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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경의 힘

심은경은 이제 갓 서른을 넘겼지만,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연기자로 살아왔다. 그런 그는 한때 영화가 세상의 전부라 믿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 깨달음이 심은경의 힘이다. 배우 심은경과 나눈 영화, 그리고 인생 이야기.

UpdatedOn January 02, 2025

레더 재킷·스커트 모두 베르사체 제품.

퍼 재킷 스포츠막스, 니트 톱 펜디, 팬츠 마이클 코어스, 벨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도쿄에서 생활하고 계시죠. ‘심은경 추천’ 도쿄 플레이스 부탁드립니다.
저는 메구로에서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데요. 요즘에는 빈티지에 빠져서 고엔지라는 동네에 자주 갑니다. 빈티지 숍 ‘사파리’가 있어요. 1~5호점까지 있는데, 저는 유로 빈티지를 소개하는 5호점에 가장 자주 가요. 아메리칸 빈티지 좋아하시면 1호점을 추천드리고요.

도쿄에서 심은경을 만나고 싶다면 사파리 5호점이 가장 확률이 높겠네요.
그런데 아마 알아보지 못하실 거예요. 맨날 혼자 벙거지 눌러 쓰고 가서.(웃음)

일본에서의 첫 작품이 2019년 <신문기자>죠. 아직도 많은 국내 팬들이 일본 진출 계기를 궁금해하더라고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고등학생 때부터 했으니까요. 뉴욕에서 고등학교 다니면서 일본 문화에 빠졌거든요. 그 자세한 이야기는 <아레나> 11월호에 있습니다. 이후로도 인터뷰할 때마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했어요. 스스로 하는 다짐 같은 거였겠죠. 그러다 2018년에 현재 소속된 유마니테와 계약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일하게 됐어요.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과 생활을 해보는 건 또 다른 문제였을 텐데요.
처음에는 6개월짜리 어학연수였어요. 2018년 여름이었는데요. 낯선 나라에서 자리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살아보는 거잖아요. 제가 겁이 많은 성격이라 한참 고민하다 얼떨결에 갔는데 지금까지 도쿄, 서울을 오가며 살고 있네요.

한국과 일본의 촬영 현장 차이점도 있던가요? 이를테면 밥차라든가.
밥차 없어요. 일본은 도시락 먹습니다. 한 번씩 배우나 제작사에서 전문 케이터링 준비를 해주시는 경우는 있는데 밥차는 없었어요. 일본은 한국보다 야외 취사가 까다로운 걸로 알고 있어요. 또 다른 점은 촬영 기간. 제 경험만 놓고 보면 일본 작품 촬영 기간은 훨씬 짧았어요. 일본이 더 빨리 찍는다기보다, 영화 규모가 다양해서 생기는 차이 같아요. 일본은 예산이 큰 영화부터 독립 영화까지 정말 다양하게 만들거든요. 작년에만 영화를 600편 가까이 만들었대요. 그만큼 독립 영화 시장이 발달해서 촬영 기간이 짧은 작품 비율이 높아진 모양이에요.

한국에서는 보통 영화 1편당 6개월 정도 걸린다고 들었는데, 일본은 얼마나 걸리나요?
제가 출연한 작품 중에 <블루 아워>가 있는데요. 그 영화는 2주 만에 촬영 마쳤어요. <신문기자>도 20일 정도? 한 달이 채 안 걸렸죠.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연기하면 불편한 점도 있지만, 되려 더 자유롭게 느껴질 것도 같습니다.
전 대체로 어려웠어요. 애초에 무언가를 말로써 표현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처음에는 겁도 없이 일본에서 연기해보겠다고 나섰는데 갈수록 어려워요. 작품 들어갈 때마다 일본어 선생님 모시고 대사 연습하고 있어요.

아직 사투리 연기는 해본 적 없으시죠?
국내에서는 <써니>로 사투리 연기를 해봤는데, 일본에서는 아직 없어요. 일본은 사투리 종류가 정말 많더라고요. 일본어를 도쿄에서 배워서 사투리 억양은 잘 모르거든요. 언젠가 사투리로 연기하게 되면 지금보다 몇 배로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재킷 페라가모, 레더 장갑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레더 코트·니트 톱·팬츠 모두 구찌, 안경 젠틀몬스터 제품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고민했어요.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연기 방식을 바꿔야겠다’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내린 결론 중 하나가 연습이었어요.”

2020년에 영화 <신문기자>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어요. 한국 배우 최초로요. 격려로 느껴졌을 수도 있고, 그간의 커리어가 인정받았다는 기분도 들었을 것 같아요. 어땠어요?
수상 자체도 기뻤지만, 더 기뻤던 점이 있어요. 야쿠쇼 코지가 제 이름을 불러줬다는 것. 국내에서는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로 익숙하실 텐데요. 저한테는 정말 대배우거든요. 야쿠쇼 상의 <큐어> <갈증>을 통해서 일본 영화를 접한 세대니까요.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배우가 제 이름을 호명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었어요.

실제로 시상식 영상 보면 놀란 걸 넘어서 충격받은 것처럼 보였어요.
진짜예요. 영상 보시면 무대로 나가서 상을 받아야 하는데 못 나가고 있어요. 사실 순간적으로 경련이 왔어요. 팔이 펴진 채로 굳었거든요. 그만큼 놀랐어요. 수상 결과는 진짜 미리 알려주지 않나 보네요. 그렇더라고요. 시상식 끝나고 제가 회사 동료들한테 그랬어요. 다들 미리 알고 있었는데 나한테 말 안 해준 거 아니냐. 그래서 나 수상 소감 준비도 못 하고 울다 왔다. 그렇게 농담식으로 화를 낸 기억이 있어요. 사실 <신문기자>가 제 예상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많은 걸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감사하다’ 정도로만 생각했던 터라, 후보 선정 소식 듣고도 처음에는 연락이 잘못 온 건 줄 알았어요.

수상 이후에 바뀐 점이 있을까요?
바뀌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사실 상 받으면서도 그 점이 가장 두려웠어요. 내가 혹여나 노력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도태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잘 생각하지 않아요.

상 많이 받는 분들은 트로피 어디다 둘까 궁금하더라고요.
아카데미 트로피는 일본 집 서재에 있어요. 케이스도 같이 받았는데, 케이스 열지도 않고 그대로 보관 중입니다.

검색해보니 데뷔작이 드라마 <대장금>이더라고요.
이 질문 꼭 받고 싶었는데 너무 감사해요.(웃음) 이참에 꼭 정정하고 싶었거든요. 저는 <대장금>에서 특정 역할을 맡은 적이 없어요. 사극이니까 궁녀들 많이 나오잖아요. 그중 생각시 한 명으로 나왔어요. 데뷔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그럼 정확한 데뷔작은 어떻게 되나요?
제 데뷔작은 드라마 <장길산>이에요. 처음 오디션 보고 배역을 맡아 연기한 작품이 2004년작 <장길산>이었어요.

<장길산>을 기준으로 잡아도 연기한 지 20년이나 됐네요. 그간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변환점이 되어준 작품들이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황진이>. 연기라는 게 결코 쉽지 않구나. 연기를 대하는 마음과 자세를 바꿔야겠구나 처음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고요. 두 번째는 10대 때 만난 <써니>. 배우 심은경을 대중에게 처음 알려준 작품이에요. 영화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처음 알게 됐죠. 영화도 특별해요. 한국에서 필름으로 촬영한 거의 마지막 세대 작품이거든요. 강형철 작품님이 필름 촬영을 고수하셨어요. 이 점도 제게는 특별해요. 세 번째는 <수상한 그녀>. 첫 주연작이에요. 극장에서 정말 많은 분들이 봐주신 영화고,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작품이기도 해요. 성인 연기자로서 발돋움을 하게 해준 작품이고요. 마지막으로는 최근 개봉한 <더 킬러스>를 꼽고 싶어요. 배우로 많은 현장을 다니면서 ‘언젠가는 나도 영화를 위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 꿈을 실현시켜준 작품입니다. 제가 올해 서른인데요. 다시금 <황진이> 때로 돌아가서 또 한 번 연기에 대해, 그리고 저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게 해준 작품입니다.

말씀하신 <더 킬러스>에서는 1인 4역을 맡았잖아요. 작품을 보는 내내 ‘심은경이 네 번 나온다’보다 ‘네 배우가 나온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만큼 준비하는 과정도 남달랐을 것 같아요.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고민했어요.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연기 방식을 바꿔야겠다’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내린 결론 중 하나가 연습이었어요. 예전에는 연습을 너무 많이 하면 현장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연기를 할 것 같았거든요. 아니더라고요. 특히 <더 킬러스>에서 이명세 감독님이 연출하신 <무성 영화>는 촬영 전 반드시 일주일 정도 리허설을 했거든요. 그 경험이 저한테는 정말 값진 배움이었어요.

실제로 <무성 영화> 보는 동안 ‘도대체 얼마나 연습했을까’ 싶은 액션들이 계속 나오더라고요.
촬영 전부터 감독님이 ‘리허설 일주일은 필수’를 조건으로 내거셨어요. 그 현장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간 저 나름대로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부족했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동안 스스로 뭔가가 부족한데 그게 뭔지, 그걸 어떻게 메워야 할지 고민이었거든요. 그 고민을 해결해준 작품이에요.

코트·스카프 모두 파비아나 필리피, 팬츠 레이블리스, 시계 빈티지 까르띠에 by 빈티크, 벨트·슬리브리스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코트 맥퀸 by 션 맥기르, 셔츠·슬리브리스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꼭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있나요?
딴짓 안 하려고 해요. 놀러 다니지 않는 거죠. 촬영 기간에도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고 쇼핑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짬을 내서 놀고 있으면 불안해지더라고요.

시험 기간에 놀러 가는 느낌 같은 거네요.
학교 다닐 때는 시험 기간에 많이 놀러 다녔거든요? 그런데 성인이 되고 연기를 직업으로 받아들이면서 조금 달라졌어요. 촬영 앞두고 여가 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불안해요. 촬영 기간에는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고민되더라고요. 그럼 저희 엄마가 보다 못해 ‘그냥 보고 와’ 하세요. 그제야 보러 가죠.(웃음)

평소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어렸을 때는 편식이 심했다고 해야 할까요?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영화를 가려 봤어요. 그래서 정말 유명한 작품들 중에 아직 못 본 영화도 많고요. 지금은 개봉하는 작품들 전부 웬만하면 극장에서 봐요. 재개봉 작품도요. 최근에는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가 인상적이었어요.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도 너무 좋았고요. 정성일 평론가님이 이 영화 두고 이렇게 쓰셨더라고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영화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저 못 울었거든요. ‘나 못 울었는데 어떡하지?’ 싶었어요.(웃음) 보는 내내 이 영화야말로 ‘영화를 위한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태까지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잖아요. 그중 인간 심은경과 제일 닮은 친구는 누구예요?
음··· <써니>의 나미? 나미가 제일 비슷한 것 같아요.혈당 떨어져서 빙의했을 때 빼고. 숫기도 없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 부끄러워하고, 낯가림 심하고.

그럼 반대로 가장 닮고 싶은 캐릭터를 꼽자면요?
<걷기왕>에 나온 이만복! 만복이는 예민한 구석이 없는 아이거든요. 왕복 4시간 거리에 있는 학교를 매일 걸어 다니면서도 그냥 만족하는 친구예요. 어느 날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학교 경보팀에 들어가요. 살면서 처음으로 욕심이라는 게 생기고, ‘내가 더 잘하지 않으면’이라는 순간을 맞닥뜨려요. 그런 만복이가 지닌 씩씩함과 무던함을 가장 닮고 싶어요.

‘심은경’을 검색하면 이름 옆에 ‘연기차력쇼’가 붙더라고요. 그만큼 연기를 잘하셔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연기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나요?
저는 절대 스스로 연기 잘한다고 생각 안 해요. 다만 이런 노력을 한다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어요. 최근에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조금 달라졌어요. 어렸을 때는 그저 무모하게 몸으로 부딪히고 나 자신을 던지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제는 대본을 보면서 ‘이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어쩌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야만 했을까’ 살펴봐요.

배우는 상대방을 잘 관찰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네요.
맞아요. 나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정말 중요해요. 모든 대사에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사’ ‘좋은 연기’에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그 인물을 이해해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연출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죠. 같은 인물, 같은 상황도 배우와 연출자가 이해하는 게 다를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어떤 배우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앞서 말씀드린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예술가 미할 바신스키는 왜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걸작이 영화가 아닌 인생이 되리라 판단했을까?’ 저는 한동안 영화가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배우들이 한 번씩 그런 말 하잖아요. “이 작품이 여러분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요. 어렸을 때는 그런 말을 참 맹랑하게 잘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던 거죠.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보면서 ‘인생보다 더 중요한 건 없구나’ 느꼈어요. 그래서 결론. 언젠가 저도 <클로즈 유어 아이즈> 같은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배우, 또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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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CREDIT INFO

Editor 주현욱
Photographer 홍준형
Stylist 박선용
Hair 박내주(빗앤붓)
Make-up 김민지(빗앤붓)

2025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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