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책임감도 커지기 마련이잖아요.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잘해내는’ 것도 중요하죠.”
인터뷰가 공개될 때는 <마녀> 종영 직후일 텐데요. 조금 이르지만 이번에 맡은 ‘이동진’ 역에 대해서 한 줄 평을 남겨본다면?
다채로웠다! 동진이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지만 그저 일관되게 보이면 안 되는 캐릭터였어요. 아주 똑똑하면서도 사람 좋은 태도로 일관하는데, 자칫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상대방에 따라 말투나 태도를 미묘하게 조율하면서 연기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점에서 큰 공부가 된 역할이었습니다.
그런 세세한 설정은 보통 감독님이 정해주시나요, 본인이 고민하고 준비하나요?
작업마다 달라요. 대본 자체에서 느껴지는 디테일도 있고, 감독님께서 먼저 요구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마녀> 대본을 처음 받고 저는 직관적으로 ‘목소리가 조금 가늘었으면 좋겠다’고 느꼈어요. 감독님께 제 의견을 말씀드렸고, 그럼 한번 만들어보자고 해주셨어요. 실제로 제 대사가 있는 첫 촬영은 두 버전으로 찍었어요.
어떤 장면이었나요?
동진이 대학생 시절인데요. 진선규 선배님이 저한테 ‘네가 했던 그 통계는 잘못된 거야’라고 얘기해주시는 장면이었어요. 목소리를 달리해서 두 번 촬영했습니다. 제가 동진에 맞춰 조율한 목소리, 그리고 평소 제 목소리. 촬영이 끝나고 감독님께서 ‘동진이한테는 좀 더 가는 목소리가 낫겠다’고 하셨고, 다음 촬영부터 쭉 목소리를 신경 쓰면서 촬영했어요.
동진은 무척 이타적인 사람이죠. 미정이 마녀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요. 연기하는 입장에서 동진은 어떤 사람으로 비쳤으면 했나요?
무해한 사람이길 바랐어요. 동진에게는 천재적인 면이 있잖아요. 자신의 재능을 미정이 마녀가 아님을 증명하는 데 쓰고요. 그게 자칫 강박처럼 보이는 순간 거부감으로 이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시선을 피하려면 정말 무해한 사람처럼 보여야 했어요. 누군가를 집요하게 쫓아가는 모습이 시청자에게도 부드럽게 받아들여져야 할 테니까요.
극 중 동진과 실제 박진영은 얼마나 닮았나요?
많이 다르죠.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려는 모습은 비슷하지만, 10년 동안 한 가지 일을 잊지 못하고 에너지를 쏟는 모습은 제게 없거든요. 물론 제 일을 너무 사랑하지만 뭐든 금방금방 잘 잊는 편이라서.(웃음) 동진이가 엄마한테는 엄청 살가운 아들이에요. 그 점이 가장 많이 달라요.
전형적인 경상도 아들인가 보네요.
제 고향이 경남 진해거든요. 매번 ‘나도 애교 있는 아들이 돼볼까’ 생각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데뷔 후에 사투리 연기를 한 적이 있나요?
첫 데뷔작에서 사투리 연기를 했죠. 사실 연기도 아니었어요. 그때는 서울말을 아예 못했거든요. 사투리밖에 못해서 사투리로 연기한 거였어요.
생뚱맞은 이야기인데,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다고 들었어요.
잘못된 정보예요.(웃음) 성적은 항상 중간이었어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딱 중간.
중고등학교 때는 어떤 학생이었어요?
전형적인 남학생이었죠. 친구들과 축구하는 거 좋아하는데, 또 잘하지는 못하는. 학교 다닐 때는 무조건 축구 잘하는 친구들이 공격수 하잖아요. 저는 늘 수비수였거든요. 그러다 학교 끝나면 친구들이랑 PC방 가고. 그렇게 평범하게 보내다 갑자기 춤에 꽂혔고 시골에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당시 춤에 빠진 계기가 있었나요?
남자들 그런 거 있잖아요.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마음. 저는 정말 평범한 남학생이었기에 은연중에 늘 그런 걸 동경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무대에서 춤추는 게 참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때 한창 좋아한 가수는 누구였어요?
저스틴 팀버레이크, 어셔, 니요 정말 좋아했어요. 태양 선배님도 좋아했고요. 그때가 ‘웨딩드레스’ ‘나만 바라봐’로 활동하실 때거든요.
JYP 오디션에서는 어떤 곡으로 춤을 준비했는지도 궁금하네요.
오디션은 3차까지 있었어요. 1차 오디션은 영상을 보내야 하는데, 중학교 3학년 때 R&B 사운드에 창작 안무를 준비해서 통과했어요. 2차에서도 창작 안무를 췄고요. 마지막 3차 오디션 때는 저희 갓세븐 멤버인 제이비 형과 듀스의 ‘나만 바라봐’, 동방신기의 ‘풍선’을 듀오로 준비해서 1등 했어요
당연히 JYP 가수 곡으로 고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제가 고를 수가 없었어요. 회사에서 미션으로 배정해준 곡이었거든요.
학창 시절에는 담임선생님이 교사를 권할 정도로 모범 학생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오디션에서 떨어졌다면 어떤 직업을 꿈꿨을까요?
말씀하신 공부 잘하던 때는 워낙 어렸을 때라.(웃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요. 그래도 뭔가 창작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소질이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배우는 건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교사보다는 무언가 열심히 배워서 만드는 일을 했을 것 같네요.
말씀하셨듯 원래는 가수를 꿈꿨지만, 데뷔는 배우로 먼저 했죠. 데뷔 전에도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나요?
<드림하이 2>에서는 춤출 수 있는 친구들을 뽑았어요. 너무 감사하게도 좋은 역할을 맡았지만, 돌이켜보면 ‘기회가 생겼으니 뭐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이 더 컸어요. 그때는 열여덟 살이었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서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다 진지하게 ‘배우를 해보고 싶다’ 마음먹게 된 작품을 만났죠. 드라마 <사랑하는 은동아>인데요. 처음으로 내 서사가 있는 캐릭터를 만나게 해준 작품이에요. 그때부터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게 이렇게 재미있구나 느꼈습니다.
지금 박진영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똑같아요. 음악과 연기. 제가 선택한 일이고, 여전히 즐거운 일이에요. 다만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책임감도 커지기 마련이잖아요.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잘해내는’ 것도 중요하죠.
“유쾌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 속에 녹아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장르와 캐릭터를 맡더라도 유쾌한 면이 느껴지는 배우.
유연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지금 해결해야 하는 숙제가 있다면요?
자기 관리예요. 어릴 때는 참 고맙게도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체질이었거든요. 요즘은 찌더라고요.(웃음) 작품에 들어가면 보통 6개월 정도 한 캐릭터로 살아가는데, 제가 갑자기 살이 쪄버리면 작품 속 캐릭터도 다른 사람이 돼버리잖아요. 그래서 늘 운동도 식단 관리도 부지런히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식단 관리는 정말 힘들어요.
제일 힘들게 하는 음식은 뭐예요?
치킨이요. 정확히는 치킨 말고 통닭. 장작불로 구운 한방 통닭이요. 가끔 밤늦게 촬영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한방 통닭집 앞을 지나가면 미치겠어요. 제 취미 중 하나가 밤에 배달 앱 들어가서 영업 중인 통닭집 찾는 거예요.
평소에 독서를 무척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문학잡지와 나눈 인터뷰도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평소 읽을 책은 어떻게 고르는지 궁금해요.
제가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해요. 한 권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거든요. 내용도 금방금방 까먹다 보니 수시로 앞페이지로 돌아갔다 다시 읽는 스타일이에요. 주로 ‘지금 내가 읽고 싶은 내용’을 찾아서 책을 고르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다. 그럼 ‘나는 왜 힘들지’ 궁금해지잖아요. 혹시나 내 몸에 무리가 간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럼 거기에 맞는 책을 찾아보죠. 그게 심리책일 수도 있고, 뇌 과학 서적일 수도 있고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책을 고른다면요?
정재승 교수님의 <열두 발자국>. 군대에서 처음 읽은 책인데요. 지금 내가 고민하고 힘들다고 여기는 게 사실은 당연한 거구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게 길잡이 역할을 해준 책이에요. 최근 읽고 있는 <사피엔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좋아합니다. 소설이나 시집은 감성에 빠지게 하잖아요. 요즘에는 저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책들이 더 재미있더라고요. 최근에 추천받아 읽으려고 사둔 책도 있어요. 폴커 키츠, 마누엘 투쉬의 <마음의 법칙>. 제 연기 멘토이자, 극단 ‘간다’의 민준호 대표님이 추천해주신 책인데 곧 읽어볼 계획입니다.
그간의 인터뷰를 읽으니 박진영은 ‘재능보다는 노력의 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이따금 지칠 때도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넘기는 편이에요?
저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살았어요. 물론 매번 한계에 부딪히죠. 내가 가진 능력은 여기까지구나 하고요. 그 부족함은 지금 당장 개선할 수 없잖아요. 당장에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은 생각을 안 하는 편입니다. 매번 더 나아지려고 노력한다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드라마 <드림하이 2>로 처음 데뷔한 게 2012년입니다. 그때의 박진영과 지금의 박진영은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요?
유연해졌어요. 1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경험치가 다르니까요. 이제는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지 않아요. 흘려보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사람을 대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요즘 그런 생각은 들어요. 내 성격에 맞는 나이가 딱 지금이구나.
어렸을 때는 애늙은이 소리를 들었다면, 지금은 성숙한 어른이 된 거네요.
맞아요. 생각해보면 예나 지금이나 성격은 크게 바뀐 게 없어요. 그런데 어릴 때는 ‘어린애가 왜 이렇게 진지하냐’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30대가 되니까 이제는 저를 좀 더 자연스럽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오는 5월이면 박보영 배우와 함께한 새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 공개됩니다. 로펌 변호사 ‘이호수’ 역을 맡았고요. 어떤 작품일지 귀띔 부탁드려요.
정말 재미 있으면서도 슬픈 드라마가 될 것 같아요. 제가 맡은 호수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에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처럼 열심히 포장하려고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의심하거든요. 사실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 대부분이 그래요. 겉으로는 부족함 없이 자기 일을 척척 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위태로운 사람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면이 있잖아요. 그만큼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마냥 무겁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거든요. 많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좋은 배우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되고 싶은 건 유쾌한 배우예요. 유쾌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 속에 녹아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장르와 캐릭터를 맡더라도 유쾌한 면이 느껴지는 배우. 유연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사람들이 있죠.
그럼요. 이제는 과정이 중요한 시대가 됐잖아요. 물론 예전에도 과정은 중요했지만, 지금은 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두가 투명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잘 소통하고, 동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덕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태도를 갖출 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연기도 연기지만, 현장을 즐겁게 만드는 배우가 되길 바라요.
관객이 ‘배우 박진영’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하면 좋을까요?
믿음직한 사람. 사실 배우와 관객이 사적으로 아는 관계는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TV나 모니터 앞에 앉아서 기꺼이 시간을 쓰시죠.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만큼 믿음이 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박진영이 나온다니 어련히 재미있겠지’ 하고 볼 수 있는 배우. 설령 그 작품이 평소 즐겨 보는 취향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배우를 믿고 보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언젠가 그런 피드백을 듣게 된다면 정말 짜릿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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