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undred Years of Fendi
100년의 시대를 응축한 펜디의 2025-26 F/W 컬렉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펜디의 런웨이를 직접 본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까. 이번 2025-26 F/W 컬렉션은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하우스에 바치는 헌사다. 펜디의 창립 당시 출시된 아카이브 피스들, 즉 하우스의 초기 유산을 그대로 담고 있는 아이템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되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런웨이를 가득 채웠다.
그중에서도 2005년에 출시된 펜디 스파이 백은 시어링 소재와 트위스트 핸들을 더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하며, 다시 한번 하우스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부활했다. 피카부와 바게트 백 또한 3D 가죽 공예 기법과 다채로운 소재의 변주를 통해 또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펜디의 정체성과도 같은 퍼 재킷과 극적인 실루엣의 스커트, 그리고 원초적인 텍스처의 매력을 강조한 아이템도 놓칠 수 없다. 또 하나의 신스틸러는 가방 대신 모델이 들고 나온 인형과 백 참. 실비아의 섬세한 디테일과 장난기 어린 모습이 그대로 스며든 순간이었다. 쇼의 스케일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프런트 로에 자리한 화려한 인물들 덕분이기도 하다. 브랜드 앰배서더 송혜교와 스트레이 키즈의 방찬, (여자)아이들 우기, 트와이스 미나를 비롯해 사라 제시카 파커 등이 참석해 현장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끌어올렸다. 1925년부터 2025년까지. 100년의 역사를 30분의 무대 위에 응축한 펜디의 런웨이는 관객의 환호 속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막을 내렸다.
An Endless Journey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구찌의 여정.
2025 F/W 밀라노 패션위크의 서막을 연 구찌. 본격적인 막이 열리기도 전에, 현장은 이미 상기된 표정과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이정재를 비롯해 BTS 진, 배우 박규영까지. 글로벌 브랜드 앰배서더 3인이 등장하며 그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기도. 그러나 화려한 입장조차 잊게 만들 만큼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캣워크였다. 올해는 구찌 하우스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의 이니셜에서 영감받은 ‘인터로킹 G’ 엠블럼 탄생 50주년. 이를 기념하듯, 런웨이 자체가 ‘인터로킹 G’ 엠블럼이 얽힌 형태로 설계되었다. 이미 공간 자체로 구찌의 상징성을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요소는 런웨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산한 홀스빗 엠블럼이다. 홀스빗 1955 핸드백의 탄생 70주년을 맞이해 울트라 소프트 디자인으로 탄생한 핸드백과 자이언트 사이즈 홀스빗 핸들이 적용된 슬라우치 숄더백, 길게 늘어진 골드 체인 네크리스 등 상징적인 모티브를 재해석한 아이템이 런웨이를 장악했다.
남성과 여성 컬렉션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이번 쇼는 구찌의 기성복이 시작된 196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브랜드의 유산을 되새길 수 있는 기회였다. 60년대의 레트로 무드로 시작해 90년대의 미니멀리즘, 최근의 울트라-맥시멀리즘까지 다양한 실루엣의 컬렉션 피스가 런웨이를 넘나들며 시대를 초월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풍성한 퍼 재킷과 섬세한 레이스 톱이 돋보인 첫 번째 룩을 시작으로 볼캡에 실크 스카프를 두른 룩, 스타킹, 재킷 등에서 보인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가 빈티지한 무드를 한층 강조했다. 남성복에서는 그린과 그레이, 모브 색상이 조화를 이루며 정제된 구조와 정교한 테일러링의 수트가 중심이 되었다. 이 원단은 여성복으로도 이어져 미니드레스와 재킷 등으로 재탄생하며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또한 트위드, 레더, 코팅 울, 본디드 부클 등 다양한 소재를 폭넓게 사용하며 풍성한 텍스처의 매력을 가감없이 뽐냈다. 이처럼 하우스의 유구한 유산을 되짚어보며 구찌의 건재함을 다시 한번 입증한 2025 F/W 컬렉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찬란하게 그려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해 보길 바란다.
Versace’s Golden Era
찬란한 위용으로 펼쳐낸 베르사체의 황금기.
어둠이 짙게 깔린 밀라노의 밤. 마치 오래된 기차역에 불시착한 듯 트램 정거장에서 시작된 베르사체의 런웨이. 벨벳과 레더, 실크 등 윤광을 머금은 블랙 컬러 아이템들이 하우스의 아이콘인 바로코 프린트와 만나 칠흑 같은 런웨이를 찬란하게 밝혔다. 이번 시즌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브랜드의 강렬한 에너지와 특유의 대담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골드와 코인 디테일을 주얼리, 슈즈, 백에 적용해 웅장한 위엄을 자랑했고, 실버 프린지가 찰랑이는 보디콘 드레스와 입체적인 플레어의 블랙 미니드레스는 그야말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새로운 백 역시 눈길을 끌었다.
V 엠블럼으로 장식한 반원형의 톱 핸들 백, 비르투스 백은 모델의 걸음걸이에 맞춰 앞뒤로 흔들리며 런웨이의 리듬감과 생동감을 배가했다. 바로코 모티브, 애니멀 프린트 등 하우스를 상징하는 과감하고 화려한 패턴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극대화하며 쇼의 매력을 더했다. 무엇보다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피날레. 고막을 때리는 레이디 가가의 ‘Abracadabra’가 울려 퍼지며 쇼장은 전율로 가득 찼다. 쿵쿵거리는 비트에 맞춰 모델들은 당당한 워킹으로 런웨이를 장악했고, 관객은 너나 할 것 없이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베르사체의 쇼는 마치 이탈리아의 찬란했던 황금기를 재현하듯 관능적이고 매혹적이었으며 압도적인 에너지, 그 자체였다.
Modern but Free
사랑과 갈망, 자유와 통제, 낭만과 열정, 그리고 페라가모.
페라가모는 무용을 테마로 한 컬렉션을 이어간다. 2025 F/W 시즌의 주제는 독일의 ‘탄츠테아터(Tanztheater)’. 고전 발레의 정형화된 움직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한 현대 무용의 일종으로, 그 본질은 표현주의 무용과 감정의 해방에 있다. 맥시밀리언 데이비스는 이러한 개념을 컬렉션에 접목해 무용수의 우아한 일상에서 드러나는 해방감을 풀어내고자 했다. 특히 표현주의 무용의 시대인 1920년대와 1980년대의 미학 요소에 집중했다.
그 결과 정제된 실루엣 속에 틀을 깨는 디테일이 가미된 컬렉션이 탄생했다. 실크 슬립 드레스에는 드롭 웨이스트 장식을 더하고, 시어링 패치워크와 조화를 이뤄 새로운 실루엣을 창조했다. 부드러운 캐시미어와 퍼 위에 가죽을 매치해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디자인은 데이비스가 의도한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하다. 또한 몸을 따라 유려하게 흐르는 새틴 트렌치코트는 몸에 밀착되는 벨트를 더해 익숙한 디자인을 유연하게 재구성했다. 더블 스트랩과 벨트 디테일을 더한 허그 백 역시 시선을 사로잡는다. 페라가모의 1980년대 캠페인과 아카이브에서 영감받은 플로럴 디자인의 슈즈도 중요한 아이템 중 하나다. 오간자, 가죽, 새틴 등 풍성한 소재로 표현한 꽃 장식이 토 펌프스를 감싸거나 샌들로 이어지며 꽃잎이 소복하게 쌓인 장미 런웨이 위에서 우아한 발걸음을 완성했다.
데이비스는 쇼에 대하여 “일상적인 오브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시켜 예상치 못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자유와 해방의 시기, 1920년대 정신을 담은 이번 런웨이는 데이비스와 페라가모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여지없이 펼쳐낸 하나의 작품이다.
The Theatre of the Self
정체성과 본질을 탐구하는 하나의 패션쇼라는 메타 연극.
하나의 연극적 시퀀스처럼 진행된 발렌티노 2025 F/W 컬렉션은 레드 조명과 공중화장실이라는 비범한 무대를 통해 감각적 충격과 시각적 서사를 전개했다. 이 극적인 연출은 ‘친밀함에 대한 메타 연극(LE MÉTA-THÉÂTRE DES INTIMITÉS)’이라는 주제를 깊이 파고든다. 공중화장실은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행위가 교차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옷을 벗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지만, 옷을 갖춰 입고 문을 열고 나서면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정돈한다. 화장실 칸 안에서 우리는 모든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순수한 자아와 마주하지만, 밖으로 나설 때는 다시금 사회적 역할을 덧입는 것과 같다. 공중화장실은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과 사회적 영역이 한데 얽힌, 정체성의 경계가 유동적으로 흐르는 공간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바로 이 모순적 공간을 무대로 삼아, 패션 역시 자아 탐구의 한 형태임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말하는 ‘친밀함’이란 결국, 본래의 자아를 향한 탐색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아마저 외부 요소에 의해 규정되고 변형되는 연극적 산물이라 본다. 우리가 믿는 ‘진짜 나’조차 결국은 사회적 틀 안에서 형성된 하나의 역할일 뿐이라면, 우리의 본질은 무엇일까?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그 해답을 컬렉션에 담아내고, 메종의 아카이브를 재구성했다.
이번 컬렉션은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시그너처 디테일과 다층적 상징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레이스 소재와 프릴 디테일을 젠더 구분 없이 활용하며 로맨틱한 무드를 자아냈다. 그리고 곡선을 덜어낸 여성 재킷은 전통적 성별 코드에 대한 전복적 시선을 반영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페르소나인 고양이 모티브를 활용한 디테일도 눈에 띄었다. 특히 이번 시즌에 주목해야 할 점은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반스의 협업 컬렉션이다. 앞서 언급한 그의 상징적 존재인 고양이 패턴이 녹아든 슬립온, 발렌티노 로고가 더해진 반스의 아이코닉한 체커보드는 고급스러움과 스트리트 감성, 유희성과 전통이라는 상반된 코드가 공존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Love Dance
하이더 아커만이 톰 포드를 빗대어 써 내려간 매혹적인 사랑 공식.
서늘한 바이올린 선율이 쇼장을 서서히 채우며 모델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강렬한 레드 립 포인트에 짧은 길이의 레더 바이커 재킷이 첫 번째 룩으로 등장하며 분위기를 단숨에 압도했다. 구조적인 실루엣과 비대칭으로 커팅돼 흐르는 드레이핑, 섹슈얼리티에서 영감받은 디테일, 가죽 소재, 도트 패턴, 스카프 장식 등이 조화를 이루며 미스터 톰 포드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하이더 아커만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었다. 그가 구상한 톰 포드의 첫 번째 챕터는, 미스터 포드가 쌓아 올린 하우스의 본질을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미학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한 결과물이었다.
컬렉션은 블랙과 그레이의 무채색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하이더 아커만이 ‘기쁨의 색채’라고 명명한 다채로운 컬러의 수트와 드레스가 등장하며 색을 누구보다 유려하게 다룰 수 있는 그의 감각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절제된 디테일 속에서 은밀하게 고급스러움을 드러내는 방식도 돋보였다. 단추를 겉으로 노출하지 않거나, 스터드를 원단 안으로 숨겨 뾰족한 실루엣만을 강조하는 등, 하나하나 계산된 디테일은 그의 의도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여기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넘긴 슬릭 헤어스타일과 핏기 없는 얼굴의 모델들은 더없이 관능적인 무드를 선사했다.
“시작은 새로운 춤이다. 파트너를 바라보며 차이를 인정하고, 유사점을 탐색하며, 서로 발걸음을 맞추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이더 아커만이 말하고 싶은 사랑의 서사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까. 정제되었지만 강렬하게, 섬세하면서도 유혹적으로. 미스터 톰 포드의 유산에 발걸음을 맞춰가며 새로운 장을 쓰는 법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단 15분, 옷과 무대 연출, 그리고 닉 케이브&더 배드 시즈(Nick Cave & The Bad Seeds)의 굵고 낮은 음색으로 흘러나온 ‘Into My Arms’로 하이더 아커만은 컬렉션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을 완전히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A Timeless Journey
여정이 머무는 곳에서 브랜드의 역사을 견고히 하는 순간.
파리의 심장부, 북역에서 펼쳐진 루이 비통 2025 F/W 컬렉션은 브랜드의 유산을 깊이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기차역이라는 배경을 통해 여행의 서사를 직조하며, 이별과 재회의 여운, 미지의 길을 향한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시간에 쫓기는 초조함까지 옷에 섬세하게 녹여냈다.
이번 시즌, 루이 비통 여성 컬렉션의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물부터 고전 영화 속 상징적인 장면, 그리고 전설적인 일렉트로닉 뮤지션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의 여정을 담은 앨범 <Trans-Europe Express>까지, 다양한 시사적 요소를 하나의 여정 속에 풀어냈다. 쇼는 전반적으로 새로운 시즌의 룩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쇼장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했다. 사람들을 모두 택시에 태워 초대한 방식부터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의도한 바를 잘 보여준다. 쇼가 시작되자, 다채로운 색채와 패턴이 공간을 휘감았다. 수납공간이 많은 넉넉한 실루엣의 코트, 변화무쌍한 날씨에 유용한 케이프와 모자, 그리고 편안한 착용감의 구두 또는 부츠를 매치해 실용성을 극대화한 룩들이 주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브랜드만의 고고한 정신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 컬렉션의 또 다른 주인공은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상징하는 트래블 백이었다. 유연한 실루엣의 대형 러기지 백, 블랭킷 백, 그리고 견고한 트렁크 백들이 줄지어 등장하며, 여행의 황홀한 순간을 강조했다.
모델들이 쇼장을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내리고, 창문 배경의 난간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장면은 기차 플랫폼이라는 공간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했다. 여행에서 중요한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시계가 달린 목걸이는 도착과 떠남이 이루어지는 기차역에서 흘러가는 순간을 각인시키기도 했다. 단순한 패션쇼를 넘어 ‘여행’이라는 경험을 하나의 감각적 서사로 풀어낸 루이 비통의 새로운 여정. 루이 비통 하우스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에서 펼쳐진 이 서사는 우리가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순간의 감정을 패션으로 기록했다.
Floating in Fantasy
조나단 앤더슨이 꿈꾸는 환상은 패션이 된다.
조나단 앤더슨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복합적인 예술과 문화, 그리고 그의 추억이 투영된 ‘스크랩북’이라는 콘셉트로 선보인 로에베 2025 F/W 컬렉션. 그에게 ‘스크랩북’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억의 파편을 자신의 감각으로 재조합하고, 때로는 왜곡하고, 비틀면서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 파리의 유서 깊은 18세기 건축물 오텔 드 메종에서 열린 프레젠테이션은 마치 그의 창조적 상상력이 흐르는 공간 속을 유영하는 듯했다.
로에베는 오래전부터 광범위한 예술적 스펙트럼을 컬렉션에 융화시켰다. 이번엔 독일의 화가이자 조형가 요제프 알베르스,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텍스타일 디자이너 아니 알베르스에서 영향받은 룩을 새롭게 공개했다. 요제프 알베르스가 색채의 대비와 조화를 탐구하며 사각형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확장한 ‘Homage to the Square’ 시리즈는 로에베의 아이코닉 아이템인 퍼즐 백, 플라멩코 클러치, 아마조나 백 등에 적용되어 한층 생동감 넘치는 형태를 이끌어냈다. 아니 알베르스의 직조 기법과 예술적인 그래픽 질감에서 영감받은 디자인 역시 볼륨감 있는 코트와 스커트에 뚜렷이 보이며, 패브릭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실험적 접근을 선도했다.
조나단 앤더슨이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시각적 착시 기법, 트롱프뢰유는 이번 시즌 한층 정교하게 구현됐다. 과감히 왜곡하고 볼륨을 극대화한 실루엣과 건축적인 구조를 띤 룩들은 가죽을 절개해 길게 늘어뜨리고, 하이브리드 텍스타일을 조합하는 방법으로 독창적인 조형미를 개척했다. 이러한 접근은 유기적인 실루엣을 창조하며, 남성과 여성 컬렉션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조화로운 형태로 융합되었다. 이번 프레젠테이션은 브랜드의 장인정신이 깃든 공방의 세계를 엿보고 브랜드의 아트 컬렉션을 경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로에베가 쌓아온 예술적 유산과 기술적 혁신이 맞닿으며,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히 다지는 의미 있는 무대였다.
Balenciaga’s Realism
사조를 반영한 뎀나의 현시대 옷장.
뎀나의 마음에 어떤 바람이 분 걸까. 발렌시아가의 2025 겨울 컬렉션은 과거 그가 탐닉했던, 때로는 과장되고 축소된 극단적인 실루엣을 한층 정제된 모습으로 다듬었다. 이번 컬렉션은 ‘스탠다드’에 대한 개념을 다시 설정하고, 이를 재해석한 결과다. 기성복을 기반으로 하되 익숙한 형태에 미묘한 뒤틀림을 가미해 보다 편한 룩을 탄생시켰다. ‘STANDARD’라 적힌 티셔츠와 트랙 팬츠는 이러한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쇼는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 같은 공간에서 펼쳐졌다. 모든 이가 동등한 시선에서 컬렉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좌석의 경계는 허물었고, 비즈니스맨을 연상시키는 룩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블랙 셋업, 디스트로이드 디테일의 수트 재킷, 서류 가방을 손에 쥔 채 바쁜 걸음을 옮기는 모델, 재킷 없이 화이트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장미 한 송이를 무심하게 쥔 모습까지. 현대인의 출퇴근길을 은유적으로 풀어낸 연출이었다. 순간순간 일에 쫓기듯 이동하는 모델들의 모습에서도 뎀나가 고심 끝에 찾아낸 완벽한 비율을 적용한 아이템들이 돋보였다.
하지만 그가 누구나 생각하는 ‘스탠다드’에 머물 리 없다. 뎀나는 이번에도 익숙한 것을 뒤틀고, 전복하는 방식으로 그만의 세상을 구현했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체된 패턴과 재구성된 디테일이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트렌치코트의 단추는 일부러 부러뜨렸고, 캐시미어 코트는 스카프를 연결해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을 완성했다. 단단하게 세운 메디치 칼라 니트, 코르셋처럼 허리를 조여 구조적인 형태를 강조한 패딩 등 기존의 실루엣을 조형적으로 변주하며 뎀나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았다. 이번 시즌 역시 스트리트 감성을 더한 룩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 중심에는 푸마와의 협업이 자리했다. 푸마의 아이코닉한 스피드캣 스니커즈는 발렌시아가의 거친 디테일을 결합해 한층 강렬하고 날카로운 인상으로 재해석됐다. 푸마와 협업한 트랙 수트를 걸치고 금메달을 목에 건 모델들은 마치 이 시대의 승자처럼 보이기도 했고. 이제 와서 돌아보니 메달의 의미는 발렌시아가에서 마지막인 뎀나가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스스로에게 건네는 훈장이 아니었을까. 뎀나는 이번 컬렉션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옷의 개념을 비틀고, 패션이 어떻게 현실과 조우하며 새롭게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Own Yourself
맥퀸이 빛어낸 댄디즘의 전위적 변주.
맥퀸의 2025 F/W 컬렉션은 19세기 초반을 풍미한 댄디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하나의 철학적 선언으로 승화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션 맥기르는 댄디즘을 단순한 패션 스타일이 아닌, 개인의 태도와 정체성을 탐구하는 유희적이면서도 도발적인 표현 방식으로 바라봤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기존의 틀을 깨부수는 미학적 제스처였다. 션 맥기르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양한 예술가에게 영감받아 컬렉션을 완성했다.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에서 비롯된 해바라기 디테일, 그 시대의 여성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무대와 캔버스 위에 표현한 퍼포머 베스타 틸리와 로메인 브룩스의 정신이 반영된 젠더리스 디자인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빅토리아 고딕 양식이 스며든 쇼장은 우리를 런던의 밤으로 이끌었고, 그 안에서 션 맥기르의 반항적인 감성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풍에서 착안한 좁은 어깨 실루엣은 더욱 날렵하게 솟았고, 어둠 속에서도 강렬하게 빛나는 크리스털 마스크는 진취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하이테크 기능성 원단과 섬세하게 세공된 주얼리 장식이 충돌하면서도 유기적인 균형을 이룬 것이 그의 퇴폐적이면서도 파격적인 미적 기준을 세공했다. 이로써 알렉산더 맥퀸이 던진 메시지는 더욱 선명해졌다. 고대 세계의 문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지만, 션 맥기르의 시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너 자신이 되어라. ’ 이번 쇼는 마치 살아 숨 쉬는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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