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해변이 있다니. 필리핀 보라카이 화이트 비치 앞에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건물 사이 좁은 길을 빠져나오자 나타난 해변은 이국적이라는 단어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좁은 골목이 세계를 나눈 경계 같았다.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은 풍경.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그것 외에는 적합한 말이 없는, 정말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졌다. 그리고 밀가루처럼 부드럽고 하얀 모래가 가득한 백사장도. 해변을 왜 백사장이라고 하는지 화이트 비치를 보고서야 확실히 알았다. 그동안 내가 본 건 그냥 누런 해변이었다. 직접 봐야 명확해지는 단어가 있다. 화이트 비치는 명확하게 단어의 뜻을 알려줬다.
화이트 비치 앞에선 누구나 영화 주인공이 된 것처럼 설렐 수밖에 없다. 비현실적 풍경은 언제나 영화 속에 존재해왔잖나. 게다가 감흥이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으니까. 그동안 크리스마스이브를 수십 번 겪었다. 그때마다 추웠고, 옷은 두꺼웠다. 화이트 비치는 더웠고, 옷이라곤 수영복이면 족했다. 그동안 몸에 각인된 기억과는 다른 크리스마스이브. 그래서 더 현실인지 영화 속인지 인지부조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행복한 인지부조화였다. 남국에도 크리스마스이브를 느끼게 하는 요소는 공통적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 반짝이는 불빛, 빨간색 산타 모자 등등. 기존 크리스마스이브와 날씨, 풍경, 복장은 달라져도 괜히 설레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여자친구와 산타 모자 쓰고 화이트 비치를 거닐었다.
야자수 너머로 노을이 졌다. 그동안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최고인 줄 알았다. 역시 사람은 견문을 넓혀야 한다. 붉게 물든 남국 해변의 크리스마스는 기억 속 홀리데이의 순위를 바꿨다. 그때부터 시작됐다. 연말마다 남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보라카이 화이트 비치는 한 번 더. 태국의 푸껫, 베트남의 푸꾸옥으로 남국에서 보내는 홀리데이의 추억은 확장됐다. 이제 내게 남국에서 보내는 홀리데이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됐다. 그만큼 보라카이 화이트 비치에서 보낸 크리스마스가 환상적이었으니까. 그때 그 기분을 좇아 올해도 간다.
2023년 12월 26일. 나는 부친과 함께 대한해협을 건넜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연말까지 남은 연차를 소진해야 했고, 아버지는 30년 다닌 직장을 은퇴하고 쉬던 차였다. 이참에 여행이나 가면 좋겠다 싶었다. 목적지를 오사카로 정한 데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비행 시간이 너무 길지 않으면 했고, 현지 음식이 어른 입맛에 잘 맞고, 사진 찍기 좋은 볼거리(유명 관광지)가 충분한 곳이면 됐다.
12월의 오사카는 생각보다 할 것이 없었다. 사진으로 수없이 봤던 글리코상 앞에는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많았고, 도톤보리는 10엔 빵과 다코야키를 먹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여기가 일본의 청계천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에는 교토에 갔다. 아버지의 갤럭시 앨범 속 가장 많은 사진은 우리 집 강아지 도리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다. 아버지는 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저 나무 뭔지 아나?’ 묻는 습관이 있다. 매번 이름을 틀리는 내게 ‘니는 그것도 모르나’ 하며 나무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 아버지의 작은 즐거움이다. 그래서 나무가 많은 곳으로 가기로 했다. 지쇼지 정원에는 이끼로 뒤덮인 고목이 많았다. 사진첩에 나무 사진이 늘어날수록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산책을 마치고 근처 오래된 우동 가게에 갔다. 거기서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강아지를 돌보느라 함께 오지 못한 엄마가 교토를 좋아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연말 데이트를 양보해준 여자친구는 온우동보다 냉우동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야 알았다. 지금의 내 나이가, 아버지가 나를 낳을 때의 나이임을. 어렸을 때는 지금 나이가 되면 나도 아빠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해를 넘기자 아버지는 ‘너는 언제 아빠 될래?’ 묻기 시작했다. 나도 모른다. 연말이 몇 번 지나야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버지와 함께한 3박 4일 동안 오랜만에 ‘되고 싶은 무언가’가 생겼다. 언젠가 아빠가 된다면, 나무 이름 두엇 정도는 알려주는 어른이고 싶다. 남자 단둘이서 보내는 연말 휴가.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매일 2만 보씩 걸으며 나눈 지난겨울의 대화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에게도 손자가 생긴다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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