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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에서도 ‘에루샤’가 통할까?

에르메스, 루이 비통, 샤넬의 시계는 살 만할까? 3명의 필자가 논하는 패션 하우스의 워치메이킹에 대한 편견 없고 다소 진지한 이야기.

UpdatedOn April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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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션 하우스가 워치메이킹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Words 김장군(<아레나> 패션 디렉터)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된 지인들이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이 시계 좋아?’ ‘이 브랜드 좋아?’ 하는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반문한다. ‘좋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어? 인지도? 완성도? 디자인? 무브먼트?’ 좋은 시계에 대한 기준은 단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시계를 알면 알수록, 공부하면 할수록 그 명제는 더 분명해진다. ‘이 시계 좋아?’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 브랜드가 있다면 아마 에르메스, 루이 비통, 샤넬(이하 에루샤라 하겠다)일 거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들어봤을 이름. 이름만 들어도 로고가 떠오르고, 대표적인 패션 아이템이 머릿속에 후루룩 지나는 명성. 에루샤의 시계를 두고 ‘이 브랜드 좋아?’라고 질문하는 이는 내 주변에선 아마 없을 거다. 그렇다면 브랜드가 좋다는 명제는 이미 충족된 셈. 반면 한평생 시계만 제작했는데 ‘이 브랜드 좋아?’라는 질문을 받는 브랜드도 있다. 독일 툴 워치의 대표 브랜드 진(Sinn), 아기자기한 감성을 지닌 노모스 글라슈테(NOMOS Glashütte)가 떠오른다. 과거 바젤월드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시계에 정통한 브랜드지만, 국내에는 낮은 인지도로 의심을 받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에루샤와 진, 노모스 글라슈테 중에서 가장 좋은 시계와 브랜드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개인, 각자의 가치관과 기준에 따라 다를 거다. 질문을 조금 바꿔서 ‘이 시계 살 만해?’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달라진다. 사는 행위는 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이니 돌려 이야기하면, 그만한 비용을 내고 살 가치가 있느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 위해선 동일한 금액대의 다른 브랜드의 시계와 대조해보면 된다. 예를 들어 A 브랜드의 1000만원대 시계가 살 만한지 궁금하면, 다른 브랜드의 1000만원대 시계를 비교하면 된다. 그렇다면 에루샤 시계는 어떤 기준을 두고 비교하면 될까? 세 브랜드의 시계가 과연 살 만한지 그들의 최근 행보를 돌아보며 정리해봤다.

에르메스는 1978년 스위스 비엘(Biel)에 자회사 ‘라 몽트르 에르메스(La Montre Hermès)’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시계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제는 단순히 시계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2006년에는 스위스 플러리에(Fleurier)에 위치한 보셰 매뉴팩처(Vaucher Manufacture Fleurier)의 지분 25%를 인수하며 자체 무브먼트 개발에 진정성을 보였다. 보셰는 리차드 밀, 파르미지아니 플러리에 등 흔히 이야기하는 고급 독립 브랜드에 무브먼트를 공급하는 제조사로, 뛰어난 마감과 정밀성으로 정평이 난 곳이다. 에르메스가 이들과 함께 자체 개발한 대표적인 무브먼트는 H1837과 H1950. H1837은 50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는 셀프와인딩 무브먼트로 브랜드의 기계식 시계에 꾸준히 사용되며 정밀성을 검증받았다. H1950은 두께 2.6mm의 울트라 신 무브먼트로 슬림한 케이스 디자인이 중요한 ‘슬림 데르메스’ 컬렉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퍼페추얼 캘린더,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 등 하이 컴플리케이션이라 말하는 무브먼트는 다양한 변주로 일찍이 졸업했다. 디자인을 보면 복잡한 다이얼 구성이나, 기능에도 불구하고 에르메스의 시계는 어딘가 일정한 기조가 느껴진다. 이는 브랜드 특유의 위트 있는 뉘앙스 덕이다. 말안장이나 등자 등 승마에서 힌트를 얻은 세심한 요소, 에르메스 스카프에서 볼 수 있는 재기 발랄한 일러스트는 케이스 지름 40mm 남짓한, 다소 진지한 시계 안에 한 번쯤 피식 웃게 하는 ‘킥’을 더한다. 한 가지 더 짚는다면 시계 위 일러스트는 단순히 스카프의 이미지를 프린트하거나 카피하는 수준이 아니다. 시계 위 예술이라 칭하는 메티에 다르로 직접 그리고 조각하며, 어쩌면 스카프보다 더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개인적으로 에르메스 시계의 매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모델은 2019년 선보인 아쏘 레흐 드라룬이라고 생각한다. 문페이즈 시계를 이렇게 독창적으로 표현한 시계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 떠오르는 시계가 없다. 기술적인 성숙도는 물론, 이를 배열한 설계 방식, 달의 표면과 달이 떠 있는 우주를 배경 삼은 다이얼의 미학은 2019년 제19회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에서 캘린더 및 아스트로노미 시계 부문(Calendar and Astronomy Watch Prize)을 수상할 만하다. 에르메스 시계를 보면 진지한 전통 시계 브랜드는 흉내 낼 수 없는,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패션 하우스만의 한 끗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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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비통 워치메이커의 작업
모습.

  • 루이 비통 워치메이커의 작업
    모습.
  • 조립 중인 에르메스 아쏘 르 땅
    보야쥬.
  • 새롭게 태어난 루이 비통
    땅부르 워치.
  • 샤넬 J12 블랙 세라믹 모델.

루이 비통 워치메이킹은 세 브랜드 중에서는 후발 주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기세만큼은 가장 매섭다. 루이 비통은 시계 브랜드와 본격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2011년 ‘라 파브리크 뒤 텅(La Fabrique du Temps)’ 시계 공방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칼을 갈았다. 이 공방은 세계적인 독립 시계 제작자 미셸 나바스와 엔리코 바르바시니가 설립한 후로 수십 년간 컴플리케이션 시계 개발에 몰두해온 장인들이 모여 있다. 그 덕분에 루이 비통은 컴플리케이션인 투르비용과 미닛 리피터 무브먼트를 자체 제작하는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실이 드러난 건 2023년 땅부르 워치가 리뉴얼되면서부터. 마치 루이 비통 워치 인생 2막이 시작된 느낌이랄까. 이전 땅부르는 케이스 두께가 아쉬울 정도로 두껍고, ETA 무브먼트를 수정 사용해 뭇매를 맞았다. 하지만 전신 성형을 마친 땅부르 워치는 땅부르라는 북 형태의 케이스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케이스 두께는 8.3mm로, 이전보다 5mm 정도 얇아졌고, 독립 시계 브랜드 스피크-마린 덕에 이름을 알린 스위스 뇌샤텔의 무브먼트 스페셜리스트 르 세르클 데 오롤로저(Le Cercle des Horlogers)와 라 파브리크 뒤 텅이 협력해 완성한 셀프 와인딩 무브먼트 LFT023을 탑재해 무브먼트 이슈를 종식시켰다. 게다가 케이스와 이어지는 일체형 브레이슬릿 디자인은 당시 트렌드인 올라운더 스포츠 워치를 루이 비통만의 언어로 영민하게 풀었다는 평이다. 스포츠 워치 장르를 땅부르가 계승했다면, 드레스 워치는 에스칼이 이어받았다. 역시 인하우스 셀프와인딩 무브먼트 LFT023을 탑재하고, 브랜드의 유산인 트렁크 모티프를 디자인에 녹여내는 등 고심한 흔적이 돋보인다. 입체적인 큐브 인덱스를 지닌 땅부르 타이코 스핀 타임의 무브먼트 LFT ST13.01, 드래깅 인디케이션 방법을 적용한 몽트르 아 기셰 방식의 무브먼트 LFT MA01.01 등, 최근 인하우스 무브먼트와 함께 새로운 모델을 적극적으로 내밀며 무브먼트 독립성 강화를 비롯해 루이 비통 워치만의 탄탄한 세계관을 차곡차곡 구축하는 중이다.

세 브랜드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 건 샤넬이다. 이들이 시계 시장에 진출한 것은 1987년이지만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2000년, J12를 출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케이스부터 브레이슬릿 링크 하나하나 하이테크 세라믹으로 만든 J12는 현대적인 다이버 워치 디자인과 함께 샤넬 워치만의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샤넬은 단순히 J12가 세라믹 시계로 기억되길 원하지 않았다. 2016년, 스위스 케니시(Kenissi) 매뉴팩처에 지분을 투자하면서 본격적으로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개발했다. 케니시는 튜더와 협력하고 COSC 인증을 받은 정밀한 크로노미터 무브먼트를 제작하는 곳으로, 이 파트너십을 통해 샤넬 시계의 성능과 내구성은 한층 성장했다. 이곳에서 탄생한 셀프와인딩 무브먼트 칼리버 12.1은 정확도를 위한 COSC 인증, 70시간 파워 리저브, 개성이 돋보이는 로터 디자인으로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 덕에 J12의 동력이 되는 워크호스로 활약하고 있다. 샤넬이 워치메이킹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요소는 하이 컴플리케이션의 도입이다. 단순한 스리 핸즈 셀프와인딩 시계를 제작하는 수준을 넘어, 점핑 아워, 레트로그레이드, 스켈레톤 무브먼트 등 정교한 메커니즘을 탑재한 모델을 선보이며 호평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F.P. 주른(F.P. Journe), 2011년에 지분을 20% 인수한 로맹 고티에(Romain Gauthier) 같은 독립 시계 제작자와 협업하면서 무브먼트 설계와 기술적 정밀성에 힘을 쏟고 있다. 이 외에도 패션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아이코닉한 요소를 담은 재치 있는 시계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다. 핀봉, 바늘, 토로소, 샤넬 여사의 상징인 넘버 5, 사자자리 등의 요소는 시계에서도 어김없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샤넬 여사를 캐릭터로 담은 마드모아젤 J12 라인은 애호가의 수집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세라믹 소재를 마스터해서인지, 근래에는 가공이 까다로운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다양한 시도를 한 J12 모델을 여럿 볼 수 있다. 소재에 대한 접근 역시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이 상당히 신중하고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에루샤의 시계는 살 만한가?’라고 질문한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개인의 판단에 맡기겠다. 뻔한 대답이라고 해도 달리 도리가 없다. 질문을 던진 사람들의 지갑 사정을 일일이 알 수 없으니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없다. 에루샤의 워치메이킹은 기존 워치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는 틀을 벗어난 디자인, 막대한 자본으로 무브먼트를 잘 만드는 회사를 인수해버리는 호탕함, SNS 팔로워 수만 봐도 알 수 있는 절대적인 브랜드 인지도 등은 나무랄 데 없는 칭찬 요소다. 반면 전통 워치 브랜드에 비하면 유년기에 접어든 브랜드 역사와 성장 스토리, 그들과 대등하게 견주는 가격대는 시계를 구입하는 데 고민하게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100년, 200년 역사가 뭐가 중요해? 나는 20년만 돼도 충분해’라고 생각하는 입문자라면, 전통적인 시계 디자인에 흥미를 잃은 애호가라면, 색다른 워치메이킹을 찾는 수집가라면 살 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니 디자인, 내구성, 인지도, 역사, 가격 등 좋은 시계를 정의하는 요소를 각자의 기준에 맞춰 하나씩 비교해보면 이들 시계를 구입해야 할지 답이 명쾌한 답이 나올 거다.


2 에루샤가 발견한 워치메이킹의 본질

Words 유현선(<크로노스 코리아> 편집장)


“우리 시계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소비자의 자유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설득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고객과 컬렉터를 지니고 있다.” ‘패션 하우스 워치메이킹의 선입견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에르메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립 델로탈(Philippe Delhotal)의 답이다.

에르메스는 시계 제작에 있어 전통적인 브랜드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보이고 있다. 장인정신과 유머러스한 디자인 감각을 결합한 에르메스 시계는 이제 독자적인 영역으로 인정받는다. ‘시간을 멈추고 싶은 순간’을 구현한 아쏘 타임 서스펜디드는 2011년 시계 업계의 오스카상이라고 일컫는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에서 최고의 남성 시계 부문을 석권했다. 아쏘 르 땅 보야쥬와 아쏘 레흐 드 라 룬은 각각 월드타임과 문페이즈 기능을 에르메스식으로 훌륭하게 해석한 사례로 꼽힌다. 에르메스가 워치메이킹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는 투자 규모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에르메스는 2006년 2500만 스위스프랑(약 262억원)을 들여 파르미지아니 플러리에의 자매 회사인 무브먼트 제조업체 보셰 매뉴팩처의 지분 25%를 인수했다. 보셰는 파르미지아니를 위한 고급 무브먼트를 제작하는 수준 높은 제조사다. 에르메스는 이에 멈추지 않았다. 2013년 케이스 제조사 조셉 에라르(Joseph Erard)와 다이얼 제조사 나테베르(Natéber)를 흡수하고 2017년엔 마침내 통합 매뉴팩처 레 아틀리에 데르메스 오롤로저의 문을 열었다. 스위스 은행 폰토벨에 의하면 당시 에르메스 그룹 전체 수익에서 시계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4%에 불과했다. 에르메스 워치메이킹은 빠르게 성장해 브랜드 인지도와 정통성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에르메스는 작년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 아쏘 뒥 아뜰레로 쐐기를 박았다. 2020년의 아쏘 리프트 투르비용 미닛 리피트를 한층 발전시켜 3만6000vph의 고진동으로 회전하는 다축 센트럴 투르비용, 특허 출원한 튜닝 포크 공(gong)이 적용된 미닛 리피터, 멀티 스포크 기어 등 메커니즘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다수 적용한 시계다. 특히 미닛 리피터 핵심 부품에 적용된 말머리 심벌, 멀티 스포크 기어가 표현한 마차 바퀴살 등 뒥 아뜰레 마차의 디테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과시하지 않았다. 에르메스의 상징성과 스토리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담겼는지 설명했을 뿐이다. 에르메스는 더 이상 설득할 필요가 없다.

루이 비통 시계의 행보는 더욱 거침없다. 루이 비통이 속한 LVMH 그룹은 불가리, 위블로, 태그호이어, 제니스, 쇼메 등 다수의 시계와 보석 브랜드를 보유하고, 각 부문을 전략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워치메이킹의 본질은 장인정신과 기술력, 그리고 정체성에 있다.
에르메스, 루이 비통, 샤넬은 이미 럭셔리 패션 분야에서 확립한 독자적인 DNA를 자신들의 시계에 충실히 담아냈다.”

2021년에는 미국 주얼리 명가 티파니를 약 158억 달러(약 20조 원)에 인수했다. 루이 비통은 LVMH 그룹의 핵심이다. 전 세계 럭셔리 시장에서 단일 브랜드로는 최대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 변호사와 법률 전문가가 중심이 되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TFL(thefashionlaw.com)에 따르면 LVMH 그룹의 패션 및 가죽 제품 부문은 2022년 전체 럭셔리 시장의 약 17%를 차지했는데, 이를 견인하는 주력 브랜드가 루이 비통이다. 루이 비통 매출은 2022년 기준 200억 유로(약 27조원)로 럭셔리 시장의 약 8%를 점유한다. 루이 비통이 워치메이킹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할 명분이다. 루이 비통 워치 디렉터는 LVMH 그룹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의 막내 아들 장 아르노(Jean Arnault)다. 그는 2023년 9월 한국을 방문해 루이 비통 시계를 세계 1위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2022년 뉴 땅부르 워치를 통해 하이 워치메이킹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린 루이 비통은 올해 무브먼트 제조를 맡은 라 파브리크 뒤 텅 루이 비통, 케이스를 제작하는 라 파브리크 데 보아티에, 수공예를 담당하는 라 파브리크 데 아르를 통합했다. 루이 비통의 제네바 워치메이킹 시대가 열린 것이다. 라 파브리크 뒤 텅 루이 비통 매뉴팩처의 설립자이자 마스터 워치메이커 미셸 나바스는 “이제 전체 생산 과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며, 모든 루이 비통 시계가 정밀하고 세심하게 제작되도록 인하우스 생산을 우선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LVMH 워치 위크에 처음 참여한 루이 비통은 새로운 땅부르 스핀 타임을 통해 그 발언을 입증했다. 점핑 아워를 3차원 큐브로 구현한 땅부르 스핀 타임은 2009년 라 파브리크 뒤 텅과 루이 비통의 협업으로 처음 탄생했다. 16년 전에 신개념 메커니즘을 선택한 대담성은 워치메이킹에 대한 루이 비통의 혜안을 입증한다. 올해 메커니즘과 디자인 모두 획기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스핀 타임에서 루이 비통 통합 매뉴팩처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장 아르노는 “루이 비통 하이 워치메이킹은 지금부터”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샤넬은 시계의 성격에 따른 2웨이(2-way) 전략을 구축했다. 남녀 모두를 위한 올라운더 워치를 지향하는 J12에는 샤넬이 지분 20%를 보유한 스위스 매뉴팩처 케니시의 ‘오더메이드’ 무브먼트를 탑재하고, 컴플리케이션이나 스켈레톤 등 특별한 모델에는 샤넬이 1993년 인수해 성장시킨 매뉴팩처 G&F 샤틀랭(G&F Chatelain)에서 개발한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탑재한다. 샤넬 워치의 간판 모델은 J12다. J12는 1999년 샤넬 수석 디자이너 자크 엘뤼가 J-클래스 요트에서 영감받았다.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을 모두 세라믹으로 제작한 스포츠 워치이자 최초의 젠더리스 워치였다. J12가 시계 업계에 미친 영향력은 막강했다. 세라믹 시계는 1986년 처음으로 등장했지만 J12 이후 비로소 높은 인지도를 얻었다. 샤넬 워치메이킹 스튜디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르노 샤스탱(Arnaud Chastaing)은 J12를 “21세기 시계 업계의 첫 번째 혁명”이라 단언했다. J12 탄생 20주년인 2020년을 맞아 샤넬은 J12에 새로운 셀프와인딩 칼리버 12.1을 탑재했다. 칼리버 12.1은 튜더에 탑재되는 케니시의 MT5600 계열이다. 무브먼트 피니시는 칼리버 12.1이 더 뛰어나다는 평이다. 매뉴팩처 무브먼트라는 새로운 날개를 단 J12는 샤넬 워치메이킹 스튜디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아르노 샤스탱의 비호 아래 샤넬 워치만의 런웨이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샤넬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을 캐릭터화한 마드모아젤 J12는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2023년 인터스텔라 캡슐 컬렉션은 J12의 재조명을 넘어 샤넬 워치메이킹의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워치메이킹의 본질은 장인정신과 기술력, 그리고 정체성에 있다. 에르메스, 루이 비통, 샤넬은 이미 럭셔리 패션 분야에서 확립한 독자적인 DNA를 자신들의 시계에 충실히 담아냈다. ‘이들의 시계가 구매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들의 시계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다가갈 수 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처음에 언급한 필립 델로탈의 말처럼, 그들은 이미 답을 찾았다.


3 패션 하우스가 전통 워치메이킹을 통해 찾은 추구미

Words 장종균(<타임포럼> 디렉터)


‘그돈씨’라는 말이 있다. 그 돈이면 씨X 다른 거 산다는 일종의 은어다. 특정 제품이 돈값을 제대로 못할 때 종종 쓰이곤 한다. 과거 패션 하우스들이 선보인 시계는 말 그대로 ‘그돈씨’였다. 적어도 시계 애호가 눈에는 그랬다. 쿼츠 또는 값싼 범용 기계식 무브먼트를 사용하고 다이얼에 자신들의 이름만 붙이면 다 될 줄 알았나. 가격표에 어울리지 않는 피니싱은 또 어떻고.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사람이면 모를까, 시계에 진심인 애호가들에게 눈 가리고 아웅 하기가 통할 리 없다. 과거에는 소위 명품 3대장이라 불리는 ‘에루샤’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계식 시계는 물성이 묘하다. 액세서리라는 이유로 패션의 한 카테고리로 분류되지만, 수백 개의 부품이 한 치 오차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걸 보면 자동차 같은 고도의 공학품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시계 브랜드 역시 후자의 잣대에서 평가가 갈린다. 이때 핸드메이드의 비중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패션 하우스가 그렇게 한 땀 한 땀 외치던 장인정신 말이다. 어떤 워치메이커가 얼마나 부품을 직접 가공하고 조립했느냐가 관건이다. 시계 애호가들은 그들이 밀리미터의 공간에서 치밀하게 시계를 만들어온 오랜 전통과 노하우를 믿고 기꺼이 지갑을 연다. 패션 하우스에서 만든 시계에는 중요한 헤리티지가 빠져 있다. 앙꼬 없는 찐빵이랄까. 패션 하우스 역시 그를 모를 리 없다. 세계적인 명성의 ‘에루샤’라면 더더욱. 차곡차곡 헤리티지를 쌓으면 될 일이지만, 그래서는 전통 워치메이커와의 간극을 좁히기 쉽지 않다. 시계 브랜드 또한 그만큼 헤리티지를 더욱 축적할 테니까. 패션 하우스는 결국 전통 워치메이커와의 상생에서 해답을 찾았다. 본업에서 부를 축적한 그들은 20세기 말부터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명망 높은 워치메이커를 하나둘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샤넬은 일찍이 정통 워치메이킹에 눈을 떴다. 1993년 스위스 라쇼드퐁 소재의 G&F 샤틀랭 매뉴팩처를 인수하며 초석을 다졌고, 2000년 그를 통해 J12라는 걸출한 스타를 먼저 배출했다. J12는 당시로서는 생소한 하이테크 세라믹으로 만든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을 도입하며 관련 분야의 선구자로 이름을 날렸다. 세라믹은 주원료인 산화지르코늄 파우더가 녹고 굳는 과정(소결, Sintering)에서 부피가 줄어든다. 사전에 치밀한 계산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두세 덩어리로도 가공이 가능한 케이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서로 다른 크기로 이루어진 브레이슬릿 링크까지 하나하나 세라믹으로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다. 웬만한 가공 기술이 아니면 쉽게 엄두도 못 낸다. 샤넬은 일찌감치 그 어려운 걸 해냈다. J12가 지금까지 아이코닉한 세라믹 워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근래 샤넬은 세라믹보다 더 까다로운 사파이어 크리스털 가공에도 눈을 떠 형형색색의 관련 소재로 J12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을 만든다. 시계 애호가에게 눈도장을 찍은 모델은 또 따로 있다. 무슈 드 샤넬. 이 남성용 시계에는 마니아가 환호할 만한 포인트가 한둘이 아니다. 서로 다른 축을 통해 시/분/초를 따로 표시하는 레귤레이터 타입에 분침은 사이클마다 원점으로 재빠르게 역행하는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으로 움직이고, 시를 나타내는 회전 디스크는 그에 맞춰 점핑 방식으로 작동한다. 게다가 복잡한 메커니즘을 구동하는 수동 무브먼트는 독창적이기까지 하다. 샤넬의 주요 컬렉션에 사용하는 무브먼트는 G&F 샤틀랭 매뉴팩처에서 주로 만들지만, 일부는 외부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가령, 투르비용을 비롯한 컴플리케이션은 오데마 피게의 ‘르노 앤 파피’, 무슈 드 샤넬같이 특수한 모델은 재야의 고수 ‘로맹 고티에’, J12에 사용하는 베이스 무브먼트는 튜더 산하의 ‘케네시’에서 담당했거나 지금도 그러하다. 현재 샤넬은 로맹 고티에와 케네시의 일부 지분까지 보유 중이다. 어디 그뿐이랴. 사각형 파일럿 워치로 유명한 벨앤로스,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의 재림으로 통하는 F.P. 주른까지 지분에 따라 샤넬과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고 있다. 샤넬은 앞으로 각 파트너사와 활발히 교류하며 시계 부문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다.

“패션 하우스의 워치메이킹은 든든한 우군과 함께 나날이 진보하고 있다.
시계 애호가 역시 예전에는 등한시했던 패션 하우스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에르메스는 스위스 플러리에에서 영혼의 파트너를 찾았다. 조력자의 정체는 파르미지아니의 매뉴팩처로도 잘 알려진 보셰 매뉴팩처. 에르메스는 그들과 함께 독자적인 베이스 무브먼트부터 먼저 개발했다. 기초공사부터 제대로 시행한 셈이다. 다음 스텝은 거칠 게 없었다. 에르메스는 탄탄한 토대를 바탕으로 컴플리케이션 장인 장-마르크 비더레히트(Jean-Marc Wiederrecht)의 아장호(Agenhor), 유명 독립 시계 제작자 장-프랑수아 모종(Jean-François Mojon)의 크로노드(Chronode SA), 크로노그래프 스페셜리스트 뒤부아 데프라(Dubois Dépraz) 등 네임드 워치메이커와 손잡고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했다. 특히, 크로노드가 에르메스의 베이스를 토대로 설계한 아쏘 레흐 드 라 룬, 아쏘 르 땅 보야쥬는 각각 문페이즈, 월드타임 워치 장르에서 전에 없던 메커니즘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두 모델은 그 덕에 시계 오스카상으로 통하는 GPHG에서 캘린더 및 아스트로노미 부문(2019년), 남성/여성 컴플리케이션 부문(2022년)에서 최고봉에 오르는 쾌거까지 이뤘다. 지난해 에르메스에 손을 내민 조력자는 베일에 쌓여 있지만, 그의 손을 거친 아쏘 뒥 아뜰레는 그 어렵다는 3축 투르비용에 차임으로도 시간을 알리는 미닛 리피터를 조합하며 브랜드 역사를 새로 썼다. 참고로, 다축 투르비용에 미닛 리피터를 지원하는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을 보유한 브랜드는 손에 꼽을 정도다. 에르메스의 워치메이킹이 그만큼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는 의미다.

루이 비통은 스위스 제네바의 컴플리케이션 전문 공방 ‘라 파브리크 뒤 텅’ 인수를 시작으로 지난 10여 년간 워치메이킹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플라잉 투르비용, 미닛 리피터 같은 고난도 컴플리케이션도 해당 기간에 나왔고, 일부 모델은 스위스 제네바산 하이엔드 무브먼트임을 공인하는 제네바 홀마크까지 획득했다. 루이 비통은 고급 워치메이킹으로 녹록지 않은 기술력을 증명하는 한편, 미래를 책임질 베이스 무브먼트 개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고의 시간은 2023년 달콤한 결실로 이어지게 된다. 차세대 무브먼트 LFT023이 마침내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고, 그 뛰어난 완성도는 시계 애호가로부터 호평을 이끌어냈다. 특히 독창적인 디자인에 흠잡을 데 없는 마감, 그리고 설계가 까다로운 마이크로 로터를 통해 두께를 비약적으로 줄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베이스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앞으로 LFT023을 기반으로 탄생할 더 다양한 기능의 시계가 진짜다. 무궁무진한 변화가 기대된다. 얼마 전 LVMH 그룹에 새롭게 합류한 클락 메이커 레페 1839와의 협업도 지켜볼 만한 관전 포인트다.

지난 2023년, 루이 비통 워치 디렉터 장 아르노는 차세대 땅부르와 무브먼트 LFT023과 관련해 “루이 비통 워치메이킹 역사의 새로운 챕터를 여는 기점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확신에 찬 그의 말은 비단 루이 비통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패션 하우스의 워치메이킹은 든든한 우군과 함께 나날이 진보하고 있다. 시계 애호가 역시 예전에는 등한시했던 패션 하우스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비슷한 디자인의 시계에 지친 이들은 점점 더 새로운 걸 원한다. 패션 하우스는 남다른 창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드는 데 도가 튼 선수들이다. 전통 워치메이커가 그를 따라잡는 건 태생적으로 쉽지 않다. 마치 패션 하우스의 워치메이킹에 전통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계 브랜드들이 긴장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돈씨’의 주홍글씨가 어디 쓰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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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김장군
Image 에르메스, 루이 비통, 샤넬

2025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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