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생각하기에는 연기를 잘하는 마법 같은 건 없어요.
그래도 제가 실패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는 점이 도움이 됐어요.”
신기한 노릇이다. 길쭉한 팔다리를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표정은 또 어떤가. 웃을 땐 소녀 같다가 차분하게 표정을 다스리면 사연이 차오른다. 눈매의 길이에 따라, 시선의 위치에 따라 주변의 온도가 오르내린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금세 새로운 분위기로 환기한다. 다른 모습이 궁금해진다. 배우에게 이런 설명은 트로피일까. 더 오래, 다채롭게 보여주려면, 맞다. 현리는 자기만의 반짝이는 트로피를 들고 있다. 촬영장에서 보여준 몇 가지 장면만으로 그 설명을 낚아 올리게 했다. 우린 아직 현리를 모른다. 일본에서 시작해 미국, 한국으로 영역을 확장해 배우로 활동한다는 정보뿐이다. 몰라도 알 수 있는 건 있다. 모르기에 더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현리가 보여준 순간의 밀도가 몰라도 알 수 있게 한다. 이제 발견하는 즐거움만 남았다. 3개국에서 활동하며 보여줄 모습이기에 더 풍성하다. 일단 그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 첫인상을 새겨본다.
촬영할 때 의견을 많이 내면서 적극적으로 임하더라고요.
일본에서도 화보를 꽤 많이 찍었어요. 제가 잘 나오는 쪽을 알아서 그 부분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또 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지 의견을 냈죠. 덕분에 되게 즐거웠어요. 다들 재밌었다고 해주시고.
어떤 컷이 제일 기억에 남나요?
처음 찍은 컷은 평상시에 입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반짝이는 드레스나 빨간 드레스는 평상시에는 못 입겠지만, 왕가위 감독님 영화 같은 느낌이 나서 좋았어요. 제가 왕가위 감독님을 좋아하거든요. <2046>의 장만옥 느낌을 상상하면서 그 분위기를 내려고 했어요.
이번 촬영 콘셉트에 맞지 않지만 귀여운 표정도 보이더라고요. 귀여운 콘셉트도 잘 어울릴 듯해요.
배우라서 여러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가족끼리 있으면 장난도 많이 치는데, 장녀라서 또 책임감도 엄청 강하거든요. 진짜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막내처럼 편하게 구는 스타일이기도 하고요. 반면에 일할 때는 똑 부러지는 면도 있죠. 진짜 여러 가지 면이 있어요. 근데 다 그렇지 않나요?(웃음)
한국에는 자주 오나요?
지금 한국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찍고 있어서 자주 오죠. 오히려 지금은 일본에 한 달에 일주일 정도밖에 못 있어요. 부모님이 서울에 사셔서 일본에서 작품 끝날 때마다 오긴 했죠.
아, 일본에서 사시던 부모님이 한국으로 이사했군요.
일본에서 같이 살다가 몇 년 전에 이사하셨어요. 지금은 저만 일본에 있어요. 이미 일을 시작하고 독립했기에 괜찮아요. 아기 때부터 한국에는 수십 번 오갔기에 저한테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외국 같은 느낌은 별로 없어요.
교환학생으로 한국에서 공부했다고 들었어요. 그때 한국어를 배웠나요?
네, 그전에는 한국어를 잘 못했어요. 할머니랑 통화하는 정도였죠. 할머니 보고 싶어요, 이런 정도. 배우 하겠다고 한국에 와서 연세대에서 공부했을 때 진짜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어와 영어를 공부했어요.
배우를 하려고 한국에서 공부해요?
연기 배우려고 한국에 갔죠. 요즘에는 좀 생겼는데, 당시 일본에선 체계적인 연기학원이 없었어요.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려면 한국에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한국어도 배우고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어요.
길거리 캐스팅을 받고 배우의 길을 결심했나요?
길거리 캐스팅을 받고 배우를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배우를 생각했어요. 제가 다섯 살 때까진 일본과 한국을 오갔어요. 그래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말했죠. 그러다가 일본 유치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얘기하는데, 질문은 이해하는데 일본어로 제대로 답하기 힘들더라고요. 그때 충격받아서 미친 듯이 책을 읽었어요. 초등학생 때 도서관에 있는 책을 거의 다 읽었죠. 그러다 보니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캐릭터들이 움직이면서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그걸 좋아해서 나도 그런 캐릭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이야기나 연기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런 마음이 길거리 캐스팅으로 구체화됐군요.
충동적인 측면도 있는데, 일단 시작하면 열심히 준비하는 편이에요. 준비 기간까지 치면 대학 4년 중에 거의 3년 가까이 한국에서 보냈죠.
한국에서 연기를 공부하면서 뭘 제일 많이 배웠나요?
일본에서 그 질문 되게 많이 받았어요. 굉장히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연기를 잘하는 마법 같은 건 없어요. 그래도 제가 실패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는 점이 도움이 됐어요. 현장에 가면 제대로 잘해야 그다음 작품이 들어오잖아요. 연기학원에서 실패하고 배우는 시간이 도움이 됐죠.
일본으로 돌아가서는 잘 풀렸나요?
감사하게도 바로바로 작품에 들어갔어요. 소속사 들어가서 오디션 보고 처음부터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일일드라마를 시작했죠.
계획한 대로 잘 풀렸네요.
잘된 편이에요. 대학생 때만 해도 일본에서 활동할지 한국에서 활동할지 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졸업을 앞두고 일본에 갔는데, 그때 소속사를 정하고 처음 오디션을 봐서 붙은 거예요. 자연스레 일본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죠.
처음 연기한 이후에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은 언제였나요?
연기학원에 다닐 땐 조그마한 교실 안에서만 연기했잖아요. 그러다가 현장에 가면 사람도 엄청 많고 정해진 계획 아래 연기해야 했죠. 리허설이라든지 조명 위치라든지 새로 적응해야 할 게 많았어요. 그런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두세 작품이 필요했죠. 그러고 나서야 배운 걸 활용하면서 다음 작품으로 겨우겨우 연결됐어요. 그렇게 이어가다가 <물의 목소리를 듣다>라는 영화로 일본에서 신인상을 받았어요. 그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역시 상이 중요하군요.
처음에는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일단 영화 위주로 일을 많이 했어요. 영화는 찍고 나서 개봉할 때까지 1년 반 정도 시간차가 있잖아요. 드라마처럼 반응이 바로바로 오지 않아서 당시에는 상을 받는 게 의미가 컸어요. 그 이후로 드라마도 많이 하면서 배우로 꾸준히 활동했죠.
스스로 대표작과 대표 캐릭터를 꼽는다면 뭐가 있을까요?
2년 전에 한국에서 개봉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님의 <우연과 상상>에 출연했어요. 최근에는 미국 HBO 드라마 <도쿄 바이스> 시즌 2에 에리카 역할로 출연했죠. 사람들이 잘 봤다고 말해주는 작품으로는 <너와 세계가 끝나는 날에>라는 일본 지상파 최초의 좀비 드라마가 있어요. 지금 촬영하는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함께하는 후쿠시 소타와 주연을 맡은 드라마 <변호사 소돔>도 있죠. 왓챠에서 볼 수 있어요.
어떤 역할, 연기를 했을 때 반응이 좋았나요?
반응이 좋은 역할로 의사가 있어요. 외할아버지가 의사였거든요. 의사 역할을 맡으면서 외할아버지를 보다 가깝게 느끼는 순간이 있었어요. 수술실 장면도 연습해서 직접 했죠. 그리고 의사가 생명을 다루는 역할이잖아요.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생명을 다루는 역할을 하면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죠. 이런 감정이 담겨서인지 의사 역할을 하면서 반응이 좋았어요.
전문직 역할이 잘 어울리나 보네요. 그러고 보면 도회적인 이미지예요.
맞아요. 제가 일본 시부야에 태어나서 도시 사람이긴 해요.(웃음)
실제 주변에서 어떤 이미지로 보나요?
<도쿄 바이스> 시즌 2랑 <변호사 소돔>을 같은 시기에 찍었어요. <도쿄 바이스> 시즌 2에선 술집 여자를, <변호사 소돔>에선 완전히 딱딱한 변호사를 맡았어요. 둘이 전혀 다르죠. 되돌아보면 전 딱히 고정된 이미지가 없어요.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실제로 만나보면 드라마 역할과 다르다고 하기도 해요. 그런데 또 BBC 영국 드라마를 일본에서 리메이크한 <미스트리스 여자들의 비밀>에선 우유부단한 여자애를 맡았는데, 제일 친한 친구가 연기가 아닌 실제 내 모습이라고 하더라고요. 일할 때 전 우유부단하지 않은데 친구가 보는 저는 또 다른가 봐요.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는 어떤 역할이 자신과 결이 맞는다고 생각하나요?
따라가는 사람보다 주도하는 사람이 맞아요. 제안하고 이끄는 역할을 했을 때 좀 더 편하고 재밌더라고요. 사람들과 상의하면서 이거 어때? 저거 어때? 이렇게 해볼까? 하는 시간이 좋아요. 좋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해보고 나서 잘 나왔을 때 그 순간이 좋죠.
현재 일본, 미국, 한국까지 3개국에서 활동해요. 연기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환경이 다르니 새로울 텐데 잘 적응하나요?
20대 때부터 한국과 일본, 미국을 중심으로 일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어요. 서른다섯 살쯤 이루어지기 시작했죠.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거의 10년 걸렸어요. 나라마다 시스템이 다르고, 아직까지 저처럼 일하는 사람이 없기에 롤 모델을 찾을 수 없어 진짜 쉽지 않았어요. 목표를 같이해줄 사람을 많이 찾아다니면서 하나씩 해나가다 보니 이제 목표에 다다르게 됐죠.
3개국을 오가며 작품에 출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애초 어떻게 그런 목표를 세웠나요?
영어를 할 수 있어서 그런지 처음부터 해외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많았어요. 프랑스 영화나 영국에서 제작한 <스트리트 파이터: 전설의 귀환> 같은 영화를 찍었죠. 그때부터 재밌는 작품, 좋은 작품, 좋은 역할이라면 국경 없이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이 한국인이고, 제 국적도 한국이죠. 미국 LA는, 일단 날씨도 사람도 좋아요. 이렇게 3개국에서 일하면 뭔가 재밌을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점점 구체적으로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가능한 것들을 찾아가면서 했죠.
각기 다른 언어로 각 나라에서 연기해야 하잖아요. 연기할 때 언어 차이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나요?
일본어로 연기하는 시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에 일본어가 가장 편하긴 해요. 그래도 일본에서 한국어 잘하는 한국인 역할도 많이 해서 한국어 연기는 일본에서 준비운동 격으로 해왔어요. 한일 합작도 늘어서 한국어 연기를 할 기회도 많았죠. 그러면서 예전보다 한국어 연기가 편해졌어요. 연기학원도 한국에서 계속 다녔기에 거부감은 없죠. 두 언어에 비하면 영어 연기는 쉽지 않아요. 무거워, 혹은 보고 싶어라는 대사를 말할 때 그 말에 관한 일상에서 느낀 인생의 기억이 줄줄 따라오잖아요. 그게 일본어와 한국어는 몸 안에 있는데 영어는 그렇지 않죠. 대사에 담긴 기억이나 감정의 도움을 덜 받는 느낌이에요.
3개국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목표는 이뤘으니, 새로운 목표는 뭔가요?
나만의 마스터피스를 만들자. 진짜 누구나 아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요. <도쿄 바이스> 시즌 2도 많은 사람이 봐주셨지만, 그걸 넘어 예를 들면 <기생충> 같은, <고질라> 같은 모두가 본 작품에 출연해 내 마스터피스를 만드는 거예요.
이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나요?
한국에 대해 따뜻한 기억이 많아요. 제가 할머니를 좋아했거든요. 삼촌이나 이모도 좋아했고요. 그래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다른 나라에서 하는 거랑 또 다른 느낌으로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그리고 사이코 스릴러 장르도 좋아해요. <살인자ㅇ난감>이나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느낌의 드라마에도 출연해보고 싶어요. 한국 작품이 진짜 탁월해요. 그런 픽션 세계에서만 할 수 있는 역할들에 관심이 많아요.
“나만의 마스터피스를 만들자.
진짜 누구나 아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요.
모두가 본 작품에 출연해 내 마스터피스를 만드는 거예요.”
지금 출연하는 작품 외에 다른 제안도 많이 들어온다고 들었어요. 더 많은 활동을, 전보다 본격적으로 하면서 느끼는 점이 또 다를 듯해요.
상상보다 많이 바쁘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촬영해서 바쁘기도 하지만, 스케일이 큰 작품이라서 이곳저곳에서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일본에선 드라마 한 작품 찍으면 보통 3개월 걸리거든요. 짧게 찍어요. 그래서 일본에선 드라마를 1월, 4월, 7월, 10월에 딱 동시에 방영해요. 3개월마다 새로운 드라마를 방영하니 사전 제작이라 해도 거의 3개월이면 끝나거든요. 그렇게 1년에 거의 두세 작품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최근 참여한 미국, 한국 작품은 다 10개월씩 촬영하더라고요. 시간이 겹쳐서 더 정신없죠.
촬영 기간이 긴 작품을 해보니 마음가짐이 달라지나요?
10개월씩 찍으면 1년에 한 작품에 참여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내가 죽을 때까지 이제 몇 작품을 찍을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3개월씩 찍을 때는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했거든요. 이제 1년에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도 작품을 신중하게 골라왔지만,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더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보여주고 싶은 건 뭔지 고민하면서 작품에 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돼요.
바쁘게 살다 보니 한 해가 다 갔네요. 올해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올해는 홍콩영화제부터 시작해 해외 로케이션이 많았어요. 진짜 집에 거의 없었죠. 20대 때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체력적으로 힘들긴 해요. 그래도 낯선 곳에 가는 걸 좋아해요. 그럴 때 희열을 많이 느끼죠. 지금까지 혼자 20개국 정도 여행 다녔어요. 인도나 라오스도 다녀왔고, 일을 포함해서 알래스카에 간 적도 있어요. 새로운 체험을 하는 걸 좋아해요. 거기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도 재밌고요. 아직 도전할 나라가 많아요.
바빠서 한국에 오면 촬영만 하고 돌아가나요?
부모님이 한국에 계셔서 어머니랑 둘이 SNS에 소개된 맛집을 찾아다녀요. 최근에는 어머니 취향에 맞춰 들기름 막국수를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한국에 맛집이 진짜 많아서 자주 가려고 하죠. 매니지먼트 대표님과 ‘능동미나리’에 가봤는데 맛있었어요. 다음에는 낙지 칼국수 먹으러 가려고요. 저 낙지 좋아해요.
신사동에 낙지숯불구이 맛있게 하는 집 있어요. 알려줄게요.
오, 좋아요. 같이 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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