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심은경 / 배우
미국 뉴욕 프로페셔널 칠드런 스쿨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다. 열아홉 심은경은 어떤 학생이었나?
미국으로 떠난 건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미국 생활이 궁금하기도 했고 부모님의 권유도 있었다. 사실 연기 유학은 아니고 그냥 유학이었다. 막상 미국에 도착했지만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영어도 쉽지 않았고, 뒤늦게 사춘기까지 왔으니까. 그러던 중에 우연한 기회에 일본 문화를 접하게 됐고 학교 생활과는 더 멀어졌다.
왜 하필 일본이었을까?
같은 학년의 한국인 학생을 만났다. 그 친구가 애니메이션 오타쿠였다. 몇 없는 한국인 친구끼리 친하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에 스며들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고, 주제가도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아무로 나미에, 보아, 아라시를 거쳐,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록밴드에 빠졌다. 자드, 루나 시, 안전지대, 엑스재팬과 히데, 말리스 미제르와 각트. 지금 살고 있는 도쿄 집에는 그 당시 모은 말리스 미제르 공연 DVD가 있다.
열아홉 살에는 이미 한국에서 유명한 아역 배우였다. 배우가 아닌 다른 직업을 꿈꾸기도 했는지?
장래 희망에는 늘 ‘배우’라고 썼지만 남몰래 뮤지션을 꿈꿨다. 록밴드 멤버가 돼서 도쿄돔을 뒤집어놔야지. 밴드 멤버가 되려면 악기부터 배워야 했다. 그중 제일 멋있는 게 뭘까 살펴보니 기타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기타를 배웠지만 손이 따라가지 못해 드럼을 배웠다. 역시나 손발이 따로 움직이지 않아 포기했다. 악기에는 재능이 없으니 보컬이라도 되어보자. 그런 마음으로 노래 연습을 했던 날들이 있다.
남몰래 속앓이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어떻게 그 시간들을 넘겼나?
뉴욕에 일본 서점 기노쿠니야가 있다. 시간만 나면 서점 2층 카페에 앉아 <멘즈 논노> <하비재팬> 같은 일본 잡지를 들여다봤다. 용돈이 생기면 죄다 잡지 사는 데 썼다. 용돈이 떨어져도 서점에 앉아 책 구경을 했다. 당연히 내용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저 일본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다.
기노쿠니야의 심은경에게 ‘10년 뒤 너는 일본에 살면서 배우 생활을 할 거야’ 하고 말한다면 뭐라고 할까?
왜 지금은 아닐까요? 왜 하필 10년이나 걸리나요? 조금 더 일찍은 안 될까요? 아마도 그때의 심은경은 내 말을 안 믿었을 거다. 너무 막연하니까. 마냥 좋아하기보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되물었겠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나?
스타가 되고 싶었다. 시대를 풍미한 멋쟁이.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기보다 앤디 워홀, 데이비드 보위처럼 문화를 이끈 사람들을 동경했다. <벨벳 골드마인>에 나온 록스타처럼 반짝이면서도 퇴폐적인 멋쟁이를 꿈꿨다. 그래서 더욱 뉴욕에서의 시간이 아쉽다. 지금 열아홉 살로 돌아간다면 눈앞에 주어진 것들을 좀 더 만끽할 수 있을 텐데. 그 나이 때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과 고민으로 스스로를 가뒀던 게 아쉽다.
아역 배우들은 장래 희망이 일찍 정해진 채로 성장해갈 것 같다. 아역 배우라서 느낀 갈등과 혼란은 없었나?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 서다 보니,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게 두려웠다. 스스로도 일탈을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어떻게 살아야 될까’ 뒤늦은 고민을 시작했다.
어른이 되고서 해본 가장 큰 일탈은?
일본에 가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된 것. 누군가에게는 ‘그게 무슨 일탈이야’ 할 수 있지만, 내게는 큰 결정이었다. 가족과 살 때는 늘 감정을 숨겼던 것 같다. 일본에 살기 시작하면서 혼자 울고, 웃고, 슬퍼하고, 외로워도 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그게 나의 가장 큰 일탈이었다.
열아홉 살 심은경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나?
일단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 음식을 잔뜩 시켜놓고 이야기하겠지. 지금 영어 공부 열심히 해두렴. 그래야 지금의 내가 편해.(웃음) 괜찮다는 말을 많이 해주고 싶다. 실패해도 괜찮아. 무모해도 괜찮아. 네가 지금 동경하는 어른들의 삶처럼 좀 더 자유롭고 자신 있게 사람들을 만나보렴. 깨져도 보고 상처도 받아보렴. 그러다 보면 10년 뒤에도 함께할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지금의 네가 제일 부러워. 파이팅.
02
한요한 / 뮤지션
고등학교 3년 동안 세 학교를 다녔다. 첫 학교는 휘문고등학교. 공부를 잘하는 학교라 그런지 모두 머리를 밀고 다녔는데, 로커 지망생이었던 내게는 용납 못 할 일이었다. 때마침 집이 이사하면서 양재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양재고 학생들은 아현산업정보학교에서 특성화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타 연습을 했다. 내가 일렉트릭 기타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기타리스트가 제일 멋있으니까. 사실 인기는 보컬이 가장 많지만, 처음 기타를 시작할 때 얼굴 잘생긴 친구가 보컬을 맡길래 포기했다. 드럼은 잘 안 보이니까 생각도 안 했고.
내가 되고 싶었던 건 하나다. 유명 밴드 기타리스트. 여자들에게 멋있어 보인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만 빼고. 공부는 중학교 1학년 때 수학 14점을 받은 이후로 깔끔하게 포기했다. 고3 시절 들었던 밴드들은 지금 내가 음악을 만드는 데 큰 버팀목이 되어준다. 건즈 앤 로지스, 너바나, 메탈리카, 마룬 파이브. 한국에서는 김진표 형님이 보컬이었던 노바소닉을 좋아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내게 딱히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한숨을 많이 쉬었지. 묘한 눈빛도 자주 느꼈는데,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호원대학교 실용음악학부에는 수시 전형 수석으로 입학했다. 전액 장학금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차까지 사줬다. 기아 포르테 쿱. 자동차도 멋있어 보이는 게 중요해서 어떻게든 문짝 두 개 달린 차로 골랐다. 성인이 된 후로 목표는 명확해졌다. 음악으로 서울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 물론 지금처럼 노래하는 가수로 돈을 벌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열아홉 한요한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이렇게 말하겠지. ‘그럴 줄 알았어. 결국 더 인기 많은 거 하네.’ 스물다섯까지는 기타리스트로 열심히 활동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늘 가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열아홉 살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기타리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거다. 내게는 기타리스트로 보낸 나날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연주자로 오랜 시간 무대를 섰고, 덕분에 무대 뒤에 있을 때의 풍경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그 시선을 갖고 있기에 지금 내가 서는 무대에 더 감사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동료들의 노력도 알게 됐고.
고등학생 한요한을 만나면 정말 좋은 기타 하나 사주고 싶다. 기왕이면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이 칠 법한 화려한 기타로. 기타리스트로 일하는 동안은 ‘성공한 록스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고 살았다. 스스로를 연주자로 한정 짓고 돋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깨주고 싶다. 나도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깨우칠 수 있게. 아,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도 있다. ‘Shining Star’. 고등학생 때 정말 좋아하던 넬의 김종완 형님이 피처링해준 곡이다. 그럼 이렇게 말하겠지. 역시 해냈구먼.
“깨져도 보고 상처도 받아보렴.
그러다 보면 10년 뒤에도 함께할 동료들을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는 지금의 네가 제일 부러워.”
“지금 열아홉 살로 돌아가도 여전히 꿈을 꿀 것 같다.
방황도 많이 하고 주변에 실망도 많이 안겨준 나날이었지만,
내 나름대로 세상과 싸웠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03
신용목 / 시인
거창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던 열아홉 신용목은 방황하며, 반항하고 있었다. 전교조 1세대였고 그만큼 가치관의 혼란과 삶에 대한 질문이 성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친구들끼리 동아리를 만들었던 게 기억난다. 문학 동아리, 풍물패 동아리 등등. 현실에 대한 불신도 커지면서 공부를 해야 될 이유를 하나둘 지워나갔다. 1학년에는 1등급이었던 내신 성적이 3학년이 되자 8등급까지 떨어졌다. 이듬해, 전기 대학에 떨어져 가까운 후기 대학에 들어갔다. 일단 입학 등록을 하고 재수하려 했지만 여러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총학생회장까지 지냈다.
열아홉. 그때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질문과 함께할 수 있는 직업은 글 쓰는 것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시인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문학 안에서도 나를 들여다보는 장르가 시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우연히 선배의 자취방에 붙어 있던 시를 봤다. 김남주 시인의 ‘학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시였다. 그간 내가 교과서에서 읽었던 시들과는 전혀 달랐고 나는 단숨에 그 시에 매료되었다.
열아홉 시절 내게 가장 강력하게 새겨진 장면이 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5월에 광주 가는 길은 검문이 심했다. 나와 친구들은 ‘친척이 산다’고 둘러대며 광주를 찾았다. 광주 YMCA 회관에 들어서자 누군가의 육성이 들렸다. 그곳에서 김남주 시인이 직접 ‘학살’을 낭송하고 있었다. 그날의 경험을 시집 <나의 끝 거창>에 ‘시’라는 제목의 시에 담아냈다. 열아홉 살 신용목을 만난다면 같은 시집에 쓴 시 중 ‘모리재’를 보여주고 싶다. 열아홉 고민하고 방황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시다. 10대 때는 고민도 많았지만 옳은 것에 대한 열정도 컸다. 불합리한 세상을 바꿔나가는 어른을 꿈꿨다. 그때의 신용목이 지금의 나를 본다면 이렇게 말하겠지. ‘지금보다 더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는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안정적으로 삶을 사는 거 아니야? 비겁하다.’ 최근 시집을 냈다.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라는 제목의 시집이다. 거기에 ‘열아홉의 내가 자신의 미래를 보고 싶어서 삼십 년을 살았다’라고 적었다. 어른이 된 내가 열아홉의 나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쓴 문장이다.
지금 열아홉 살로 돌아가도 여전히 꿈을 꿀 것 같다. 방황도 많이 하고 주변에 실망도 많이 안겨준 나날이었지만, 내 나름대로 세상과 싸웠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신용목을 만난다면, 여전히 고민과 방황을 하고 있을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쫄지 말라고. 괜찮다고. 네가 선택한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잘하고 있다고.
04
류성실 / 현대미술가
서울예술고등학교 3학년 류성실은 어떤 학생이었나?
전형적인 예고 학생이었다. 하루 종일 열심히 그림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대학생의 일상을 꿈꾸는 학생. 예고를 간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림 그리는 건 늘 좋아했는데, 주변 어른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 더 잘 그려서 자랑하고 싶었다. 아, 그리고 체육 시간. 중학생 때는 체육 수행평가를 지독히 싫어했다. 예고에 가면 체육을 안 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진학을 결심했다.
서울예고 안에서도 조소과를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당시 학교에는 동양화, 서양화, 조소, 디자인 네 가지 전공이 있었다. 1학년에서 2학년 넘어갈 때 전공을 선택해야 했는데, 좋아하는 친구들이 조소과에 간다고 했다. 때마침 선생님께서도 내가 조소를 잘한다고 해주셨는데, 정말 그런 줄 알고 조소과를 선택했다.
어떤 직업을 갖고 싶었나?
이번 인터뷰를 앞두고 생활기록부를 확인해봤다. 장래 희망란에 ‘작가’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내 친구들은 ‘작가’ 아니면 ‘디자이너’라고 썼다. 디자이너라면 클라이언트가 있을 텐데, 누군가와 같이 일하는 걸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작가가 좀 더 멋있기도 했고.
작가가 되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했을 텐데, 지금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작가의 꿈을 갖기 전 어린 시절 막연하게 동경했던 멋쟁이 어른의 조건으로 ‘해외 출장 다니기’가 있었다. 공항에서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며, 한 번씩 시계도 들여다보고, 코트를 휘날리는 여자. 파리부터 뉴욕까지 전 세계의 시간을 동시에 살며 맥북으로 줌콜을 하는 일상을 상상했다. 올해는 해외에 다닐 일이 잦았다. 즐겁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애잔하게도 최근 뉴욕에서 돌아온 후 시큰둥해진 나를 발견했다. 너무 피곤했거든.
열아홉 살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작가를 꿈꿀까?
지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져갈 수만 있다면 주식이나 사업을 하지 않을까?(웃음) 결국은 창작하는 일을 선택할 것 같다. 예전에는 배우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배울 것이다. 이를테면 체육. 요즘 가장 고민하는 것도 체력이다. 작업을 재미있게 하려면 체력은 필수다.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 대학교 1학년 첫 드로잉 수업 때 교수님이 다짜고짜 체조부터 시켰다. 당시 교수님은 지금의 내 나이쯤 됐다. 그때는 ‘이걸 왜 할까’ 싶었는데, 이제야 그 심정을 알겠다.
열아홉 살 류성실이 지금의 류성실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좀 더 열심히 해봐.’ 어릴 때는 항상 꿈이 현실보다 크기 마련이니까. 30대가 되어버린 류성실의 체력과 고민을 공감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좀 더 열심히 해봐’ 이야기할 것 같다.
열아홉 류성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니는 네 체력이 걱정이다. 너무 학교에만 있지 말고 운동도 노는 것도 열심히 하렴. 그러고는 어른들이 한 말을 반복할 것이다. 대학생 때는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작가가 아니더라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늘 불안했다.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좋아하는 걸 꾸준히 열심히 해라.’ 당시에는 어른들 말씀이 너무 막연하고 얄밉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모두 맞는 말이었다. 지금 네가 보고 느끼는 게 일생에서 정말 큰 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책이든 전시든 뭐든 열심히 보라고. 부탁 섞인 조언을 전하고 싶다.
05
표기식 / 사진가
대구 협성고등학교 3학년 표기식은 목표가 있었다. ‘인 서울 미대’에 들어가는 것. 때가 되면 미술 학원에 가고, 시험기간 되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공부만 했던 건 아니다. 춤 동아리에 들어가 다른 학교 축제에서 공연했다가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장래 희망이 뚜렷했던 건 아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가고 싶은데, 공부만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림도 시작했다. 선생님과 부모님이 해준 조언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 기억도 없는 걸 보니 크게 와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걸 수도 있고. ‘인 서울 미대’ 진학은 실패했다. 그래도 서글프지는 않았다. 지방에 있는 미대라도 막상 들어가고 나니 ‘이만하면 됐지’ 싶어졌다.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남들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막연히 결혼해서 아이 낳고 매일 열심히 출퇴근하는 40대 아저씨를 상상했다. 열아홉 살의 표기식에게 ‘20년 뒤에는 사진가로 일하고 있을 거야’ 말해준다면?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 사진가가 됐다는 사실보다, 내가 촬영한 사람들의 이름을 듣고 놀랄 거다. 이효리, H.O.T. 강타, 솔리드, 이순재 선생님. 대구에 살던 열아홉 살짜리에게 연예인을 만난다는 건 일생일대의 일처럼 느껴졌을 거다.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다시 사진가가 되고 싶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일이니까. 내가 사진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취미 삼아 찍던 사진이 잡지에 실렸고, 그게 계기가 되어 샤이니 앨범 커버를 찍게 됐고, 지금까지 사진가로 돈을 벌고 있다. 그런 나로서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조언하고 싶지 않다. 그저 당장 눈앞에 있는 일을 열심히 하라고, 그러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면 더 열심히 해보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06
엄태화 / 영화감독
안산동산고등학교 3학년 엄태화는 어떤 학생이었나?
한 반에 한 명씩 있는 까부는 친구. 그때는 장난기도 많았고, 축제 때면 늘 무대에 올라 춤도 췄다. 대학교에 가면서 성격이 한순간에 내향형으로 바뀌었다. 흔히들 말하는 ‘지랄 총량의 법칙’의 에너지를 그때 전부 써버린 게 아닐까 싶다.
대학교는 영화과가 아닌 미대로 입학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전혀 아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한 건 공부가 하기 싫어서였다. 대학을 가긴 가야겠는데, 도저히 ‘수학Ⅱ’를 공부할 엄두가 안 났다. 때마침 예체능 전공은 공통 수학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입시 준비도 다른 친구들보다 한참 늦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부터 시작했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나?
되고 싶은 어른은 없었다. 진지한 고민을 해본 적도 없다. 당장 눈앞에 닥친 입시를 준비하는 게 중요했으니까. 대학만 가면 막연히 새로운 일상이 펼쳐지겠지 생각했다. ‘그림 잘 그린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들어서인지 막연하게 조각가나 만화가처럼 미술 관련된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진지하게 ‘커서 뭐가 돼야지’를 생각할 만큼 성숙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고르자면 댄스 가수?(웃음) 듀스, H.O.T., 젝스키스가 인기였던 시기라 매일 친구들 만나서 춤추고 놀았다. 그때 못다 이룬 꿈을 지금 영화로 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영화에 대한 꿈은 단 1%도 없었지만.
20년 뒤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 한다면, 열아홉 살 엄태화는 뭐라고 말할까?
열아홉 엄태화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갑자기요? 영화감독을요? 그런 추억은 있다. 초등학교 학예회가 열릴 때면 콩트를 곧잘 만들었다. 전체적인 진행을 주도해서 맡았는데 참 재미있었다. 그게 연출인지 연기인지도 몰랐던 나이였지만. 대학에 가서 과제로 작은 상황극을 만들면서 깨달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 뭔지도 모르고 열정적으로 했던 그것이 ‘연출’임을.
다시 열아홉 살로 돌아간다면 어떤 직업을 꿈꿀까?
지금 돌아간다면 영화감독을 꿈꾸지 않을까? 영화 만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
열아홉 살 엄태화가 지금의 엄태화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
생각보다 많이 안 늙었네?(웃음) 고등학생 때는 지금 내 나이가 되면 훨씬 어른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아이도 낳고, 가정을 착실하게 꾸려가는 아빠 엄태화. 아버지께서 지금 내 나이였을 때 이미 중학생 아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구나. 엄태화, 생각보다 젊은데. 그렇게 말할 것 같다.
열아홉 살 본인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영화 많이 봐. 영화과에 입학하면 무조건 보라고들 하는 고전 영화 리스트가 있다. 그 영화들을 착실히 보며 공부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채 감독이 됐다. 영화를 오랫동안 많이 봐온 동료들을 볼 때마다 레퍼런스의 깊이가 다름을 느끼곤 한다. 그러니 영화 많이 봐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런데 아마 안 볼 거다. 잠이나 자겠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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