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삼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초등학교 3학년 조카와 가끔 그림을 그리며 논다. 30년 전으로 돌아간 듯, 집을 그릴 땐 삼각형으로 지붕을 짓고, 직사각형으로 벽을 세우며, 정사각형과 십자가 형태로 창을 낸다. 익숙하고 편안하다. 사람을 그릴 때면 동그란 얼굴과 로봇 같은 몸통은 필수. 거기에 조카의 아빠, 그러니까 매형을 표현할 땐 얼굴에 반듯한 선으로 안경을 그리고 수많은 산이 뾰족한 머리를 그리며 나름의 디테일로 손목시계를 그려 넣는다. 그런데 손목 위 시계가 사각형이라면? 인지 오류다. 손목시계는 동그랗게 그리는 게 정석인데, 아직 특정 명칭이 없는 이 세대는 시계를 네모로 그리는 건가? 보아하니 매형이 네모난 애플 워치를 차고 다녀서다. 생경하다. 시계 기자로 10년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손목시계를 네모로 그린 적이 없다.
시계 케이스 디자인은 렉탱귤러, 토노, 쿠션, 육각형, 팔각형 등 다양한데, 매번 선 한 번 그어 원으로 그린다. 사실 원도 타원형, 형태가 뭉개진 원 등 다양한데 원주율 3.14를 적용한 원만 고집한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조카가 무심히 그린 사각형 시계처럼, 손목시계 태초의 모습 역시 사각형이라는 점이다.
사각 시계의 시작
손목시계의 역사는 18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식어가 필요 없는 브랜드, 파텍 필립은 헝가리 귀족인 코스코비치 백작부인(Countess Koscowicz)을 위해 최초의 손목시계를 만들었다. (항상 최초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여기서는 기네스 공식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한다.) 이 손목시계는 직사각 모양이었다. 여성의 보석 장신구 용도로 제작됐는데, 시간을 확인하는 용도가 아닌 스타일을 보여주는 액세서리에 더 가까운 셈이다.
당시 손목시계는 여성에게 한정된 장신구였고, 남성들은 여전히 포켓 워치를 선호했다. 손목시계가 손목 위 패션 아이템에 불과했기에 가능했던 일일까. 당시 시계를 보면 형태와 디자인이 도전과 실험을 거쳐 오히려 더 과감하고 다양하다. 각진 형태의 손목시계는 장식성과 독특함을 살리기 쉬웠고, 이로 인해 다양한 귀족층 여성들이 손목시계를 착용하면서 액세서리로서 인기를 끌었다. 그렇기에 20세기 초반이 되기 전까지 남성이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본격적인 사각 시계의 출발점, 까르띠에 산토스
손목시계가 남성에게 기능적 가치를 갖기 시작한 계기는 1904년 까르띠에 산토스가 등장하면서부터다. 프랑스의 시계 디자이너 루이 까르띠에는 당시 비행사였던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에게서 한 가지 의뢰를 받았다. 비행 중 포켓 워치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산토스-뒤몽은 쉽게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탄생한 시계가 바로 오늘날까지 브랜드의 중요한 기둥으로 활약하는 산토스 워치다. 이 시계는 최초로 상업화된 남성용 손목시계로 불린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사각형 케이스로 창조됐다.
까르띠에 산토스의 성공은 본격적으로 남성이 손목시계를 착용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후 손목시계가 남성에게 중요한 물건으로 자리매김한 사건이기도 하다. 손목시계가 이제 시간 관리의 편리함과 실용성을 제공하는 도구를 넘어 개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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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주류의 등장
오늘날, 대부분의 시계가 둥근 형태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으려면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전쟁에서 손목시계는 병사에게 필수적인 장비였다. 정확한 시간에 맞춰 포탄을 쏘고, 비행을 하고 임무를 다해야 했기에 그 아찔한 순간에 빠르게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형태가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원형 케이스였다.
원형 케이스가 선택된 이유는 단순하다. 사격형 케이스보다 시곗바늘의 움직임과 시간을 읽기 쉬우니까. 둥근 다이얼은 회전하는 시곗바늘의 방향을 사각형 케이스보다 직관적으로 파악하기에 이상적이다. 사각형 케이스의 핸즈는 케이스 각 모서리 끝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원형 케이스의 핸즈는 어느 방향, 구석이든 공평하고 동일하게 훑고 지나간다. 또한 둥근 형태의 시계 케이스는 방수와 충격 흡수에 유리해 더욱 안정적인 구조를 지닌다. 이러한 실용성과 가독성 덕분에 둥근 손목시계가 점점 표준으로 인정받게 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손목시계의 보편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됐다. 특히 전쟁 후 대중이 일상에서 손목시계를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그 형태가 빠르게 확산됐다.
아르데코와 클래식, 사각 시계의 부활
사각 케이스 시계는 주류에서 벗어났지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 멋을 잃지 않았다.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받은 것이다. 1920~30년대에 유행한 아르데코 스타일이 시계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며, 각지고 대칭적인 디자인의 사각형 시계들이 다시 등장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오늘날까지 사각형 시계의 대표로 불리는 까르띠에 탱크와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다. 까르띠에 탱크는 전차(탱크)에서 영감을 받은 직선적이고 간결한 디자인으로, 사각형 케이스와 그 속에 부드러운 라인이 돋보이는 시계다.
이처럼 단순명료한 직사각형 케이스에서 오는 우아한 멋은 클래식한 손목시계의 상징이 됐다. 폴로 경기 중에 탄생한 예거 르쿨트르 리베르소는 또 어떤가. 사각형 케이스를 이용해 케이스를 회전시키며 글라스를 보호하는, 기능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디자인으로 탄생했다. 리베르소 역시 클래식하면서도 실용적인 기능을 갖춘 시계로 오늘날 브랜드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 됐다.
사각 시계의 붐은 온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했던가. 사각 케이스 시계 붐이 다시 일고 있다. 이 열풍에 불을 지핀 브랜드는 앞서 최초의 액세서리형 손목시계를 선보였던 파텍 필립이다. 25년 만에 선보인 파텍 필립의 새로운 컬렉션, 큐비투스(Cubitus)는 최근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시계 애호가들에겐 스티브 잡스가 최초의 아이폰을 공개했을 때와 같은 충격적인 순간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큐비투스는 네 모서리가 각져 팔각형에 가까운 형태지만, 전체적으로 사각형이다. 이를 두고 애호가들은 “디자인이 어색하다” “다른 시계가 연상된다” 혹은 “노틸러스, 아쿠아넛을 이을 또 하나의 아이콘이다” 같은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고, SNS에는 수많은 밈(Meme)이 등장했다.
하지만 요즘 말로 ‘파텍 필립 is 뭔들’. 평가와 상관없이 애호가들은 이미 이 사각형 케이스의 시계를 손목에 올리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다. 파텍 필립 CEO 티에리 스턴은 큐비투스를 공개할 때 “우리의 목표는 오랜 고객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젊은 고객층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 목표를 위해 우리는 아쿠아넛과 노틸러스를 결합한 네모난 시계를 탄생시켰다”라고 이야기했다.새로운 젊은 고객층이 이 시계를 구하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지만 이 사실은 차치하고, 중요한 결론은 트렌디한 젊은 고객을 겨냥하기 위해 사각 케이스 시계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큐비투스의 등장은 단순히 과거의 클래식 디자인을 재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사각형 디자인이 지닌 고전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혁신을 동시에 보여준 결정적인 사례니까.
그리고 큐비투스는 사각 케이스 시계만이 가능한 기능성과 예술성을 아우른 현대적 모델의 표상이다. 이 같은 흐름에는 오데마 피게도 있다. 브랜드는 최근 1960년대 오데마 피게 매뉴팩처가 브루털리즘 건축 사조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비대칭 사각형 케이스 시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델 [리]마스터 셀프와인딩을 선보였다. 사각 케이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웅장하고 건축적인 형태. 이토록 색다른 디자인의 등장은 사각 케이스 시계가 트렌드로 자리 잡는 데 명백한 힘을 실어준다. 시계 트렌드를 주도하는 굵직한 브랜드는 물론,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가격대의 브랜드에서도 최근 사각 케이스 시계를 하나둘 꺼내고 있다. 형태가 어찌 됐든 비교적 트렌드가 잔잔한 시계 시장에서 손목 위에 다양한 형태의 시계를 올려볼 수 있다는 건 애호가로선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왕 색다른 형태의 손목시계를 찾는다면 지금은 누가 뭐래도 사각 케이스 시계의 차례가 왔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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