 실제로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웠지만 머릿결이 날리거나 머리 뒤쪽에서 소음이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배기음을 진하게 만끽할 수 있다.
아, 12기통이여
파워트레인 구성은 쿠페형과 같다. 최고출력 830마력, 최대토크 69.1kg·m를 내는 V12 6.5리터 자연흡기 엔진에 8단 듀얼클러치를 맞물렸다. 이전 812 GTS보다 최고출력은 30마력 늘고 최대토크는 4.2kg·m 줄었지만, 몸으로 체감하긴 쉽지 않다. 스파이더는 쿠페보다 60kg이 더 나가는데도 쿠페 못지않게 가뿐하고 짜릿한 가속 성능을 발휘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 데 2.95초로, 쿠페보다 0.05초 늘어났을 뿐이다. 최고속도는 동일하게 시속 340km다.
시승 전날 페라리 본사 직원들과 함께한 저녁 식사에서 파워트레인 담당 알베르토에게 812 GTS와 12칠린드리 스파이더의 가장 큰 차이점을 물어봤다. 그는 7단 듀얼클러치에서 8단으로 바뀐 부분을 꼽았다. “성능 향상이나 효율성 증가, 기어 변속 속도 증가 등 다양한 기술적 발전을 이뤘기 때문에 8단 듀얼클러치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게다가 점점 그란투리스모를 추구하는 V12 쿠페와 스파이더 콘셉트에도 7단보단 8단이 더 어울리고요.” 빠름과 편안함, 도저히 양립할 것 같지 않은 두 영역은 그란투리스모가 추구해야 할 교집합이다. 8단 듀얼클러치는 7단보다 저단 기어비가 5% 더 짧아 빠르게 속도를 올리고, 고속에서는 더 긴 기어비를 제공해 변속 충격을 최소화한다. 이는 곧 괜찮은 연료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페라리를 두고 연료 효율성을 말하는 게 웃음이 나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12기통의 위대한 유산을 조금이나마 더 먼 후손에게 전파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의 성능은 말이 필요 없다. 전기차가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해 이동하는 느낌이라면, 12칠린드리 스파이더는 시작과 끝 사이에 12기통 자연흡기 엔진이 무수한 점을 찍어 연결하는 기분이다. 그만큼 고속에서의 생동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기통당 542cc 배기량의 커다란 피스톤이 저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다. 힘찬 12기통 엔진이 해방되고 나면 뒤 타이어는 변속할 때마다 엔진의 모든 힘을 다스리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면서도 운전자에게는 부담 주지 않고 안정적으로 달려 나간다. 게다가 12칠린드리에는 뒷바퀴를 조향할 수 있는 리어 스티어링 시스템도 들어간다. 고속으로 코너를 돌아 나갈 때도 뒷바퀴를 앞바퀴와 동일한 방향으로 만들어 주행 안정성을 높이고 승차감을 챙긴다.
누구든 편안함과 안정감에 취해 가속페달에 힘을 주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숫자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페라리의 다양한 기술이 운전자를 도와주니까. 설령 실수한다고 해도 말이다. 유압식이 아닌 전자식으로 브레이크를 작동시켜 제동거리는 줄고 반복해서 제동할 때도 더욱 빠르고 정확해졌다. 개인적으로 주행 보조 시스템 중 가장 선호하는 사이드 슬립 컨트롤은 8.0으로 개선됐다(812 슈퍼패스트에는 5.0이 들어갔다). 사이드 슬립 컨트롤 8.0은 페라리의 독자 시스템으로 예측 정확도와 학습 속도를 더욱 개선하고, 접지력이 매우 낮은 노면에서 제어력을 향상시키는 마법과도 같은 기능이다. 서킷은 물론, 빠르게 달리는 고속도로 주행에서도 효과가 아주 뛰어나다.
“12기통 엔진을 얹은 페라리 같은 슈퍼카는흥분을 감출 수 없는 스릴로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판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지붕을 닫고 오디오를 켰다. 개인적으로 페라리를 타면서 음악이나 라디오를 잘 듣지 않는다. 그야말로 ‘굳이?’이다. 누군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표현하는 12기통 엔진 소리를 들으면서 달리는 건 자동차에서 할 수 있는 최고 유희인데, 굳이 음악을 들을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1600W 수준의 오디오 성능은 페라리 말고 그 어떤 브랜드에서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내 사운드가 완벽한 밸런스를 유지하도록 흡기관도 손봤다고 한다. 결과는 어땠냐고? 이전보다 사운드가 더욱 깨끗하고 풍성했다. 다만 12기통 엔진을 품은 차를 꿈도 꿀 수 없고 자동차 칼럼니스트라는 직업 특성상 어쩌다 한 번씩 타는 나에겐 12기통 엔진 소리가 더욱 소중하다.
12기통 엔진을 얹은 페라리 같은 슈퍼카는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스릴로 우리의 가슴을 후벼 판다. 하지만 심장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시간을 일반도로에서 만끽하기는 쉽지 않다. 만일 그랬다간 몇 시간도 안 돼 벌점을 받아 운전면허가 취소되거나 자동차를 저 멀리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이번 12칠린드리 스파이더 시승은, 페라리는 무조건 빨라야 하고 스릴이 넘쳐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거듭 이야기했지만 12칠린드리 스파이더는 그란투리스모의 역량이 너무 뛰어난 차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고, 어느 역할이든 능숙하게 해치운다. 평소엔 편안하고 조용하게 운전할 수 있어 풍족한 여유를 선사한다. 엔진 소리와 타이어 소음이 잦아들게 천천히 달려도 매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지붕을 열면 12기통 엔진이 내뿜는 장엄한 행진곡이, 지붕을 닫으면 15개의 스피커가 내는 1600W 출력의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12기통 엔진을 품은 많은 자동차 중에 12칠린드리 스파이더만큼 여유와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자동차는 아직까지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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