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Day-Date
이태형 / 패션 브랜드 ‘이얼즈어고’ 대표
2019년 구입한 1990년식 데이-데이트. ‘골프 레전드’ 잭 니클라우스가 찬 모습을 보고 곧장 찾아 나섰다. 한 가지 후회되는 점은 있다. 이 시계를 사려고 갖고 있던 ‘도미노 에어킹’을 팔았다. 도미노 피자에서 목표 매출 달성한 직원에게 선물한 시계인데, 그걸 판 게 지금도 한이다. 롤렉스는 중학생 때부터 갖고 싶었다. 그 무렵 친구들 사이에서 짝퉁 롤렉스 차는 게 유행이었다. 청계천에서 모델명도 없는 가짜 롤렉스를 사며 다짐했다. 서른 살이 되면 롤렉스를 사야지.
첫 롤렉스는 서른한 살에 회사 퇴직금으로 구입한 서브마리너. 지금은 팔고 없다. 나는 시계를 찰 때 시간을 맞추지 않는다. 내게는 그저 장난감이자 액세서리다. 주말이면 시계를 책상 위에 펼쳐두고 광내며 만지작거리는 게 소소한 취미다. 이 시계를 처음 살 무렵에는 어깨에 한창 힘이 들어갔다. 회사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고, 롤렉스를 하나둘 모으면서, 나도 모르게 시건방을 떨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 시계를 보면서 지난날을 반성한다. 내게 신형 롤렉스는 과한 면이 있다. 사이즈도 화려함도. 롤렉스는 빛이 바랠수록 ‘진짜’ 빛을 발한다. ‘부의 상징’이 바랠수록 더 매력적인 시계. 롤렉스는 그런 시계다.
1970’s Submariner Date
고훈철 / 포토그래퍼
10년 전, 이탈리아 리미니의 빈티지 롤렉스 전문점에서 구입한 시계. 당시 나는 사진집 제작을 위해 이탈리아 멋쟁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때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서브마리너를 차고 있었다. 롤렉스를 차야 멋쟁이가 되는 건 아니지만, 멋쟁이들은 모두 서브마리너를 찼다. 내 눈에 썩 예쁜 시계는 아니었지만, 그게 멋인 줄 알고 따라 샀다. 서브마리너는 희한한 면이 있다. 캐시미어 수트에도, 수영복 차림에도 곧잘 어울리니까. 직접 차보고 나서야 알았다. 서브마리너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가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이 시계는 1997년 싱가포르에서 처음 판매됐다고 한다. 그 무렵 제주도에 살던 우리 집은 IMF로 사정이 어려웠다. 그때 누군가는 싱가포르에서 롤렉스를 사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 시계가 돌고 돌아 제주 바다에서 수영하며 놀던 초등학교 4학년짜리에게 왔구나. 그런 생각이 이 시계를 더 특별하게 한다. 롤렉스의 단점은 하나다. 가격이 비싸다. 시계를 차고 외국에 나갈 때마다 왼쪽 손목을 자주 쳐다보게 된다. 비싸서 특별한 시계지만, 가격이 낮았다면 더 마음 편히 애정을 쏟을 텐데. 아이러니한 마음이 드는 시계다.
2002 Yacht-Master
“가장 멋있는 롤렉스는 ‘스크래치 많은 롤렉스’라고 생각한다. 기껏 어렵게 손에 넣었는데, 모시듯 찬다면 의미가 있을까?”
박종진 / ‘블링크 안경’ 브랜딩 매니저
2020년, 생애 처음 구입한 롤렉스는 2002년식 요트-마스터. 사실 충동구매한 시계다. 롤렉스를 사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지만, 구경이나 할 겸 들른 빈티지 워치 전문점 ‘노스타임’에서 바로 구입해버렸다. 특별한 점은 소재다. 베젤과 다이얼은 스테인리스 스틸이 아닌 플래티넘으로 만들었다. 작은 사이즈도 마음에 들었다. 현행 요트-마스터는 37mm, 40mm, 42mm인데, 이 모델은 35mm다. 요트-마스터는 롤렉스의 주력 모델이 아니다. 작은 사이즈는 더더욱. 그 덕분에 ‘롤렉스’라는 주류 안에서 비주류를 즐긴다는 쾌감이 있다.
롤렉스의 가장 큰 장점은 ‘환급성’이지만, 내게는 되팔 계획이 없으니 무의미하다. 가장 멋있는 롤렉스는 ‘스크래치 많은 롤렉스’라고 생각한다. 기껏 어렵게 손에 넣었는데, 모시듯 찬다면 의미가 있을까? 이 시계를 차고 가장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도 바다에 들어갔을 때다. 시계는 자동차와 닮았다. 직접 살을 맞대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그 매력을 알 수 있으니까. 좋은 시계는 잘 맞춘 양복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그럼에도 하나쯤은 꼭 있어야 한다. 실용성을 떠나,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 한편이 든든해지는 물건이다.
1970’s Oyster Perpetual Date
김용현 /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캐리마켓’ 에디터팀 팀장
이 시계의 첫 주인은 내 아버지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손주를 안겨줬으니 고맙다’는 뜻으로 선물하신 모양이다. 내가 시계를 물려받은 지는 10년 정도 됐다. 내가 당시의 아버지 나이가 됐을 무렵, 아버지께서 건네주셨다. ‘너도 얼른 결혼해서 손주 안겨다오’ 하는 뜻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서먹한 부자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는, 몇 안 되는 물건이다.
롤렉스에 대한 동경은 없었다. 내게 롤렉스는 ‘아버지가 차는 시계’였고, 롤렉스를 갖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전 롤렉스가 내 손에 들어왔다. 시계는 남자들이 눈치 안 보고 찰 수 있는 액세서리다. 어느 날 내가 귀걸이와 목걸이를 잔뜩 두르고 출근한다면 사람들이 분명 이상하게 볼 거다. 반면 시계는 제멋대로 차도 눈치 볼 일이 없다. 그게 롤렉스든, 스와치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시계는 '매장에서 살 수 있는 시계’다. 매장에서 시계 사는 게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요즘 롤렉스는 내게 썩 좋은 시계가 아니다. 지금까지 서브마리너를 포함해 여러 시계를 샀지만 다 팔고 결국 이 시계 하나 남았다. 롤렉스는 없어도 좋지만, ‘죽어도 못 파는 시계’ 하나쯤은 만들어보길.
2000’s Submariner
“서브마리너를 차면서 생각한다. 좋은 시계에 정답은 없지만, 모범답안이 있다면 그게 서브마리너일 거라고.”
최진수 / ‘키스 서울’ 매니저
애플 워치 하나면 충분하지. 서브마리너를 갖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혹여 언젠가 롤렉스를 사더라도 서브마리너는 절대 안 살 거라 생각했다. 주변에 너무 많으니까. 지금 차고 있는 서브마리너는 1년 전 친구에게서 샀다. 사실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었는데, ‘너 이거 살래?’ 하는 친구의 권유에 속는 셈 치고 손목에 올려봤다. 막상 차보니 ‘왜 다들 서브마리너 차는지 알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부담은 없었다. 별로면 다시 팔면 되니까. 지금은 육아를 전담하는 주말 제외하고 평일 내내 이 시계를 찬다. 볼수록 예쁜 시계다.
좋은 시계는 이야깃거리가 되어준다. 서브마리너를 차고 있으면 전 세계 누구와도 스몰토크가 수월해진다. 지구에서 유명한 시계 중 하나니까. 이렇다 할 설득 없이 누구나 갖고 싶게 하는 것. 그저 ‘잘 만든 디자인’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한다. 서브마리너는 비싸고 구하기 힘든 걸로 유명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더 열망하고, 다른 누군가는 기피한다. 어떤 물건이든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 전에 경험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서브마리너를 차면서 생각한다. 좋은 시계에 정답은 없지만, 모범답안이 있다면 그게 서브마리너일 거라고.
1977 Datejust
“내게 롤렉스는 트로피다. 우리가 운동선수나 영화배우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차광호 / 주얼리 브랜드 ‘불레또’ 대표
어릴 때부터 ‘남자라면 롤렉스 하나쯤은 있어야지’ 하는 생각을 당연하게 해왔다. 콕 집어 데이트저스트를 갖고 싶었던 건 아니다. 기왕 살 거면 더 비싸고 화려한 데이토나를 사고 싶었지만, 막상 손목에 올려보니 어울리지 않았다. 내게 가장 잘 맞는 시계 사이즈가 36mm라는 결론을 내렸고, 자연스레 클래식 라인으로 눈을 돌렸다. 시계는 2016년 예지동 시계 골목에서 구입했다. 새 모델을 살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옷도 신발도 빈티지가 아니면 입지 못하는 병이 있다. 이 시계의 묘미는 다이얼이다. 요즘 롤렉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짙은 그레이색을 적용했다.
내게 롤렉스는 트로피다. 우리가 운동선수나 영화배우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몰라줘도 스스로 격려하며 트로피를 건네줘야 하는 때도 필요하다. 물론 이 시계는 내게 엄청난 사치였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묵묵히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잘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 시계와 똑같이 생긴 팔찌를 만든 적 있다. 그때 데이트저스트가 얼마나 잘 만든 시계인지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사고 싶은 롤렉스가 하나 더 있다. 1983년식 GMT-마스터. 나는 1983년생이고, 처음 선물받아 경험해본 롤렉스가 ‘짝퉁’ GMT-마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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