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공간과몰입
책을 매개로 온전한 몰입을 위한 공간.
“처음에는 서점을 염두에 두고 공간을 빌린 게 아니라 작업실로 쓸 생각이었어요.” 책보다 통기타가 눈에 띄는 ‘공간과몰입’은 우연히 만들어진 서점이다. 작업실로 쓰려던 공간을 보고 관심 두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책을 좋아하던 두 대표가 각자 집에 있는 책을 가져와 독립 서점을 시작한 것. 소개하는 네 서점 중 가장 젊은 대표답게 입고된 책 또한 요즘 2030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책들이 많다.
“공간과몰입을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책방을 빼고 공간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어요. 책이든 음악이든 무언가에 과몰입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서점은 하나의 주제에 깊게 몰두한 독립 출판물을 주로 다룬다. 마요요 퍼블리싱의 <만두>, 주혜린의 <영화 속 샌드위치 도감> 같은 책이다. 최근 흥미롭게 읽은 MBTI 테마 소설집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도 비치했다. 젊은 감각은 진행 중인 프로그램에서도 빛난다. 정기적인 북토크를 중심으로 음악 공연, 희곡 읽기 모임도 열지만, 인생 드라마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잡지 만들기, 책에 찍힌 오타에 주목한 전시 토크 ‘오타 낸 심정’ 같은 신선한 워크숍이 공간과몰입만의 개성을 드러낸다. 모든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손님들의 참여다.
“저희는 북토크를 해도 참여하시는 분들에게 뭔가를 쓰라고 권유하거든요. ‘마지막 10분 정도는 오늘 느낀 점을 시로 써보세요’ 하면 처음에는 주저하셔도 쓰다 보면 즐거워하시고 좋은 결과물을 가져가세요.” 가을에 읽기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이들은 오랜 고심 끝에 만화책을 꼽았다. “탐험을 콘셉트로 낙산공원에 앉아서 다 같이 책을 읽고 주먹밥을 나눠 먹은 적이 있어요. 그때 읽은 책이 판판야 작가의 <주먹밥이 굴러가는 마을>인데요. 책에 나오는 마을이 이 동네랑 닮은 부분이 많거든요. 가을 하면 떠오르는 즐거운 기억이라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벽면 가득한 책방 손님들의 메모와 앉아서 편히 읽을 수 있도록 이곳저곳 비치된 의자에서 문화적 공간이 되고자 하는 공간과몰입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02 서점극장 라블레
세계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놀이터.
이름부터 흥미로운 ‘서점극장 라블레’는 말 그대로 서점 겸 극장이다. 낮에는 세계문학 서점으로, 밤에는 극장으로 운영된다. 연극을 통해 만난 부부 대표는 이전부터 소설과 연극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친구나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작업하려고 해도 장소가 없으면 쉽게 흩어지더라고요. 장소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시작했어요.” 막상 문을 열었지만 이런저런 제약으로 공연 올리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이게 될까?’ 하는 의문을 품은 채 처음 올린 극이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였다.
“일반적인 극장에서 공연하면 보통 일방적으로 관람하고 나가시잖아요. 근데 서점 손님이 관객이 되니까 이후에도 오셔서 연극 얘기나 소설 얘기를 계속하시는 거예요. 거기서 또 다른 활동으로 확대되기도 하고요.” 라블레에서 손님은 입점 작가가 되기도, 워크숍을 진행하는 예술가가 되기도 한다. 판매 중인 책 <가시두더지 2호>는 라블레에서 모인 사람들이 작품을 함께 읽은 뒤의 감상을 그림과 글로 녹여 발간한 책이다. 한창 인터뷰가 진행되던 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양해를 구한 대표가 말했다.
“워크숍을 준비 중이라서요. 책 한 권을 주제로 5명의 예술인이 각자 다른 워크숍 프로그램을 맡아서 진행하는 거예요. 책 한 권으로 어디까지 놀아볼 수 있을까 해서 시작했죠.” 워크숍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마임을 하기도 한다. 늘 중요한 것은 재미다. ‘한 가지 책으로 얼마나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를 먼저 고려한다. 가장 대표적인 워크숍 ‘사티로스 문학 수다의 밤’에 관해 물었다.
“음악과 춤을 사랑하는 염소 신을 말해요. 익살극인 사티로스극의 유래죠. 저희의 이름이 된 작가 라블레의 소설 세계와도 맞닿아 있어요. 아무리 심각한 드라마를 말하더라도 꼭 나중엔 사티로스 축제가 열려서 웃음이나 희극으로 균형을 맞추거든요. 책이 한 권 한 권 출간되는 건 일종의 사건이잖아요. 그걸 다 같이 축하하고 술과 수다로 잔치를 벌이고 싶어서 진행하는 워크숍입니다.” 비치하는 책의 기준 역시 ‘웃음의 정신을 반영했는가?’다. 세계문학을 중심으로 하되 심오하고 고립된 책보다는 다른 책들과 연결된 책들을 선정한다.
03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
시인과 독자가 만나 생생한 한국 시의 현장이 되어주는 서점.
대학로에 위치한 동양서림 2층에는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이 있다. 시집서점이라는 이름답게 시집만을 취급한다. 대표 유희경은 10년 동안 편집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서점을 연 계기는 단순히 취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잘 계산된 기획입니다. 한국에서 시집이 얼마나 판매되는지 규모를 알고 있었어요. 일반적인 사회 통념에 비해서 더 많이 찾으시는구나 싶었고요. 남들이 하지 않는 기획이어서 손해 보지 않을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죠.”
위트 앤 시니컬. 유머와 냉소라는 대조적인 두 단어가 언뜻 섞이지 않는 듯 보여 어떻게 짓게 된 이름인지 물었다. “처음 이름을 지은 건 시인 세 명이 한자리에서 어떤 시인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는 위트 있는 시인이니까’라고 말을 했어요. 그런데 다른 시인이 ‘위트 앤드 시니컬이 뭐야?’라고 잘못 알아듣고 되묻더라고요. 그 과정이 시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뭐라고 말해도 정답은 없고 듣기에 따라서 각자의 답이 마련되어 있는 게요.”
경위를 듣고 나니 시와 닮아 있는 완벽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서점에 들이는 책의 기준은 기본적으로 좋은 시집, 다음으로는 출판사다. 한국 시는 문학동네,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등의 출판사 중심으로 꾸리는데 때와 특성에 따라 출판사를 자체적으로 구분한다. 진행하는 워크숍으로는 시 창작 세미나가 대표적이다. 세미나를 진행하는 강사 시인과 함께 커리큘럼에 따라 매주 모여 시를 쓴다. 때때로 낭독회를 열기도 한다. 유희경은 시의 힘으로 모호성을 꼽았다.
“우리가 시를 어렵게 느끼잖아요. 그건 사실 시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읽었을 때 이게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거죠. 근데 살면서 우리가 명확하게 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에서는 시가 더 정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트 앤 시니컬은 문을 연 시작부터 지금까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재밌게 머무는 공간이었으면 하는 일념으로 운영한다. 이번 가을엔 시집서점에 방문해 자신만의 시를 찾아보자. 마음을 울리는 책을 만날지 모른다.
04 페잇퍼
읽고 쓰는 시간을 파는 비밀 만화방.
연희동 한적한 골목길 새하얀 건물이 눈에 띈다. 안으로 들어서면 페잇퍼의 마스코트 고양이 ‘대길’이가 반긴다. 2019년 문을 연 페잇퍼는 대표가 이전에 운영하던 만화책방인 ‘즐거운 작당’, 그림책방인 ‘달달한 작당’을 합쳐 만든 것이다. 오랜 회사생활을 마친 후 유년 시절 좋아하던 만화책을 통해 어린 시절 꿈을 실현해 보고자 시작한 것이 11년 동안 이어져왔다. 책장을 가득 메운 만화책을 보자 어릴 적 용돈 모아 들락거리던 ‘빅뱅’ ‘비디오왕자와 책공주’ 같은 도서대여점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불변의 인기를 자랑하는 작품부터 최근 주목받는 웹툰의 단행본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1층에서는 간단한 음식도 판매한다. 만화책방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라면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는 사람들만 찾는 동네 사랑방처럼 조용하게 자기 시간을 즐기거나 동네 친구들과 이런저런 글쓰기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 숨겨진 아지트가 되길 바라요.” 오랜 단골손님들이 가득한 페잇퍼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다양한 모임을 진행한다. 온라인으로 매일 책을 읽은 후 필사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이래 봬도 북클럽’, 매주 일요일 오전에 만나 흩어져 작업하고 함께 모여 감상을 나누는 ‘이래 봬도 워크숍’ 등 모든 모임은 3년 넘게 매주 혹은 매일 진행되고 있다. 시간이 쌓이다 보니 정기적으로 모이는 고정 멤버도 생겼다. 이들은 호스트가 되어 또 다른 모임을 주최하며 페잇퍼라는 공간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시간에서 오는 뿌듯함이 있죠. 초등학생 때 엄마 따라 왔는데 직장인이 돼서 찾는 분도 있고 데이트하러 오셨던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도 하고요. 그리고 1층에서 열심히 음식을 만들다가 위로 올라가면 각자가 책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만화책이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장면을 내가 만들어냈다 싶어서 보람을 느끼죠.” 마지막으로 이번 가을에 추천하는 책을 물었다. “만화책은 언제 읽어도 좋지만 가을에는 이시즈카 신이치의 <블루 자이언트>. 최근에 애니메이션으로도 개봉한 재즈 만화인데요. 읽으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재즈 넘버를 함께 들으면 굉장히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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