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데이 선물은 예비군 훈련 같은 것이다.
매번 최선을 다해 준비할 필요는 없지만,
무심코 잊은 채 지나친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 된다.”
“10년짜리 거래를 하나 했습니다.” 직장인 박희준은 요즘 보기 드문 애국자다. 그는 올해 만 33세의 나이로 학부형이 됐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을 시작할 무렵, 덜컥 아이가 생겼다. 이듬해 그는 2년간 교제해온 여자친구와 혼인신고를 했고 같은 해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최근 4년 동안 따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0년짜리 거래 때문이다. 인터뷰이를 잘못 찾아왔구나 생각하던 찰나, 그가 말을 이었다. “어느 날은 아내가 말하더라고요. 롤렉스 갖고 싶다고. 그래서 물었죠. 10년 치 기념일 선물을 합쳐서 롤렉스 사주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합의한 겁니다. 자잘한 거 여러 개 사느니, 큰 거 하나가 낫다고요.”
그렇다고 매년 크리스마스에 선물 비용이 안 드는 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크리스마스 주인공은 너와 나에서 아이로 바뀐다. “요즘은 선물 하나로 안 되더라고요.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따로 선물을 주거든요. 엄마, 아빠 선물도 따로고요.” 박희준은 기념일에 얼마만큼 의미를 덧붙이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이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1월 28일이다. 크리스마스와 결혼기념일이 그리 멀지 않으니, 한 번에 기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는 연말 선물 적정 예산으로 ‘30만~50만원’을 말했다. 기준은 일반 직장인 월급의 10%. “이것보다 예산이 낮으면 웬만해선 만족시키기 힘듭니다.”
고물가 시대인 점을 감안하면 아주 적지도, 아주 많지도 않은 숫자였다. 박희준이 생각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성공하는 법’은 간단하다. 물어보는 것.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선물을 주는 것만큼 낭비는 없다고 말했다. 물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선물을 하고 싶다면 10월부터 틈틈이 정보를 수집한다. ‘반지보다는 귀걸이’ ‘로즈 골드보다는 화이트 골드’ 식으로.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좋은 선물과 다르지 않다. 박희준은 좋은 선물이란 ‘상대방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어 하는 선물’이라고 답했다. “1억짜리 반지 사주면 좋겠죠. 그런데 육군사관학교 졸업 반지 같은 걸 사주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돈을 얼마를 쓰든 상대방이 원하는 걸 사줘야죠. 그러니까 항상 귀를 열고 긴장해야 됩니다. ‘이 사람이 이걸 기억하고 있었네?’ 생각이 들면 적어도 실망할 일은 없어요.” 박희준은 아직 혼례를 치르지 못한 ‘댕기머리’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이왕 쓸 거면 아끼지 마세요. 괜히 5만원, 10만원 아끼려다 더 큰 걸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것’은 무엇일까?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갔다고 쳐봅시다. 그럼 거기에 맞는 와인 마셔야죠. 맛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까지 가서 제일 싼 와인을 시킨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기로 해놓고 벌벌 떨면서 지갑 여는 것만큼 없어 보이는 게 없어요. 돈 쓰고 욕먹을 바에 애초에 안 가는 게 낫죠.” 박희준에게는 8년간의 결혼 생활로 확고한 신조가 생겼다. 돈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자. <더 글로리> 하도영(정성일) 대표가 할 법한 이야기다. 박희준이 건설사 대표만큼 돈을 벌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감당할 수만 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낼 겁니다. 남녀 사이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훨씬 많으니까요.”
내 돈 주고 사긴 아깝지만 누가 사주면 참 좋을 것
1999년생 벤 리(교포는 아니고 필명이다)는 팔로워 6.5만의 인스타그램 매거진 <슐튀르>를 운영 중이다. 그는 올해 5월 SNS를 통해 여자친구를 만났다. 여자친구는 세 살 어린 2002년생. 벤 리는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주며 “운이 좋았죠”라고 덧붙였다. 벤 리는 태평했다. 11월 중순이 되도록 크리스마스 선물은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다만 ‘신경 쓰긴 써야 할 텐데’ 생각할 뿐이다. 나름의 이유도 있다. 여자친구가 기념일을 챙기는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벤 리는 고정 수입이 있는 20대 중반 남성이 크리스마스에 쓸 수 있는 최대 예산으로 30만원을 불렀다. 이유가 궁금했다. “꼭 선물을 사지 않더라도 ‘근사한 하루’를 보내려면 최소 이 정도는 듭니다.” 그가 말한 30만원에는 와인 한 병을 포함한 저녁 식사, 꽃 한 다발, 케이크 가격이 포함된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건 대체로 있어야 되더라고요.” 벤 리의 여자친구는 케이크를 즐겨 먹진 않지만, 그럼에도 케이크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케이크는 사진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다만 그는 크기는 상관없지만 파리바게트 케이크는 피할 것을 권장했다.
벤 리는 ‘남자의 선물은 그 남자의 분신’이라고 믿는다. “선물에 귀천이 있겠습니까만, 신중할 필요는 있습니다. 선물은 그 남자를 대변하니까요. 로로피아나 코트 입은 남자가 올리브영에서 산 향수를 선물할 수도, 무신사 스탠더드 셔츠 입은 남자가 바이레도 보디 크림을 선물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선물 전후로 그 남자가 풍기는 뉘앙스는 완전히 다를 거예요.” 좋은 선물을 하는 것보다, 안 좋은 선물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20대 커플에게 주얼리 선물은 너무 무겁다고 말했다. 가격 면에서도 의미 면에서도. 반지를 주고받은 사이라면 왠지 먼 미래를 기약하는 듯한 부채감이 든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많이 비싼 보디 워시’를 추천했다. “향수는 뻔하잖아요. 최근에 알게 된 건데 10만원짜리 보디 워시가 있더라고요. 소모품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매일 사용하는 물건이고, 그만큼 선물한 사람도 자주 생각하게 되니까요. 써보고는 싶은데 내 돈 주고는 절대 사지 않을 물건이잖아요. 누가 마다하겠어요.”
선물을 주는 방법도 중요하다. 선물을 건네는 타이밍, 곁들이는 멘트에 따라 선물이 지니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벤 리는 노련한 경상도 남자가 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선물을 선물처럼 주는 건 별로예요. 느끼하잖아요. 저는 낮에 카페에서 주섬주섬 꺼내 주는 게 좋습니다. 멘트는 ‘크리스마스라서 샀다’ 정도만 하고요. 부끄러우니까요. 그런데 여자들은 남자가 부끄러워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상상하게 되잖아요. 이 사람이 용케 혼자 백화점까지 가서 물건 고르고 포장해서 여기까지 가져왔구나 하는 상상.” 벤 리는 나이대에 맞는 고민도 안고 있었다. “연인 중 누구도 자취를 하지 않는다면 선물 비용은 더 늘어납니다. 날도 추운데 하루 종일 카페, 식당만 다닐 수는 없거든요. 모텔을 가긴 애매하고, 호텔은 비싸고 예약도 잘 안 돼요.”
홀리데이 선물은 예비군 훈련 같은 것
서울에 사는 8년 차 직장인 황정필에게는 4년 전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 있다. ‘1억 베리의 사나이’. 현찰 1억원을 모아서 생긴 별명이다. 황정필은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외국계 대기업 재무팀에 입사했고, 패션에도 술에도 흥미가 없는 그는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그는 올해 서른두 살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었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현재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4년째 연애 중이다. 황정필은 그전에도 연애는 했지만, ‘연애다운 연애’는 지금 여자친구가 처음이라고 했다. 1억 베리의 사나이는 처음 사랑을 알려준 여인에게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까. 내심 기대됐다. “20만원. 너무 싸지도, 너무 비싸지도 않은 애매한 가격이죠. 그 애매함이 포인트입니다.”
황정필은 ‘좋은 선물’이라면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부담은 경제적 부담, 심적인 부담 모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는 연말이 다가오면 부담을 느낀다. “매년 11월 중순쯤 되면 여자친구가 말합니다. ‘헐, 벌써 11월이네? 조금만 있으면 크리스마스야!’ 그럼 옷장에서 긴 옷 꺼내듯 선물 리스트를 뒤져봅니다.” 그는 3년 전 여자친구에게 첫 크리스마스 선물로 니트 스웨터를 전했다. 그 후로 신발, 목걸이, 향수 등 평소 여자친구가 갖고 싶어 하던 선물을 했지만, 정작 여자친구가 가장 좋아한 건 따로 있었다고 말했다. “제 착각일 수도 있는데요. 편지를 가장 좋아했어요. 편지는 어떻게 써도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워하진 않아요. 무조건 편지 쓰세요. 정 못 쓰겠으면 유명한 시 구절이라도 쓰세요.”
황정필은 올해 백년가약을 맺기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반지를 알아보고 있다. 그는 내게 아는 브랜드가 있냐고 물었고, ‘불가리 비제로원’ ‘까르띠에 트리니티’ 등을 이야기하자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했다. ‘1억 베리의 사나이’라는 타이틀은 역시 속세와 가까우면 달성할 수 없는 타이틀이구나 싶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말은 쉽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다. 홀리데이 선물은 예비군 훈련 같은 것이다. 매번 최선을 다해 준비할 필요는 없지만, 무심코 잊은 채 지나친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 된다. 뭐든 선물할 거라면 제대로 준비하는 게 좋다. 말 한마디로도 천 냥 빚을 갚는다 했다. 잘 준비한 선물은 오죽할까. 모든 크리스마스 선물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실망스럽지는 않아야 된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실망은 이해가 아닌 오해에서 비롯된다. 고로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소중한 사람의 말을 잘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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