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서 글귀를 봤다. 격언이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격언. 단편적으로 말해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격언들. 잊고 지내다가 다시 보면 새삼 깨달음을 얻은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건드리는 지점도 다양하다. 삶을 돌아보게 하거나 자신을 다잡게 한다. 좋은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공허하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한 줄 격언으로 힘을 얻기엔 삭막하다.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25년간 1위다. 삶의 만족도 역시 OECD 38개국 중 33위다. 통계를 들이밀지 않아도 일상을 돌아보면 팍팍하다. 일상의 소중함보다 내일의 걱정이 먼저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격언 한 줄에 감화하기엔 현실이 냉혹하다. 감화는커녕 도리어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공허한 다짐 같달까. 현실에 치인 21세기 한국 사람으로서 SNS에 떠도는 격언에 토를 달아본다. 현실은 이렇다고.
무언가를 하려거든 전력을 다하라
독일 격언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주지사까지 한 그는 이제 자기 계발 책을 내고 강연을 다닌다. 책 제목은 <나는 포기를 모른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그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보디빌더 정점에 서고 배우로 활동하다 주지사까지 된 그의 이력이 격언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전력으로 안 해도 과로가 일상이다. 많은 사람에겐 일과 일상의 조화가 더 큰 화두로 다가온다.
전력의 정도도 모호하다. 누군가에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겐 못내 아쉽게 보일 수 있다. 보통 노동자와 고용자의 입장 차이겠다. 무엇보다 전력을 다한다고 그에 맞는 보상이 있지도 않다. 누구나 어느 한때 전력을 다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은 적이 더 많음을 우린 안다. 우리네 삶은 몇 라운드 경기가 아니다. 오랫동안 지속해야 한다. 전력을 다하면 피폐해진다.
시작하는 데 나쁜 시기란 없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다. 그가 말한 줄 몰랐다. SNS에서 한 줄 격언으로 자주 봤다. 저 말을 들으면 지금이라도 뭐든 시작해야 할 마음이 든다. 들기만 한다. 무언가를 시작할 여유가 없으니까. 한국 사회에서 ‘만성피로 증후군’ ‘번아웃 증후군’ 같은 단어는 이미 익숙하다. 지금 괴로워서 허덕이는데 뭔가를 더 하는 건 시기가 나쁘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선택이란 얘기다. 물론 사소한 것은 시작할 수 있다. 기분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소한 행동들. 사실 그 상황도 없는 힘을 짜내야 가능하다. 괴로움은 일상 전체를 흔든다. 혹 남는 시간이라도 괴로움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그 틈을 비집고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소포클레스의 말이다. 살면서 어딘가에서 여러 번 봤을 테다. 감성이 충만할 때 보면 뭉클하기까지 하다.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북돋는다. 하지만 뜨거운 만큼 금세 차갑게 식는다. 일단 어제 죽은 이는 알 수 없는 누군가니까. 오늘을 사는 나는 내일도 살아가니까. 잠시 기분을 환기할 뿐 이내 쳇바퀴처럼 도는 일상에 파묻힌다. 어쩔 수 없다. 남의 큰 고통보다 자기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픈 법이다. ‘오늘을 낭비하지 마라,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 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내일도, 모레도 있다. 내일이 마지막일 것처럼 오늘을 사는 건 내일이 마지막인 사람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정신적,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콧 펙의 말이다. 그는 책도 여러 권 써 베스트 작가로도 불린다. 정신과 의사 출신답게 마음에 관한 책이 많다. 고난을 통해 성장한다는 건 익숙한 말이다. 살면서 수도 없이 듣고 봤다. 소년 만화의 절대 법칙 중 하나도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성장하는 이야기 아닌가. 그동안 수많은 만화책을 봤지만 그만큼 성장했는지는 모르겠다. 이야기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하는 요소일 순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고난은 깊은 상처로 남게 마련이다. 어떤 고난은 성장은커녕 다시 일어서기 힘든 좌절로 이어진다. 큰 고난 속에 놓인 사람에게 그렇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하면 뺨 맞는다.
성공의 비결은 행동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말이다. 그는 성공한 자기 경험을 수많은 강의로 풀어낸다. 그가 강의에서 전하는 핵심을 축약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낸 책의 제목인 <행동하지 않으면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도 이 말과 일맥상통한다. 괴테도 이런 말을 했다.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천에 옮겨야 한다.’ 같은 의미다.
그러니까 뭔가 시도하라는 뜻일 게다. 좋은 말이지만 너무 광범위하다. 행동이라는 말 속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새로운 일일 수도 있고, 창업일 수도 있다. 그런 모든 시도와 행동이 다 좋은 결과를 내지 않는다. 아니,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뉴스만 봐도 안타까운 상황이 수두룩하다. 작년 폐업 사업자 수는 98만6000명이었다. 2006년 이후 가장 많다. 성공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을 좇다가 저 숫자에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성공은 열심히 노력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토머스 에디슨의 말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속담과 같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노력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힘이 빠진다. 지금 잘 살지 못하면 노력하지 않았다고 느껴지게 한달까. 잘 산다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대다수는 모자라고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 정도면 행복한 편이다. 지금 당장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런 평범한 대다수가 모두 노력하지 않았을까.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 저마다 노력은 해왔다. 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의 한계치는 엄연히 존재한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발이 점점 빠져드는 늪 같은 상황은 도처에 널렸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성공과는 먼 경우가 대다수다. 노력에 관한 격언이 잠시 의욕을 부를 순 있다. 하지만 의욕 조금 채워준 다음에는 ‘희망 고문’의 늪에 빠지게 한다.
성격을 바꿔야 운명이 바뀐다
요즘 광고로 많이 보이는 자기 계발 책 제목이다. 제목 그 자체가 격언으로 들린다. 비슷한 격언도 많다. ‘생각을 바꿔야 미래가 달라진다’ 같은 종류의 말들. 아무튼 바꿔야 달라진다. 당연한 말이다. 누가 그걸 모를까. 몰라서 안 하는 사람은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못 하는 거다. 어쩌면 성격을 바꾼다는 건 운명을 바꾸는 것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무엇보다 성격을 바꾼다고 더 좋은 미래가 기다리지도 않는다. 단지 성격 하나로 운명이 바뀔 정도로 녹록한 세상이 아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환경에서 성격은 사소한 변수다. 게다가 바꿔야 한다는 말에 집착하다가 성격이 더 나빠질 수 있다. 목표가 어렵고 결과는 신통찮으니까. 역효과다. 게다가 본받고 싶지 않은 성격을 뾰족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더 잘 사는 모습, 많이 봤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이다. 현대 경영학을 창시한 학자로 평가한다. 1909년에 태어나 20세기를 관통했다. 그런 그에게 미래는 만들어나갈 수 있는 존재였나 보다. 실제로 여러 사람이 미래를 만들어오긴 했다. 인터넷이 한 번, 스마트폰이 또 한 번 세상을 바꿨다. 그 과정을 이끈 주역들에게 미래는 만들어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우 소수의, 아주 뛰어난 사람에 한해서. 한국에 사는 대다수 사람에게 미래는 만들어나가는 개념이 아니다. 어쨌든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다. 소수에겐 의욕이 생기는 말이겠지만, 대다수에겐 뜬구름 잡는 말이다. 금리가 상승해 곱절이 된 대출금 이자에 식은땀 흘리는 사람에게 미래는 공포다.
자신을 한계 짓지 마라,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정하는 만큼 갈 수 있다
메리케이 코스메틱의 창업자 메리 케이 애시의 말이다. 역시 성공한 사업가는 자신처럼 될 수 있다고 의욕을 북돋는다. 동기부여 강사인 나폴레온 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자신을 믿어라. 그렇게 되면 어떤 것도 가능하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마음 정하는 만큼 한계 없이 갈 수 있다니. 감미로운 말에 취했다가 깨어나면 오히려 현실이 독방처럼 더 좁아진다.
요즘 초등학생도 사는 집과 타는 차, 해외여행 유무를 인식하고 반응한다. 그게 올바르다는 뜻은 아니다. 시대상을 알려주는 단면이란 얘기다. 현실이 그렇다. 우린 살면서 수많은 한계에 부딪힌다. 한계를 넘을 때보다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울 때가 훨씬 많다. 한계는 자신이 짓는 게 아니다. 주변 환경이 선을 긋는다. 한계 짓지 마라는 말보다 고대 그리스 격언이 더 현실적이다. ‘너 자신을 알라.’
당신의 꿈을 따르라, 그곳에 길이 있다
미국의 목사이자 책 <긍정의 힘>을 쓴 조엘 오스틴의 말이다. 책 제목처럼 무척 긍정적인 말을 했다. 꿈을 따르면 길이 있다니. 21세기 한국에서 꿈이란 단어는 근대박물관에 있는 전시물 같은 존재 아닐까.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본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의사 아니면 변호사. 직업이 곧 꿈, 아니 돈 잘 버는 직업이 곧 꿈이다. 지극히 현실적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도 현실적으로 말할 정도다. 닳고 닳은 어른들에게 꿈은 신기루 같은 존재다. 아득하게 멀리서 일렁이는 존재를 따라가기에는 의지도 여력도 없다. 이젠 명확하게 보이는 몇 평짜리 아파트가 꿈이려나. 그것에 도달하는 길도 요원하다. 꿈을 이야기하기에 지금 우린 셈이 너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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