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며칠 전에 나온 일정표에서 9월 3일에는 ‘비바 라 비다’에서의 경기 관람이 있었다. 비바 라 비다라, 왠지 바르셀로나 바닷가에 있을 법한 라운지 이름이다. 아니었다. 비바 라 비다는 늘씬한 호화 요트였다. 나중에 일정표를 보니 ‘호스피탈리티 보트 비바 라 비다’라고 적혀 있어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대신 다행스럽게도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지 그 자리에 있던 전 세계 저널리스트 16명 누구도 탑승에 대비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바르셀로나 현지 시간 9월 3일 오후 12시 50분, 우리는 역사적인 제37회 아메리카스 컵 ‘라운드 로빈’의 보트 경기를 구경하러 바르셀로나 앞바다로 나가고 있었다. 경기는 오후 2시였다.
비바 라 비다호는 ‘내가 이런 곳에 있어도 되나’ 싶을 만큼 호사스러웠다. 마루는 모두 티크 원목. 규모도 지하 1층 지상 2층. 우리는 계단을 올라 2층에 자리 잡았다. 옥상 라운지처럼 지붕이 있고 사방은 뚫린 곳이었다. 모든 실외 스포츠 경기 최고의 변수는 날씨다. 이번 아메리카스 컵도 날씨의 영향이 컸다. 특히 이번에는 갑작스러운 비가 잦았는데 하필 우리가 배를 탄 날 바르셀로나 앞바다에 비가 내렸다. 비바람이 심해지자 선장이 2층으로 올라와 더 안전하고 쾌적한 1층에서 관람하라고 권했다. 저널리스트 16명 중 11명이 그 즉시 1층으로 내려갔다. 남자 5명이 남았다. 그중 한 명은 취리히에서 왔다는 독일계 스위스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2층이 항해사의 자리지!”라고 거들먹거리다가 바람이 심해지자 조용히 내려갔다. 말을 말지.
그날 지중해 앞바다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2층 데크에서 경기를 지켜본 사람은 4명뿐이었다. 경력 50년 차라는 스페인 기자, 로잔에서 온 프랑스계 스위스 기자, 그 정도 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반소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덴마크의 요트 잡지 편집장 그리고 그들 중 유일한 아시아인인 나. 이 넷이 바다 위에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대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나
승부는 승자독식이고 ‘테이블 위에서 하는 경기’다.
불공평한 게임이다.”
결정적 경기
아메리카스 컵 역사에서 혁신적인 플레이어는 의외로 스위스다. 스위스는 국가에 해안선이 전혀 없는데도 우승한 특이한 경력이 있으며,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나 한 번도 유럽에 있었던 적이 없는 아메리카스 컵을 유럽으로 가져온 팀이기도 하다. 스위스 부자 에르네스토 바르타렐리의 막대한 재산과 탁월한 조직 운영으로 스위스는 2003년과 2007년 두 번이나 우승했다. 그 팀의 이름이 ‘알링기’다. 알링기는 지금 레드불의 지원을 받아 팀 이름을 ‘알링기 레드불 레이싱’이라고 쓰고, 시계 브랜드 튜더가 메인 스폰서 중 하나다. 나는 튜더의 초청을 받아 이 세기의 게임에 참가해 지중해 위의 ‘비바 라 비다’호에서 경기를 바라보게 되었다. 약한 비가 바람에 계속 날렸다. 이날 경기에 스위스 팀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아메리카스 컵은 리그와 토너먼트가 혼합된 방식으로 운영된다. 37회 대회에는 총 6개팀이 참가했다. 전년 대회 우승팀 뉴질랜드가 우승컵을 지키는 ‘디펜더’, 컵을 노리는 도전자 ‘챌린저’가 스위스,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팀이다. 이 6개 팀이 리그처럼 1 대 1로 승부하며 승점을 매긴다. 전년 대회 우승 팀인 뉴질랜드를 뺀 5개 팀 중 꼴찌를 제외한 4개 팀이 준결승에 오른다. 일단 꼴찌를 피해야 한다.
내가 바다 위에 있던 순간에는 스위스가 꼴찌였다. 공동 꼴찌는 프랑스. 이번 경기가 스위스와 프랑스였으니 여기서도 지면 스위스는 탈락 가능성이 짙어진다. 즉 그 대회는 어느 면에서 보면 이번 본선의 분수령이었다. 나를 초청해준 회사가 응원하는 팀이 지는 걸 원치 않았다. 취재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게 뻔하니까. 아무래도 스위스를 응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바람이 부는 2층 데크에 서양인들과 앉아 경기를 지켜보았다.
막상 보니 요트 레이스는 문외한에게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유를 정리해보았다.
1- 빠르다. 아메리카스 컵은 말하자면 바다 위의 F1이다. 이번 대회 요트 규격인 AC75의 이론적 최고 속도는 시속 50kn(킬로노트), 환산하면 시속 90km에 달한다. 동력 없이 운용하는 돛단배인데 말이지. 물 위를 떠서 달리는 요트를 보며 ‘인류가 여기까지 왔나 ’라는 생각을 몇 번 했다.
2- 멋지다. 아메리카스 컵 요트 사이즈는 AC75 규격으로, 75는 75피트라는 이야기다. 약 30m 남짓인 보트가 늘씬하게 바다를 달리는 모습에는 초현실적인 멋이 있다. 생김새도 내가 알던 어떤 경주용 요트와도 다르다. 옛날 애니메이션 <사이버 포뮬러>의 머신들을 닮았다. 그 선체 양옆으로 고속 상황에서 배를 띄워 올리는 수중익(하이드로포일)이 달린다. 말 그대로 날개 달린 돛단배다. 내가 어린애라면 디자인 보고 되게 좋아했을 것 같다. 미래적이고 날렵한 디자인은 어린이의 본능을 자극한다.
3- 다양하다. 아메리카스 컵 요트는 F1 못지않게 규정이 많다고 한다. 그 결과 전체적인 실루엣은 비슷하면서 유체역학에 최적화된 디자인의 요트가 6종 나오게 됐다. 수수하면 수수한 대로, 복잡하면 복잡한 대로 각기 고유한 매력이 있다.
기술은 발달했고 데이터는 이미 아주 많다.
그러나 그 순간 바다 위에서 판단하고 키와 돛대를 움직여
최고 속도로 바다를 내달리는 건 인간이다.
4- 변수가 많다. 이제 6개 팀의 요트 성능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차이를 만드는 건 결국 자연환경과 인간의 판단이다. 아메리카스 컵은 바람을 타고 달리는 돛단배 경주이므로 바람 방향 따라 코스가 4개다. 풍향과 파고, 날씨에 따라 조종사는 끊임없이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 판단에 따라 (역시 인간의 힘과 판단으로) 돛대가 돌고 배가 움직인다.
여기서 대회의 아름다움이자 재미가 나온다. 기술은 발달했고 데이터는 이미 아주 많다. 그러나 그 순간 바다 위에서 판단하고 키와 돛대를 움직여 최고 속도로 바다를 내달리는 건 인간이다. 발달한 스포츠 중계 기술 덕에 다양한 메타데이터가 스크린에 컴퓨터 게임 화면처럼 뜬다. 팀원은 8명, 그중에서 항해사가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다. 순풍 혹은 역풍 사이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순간의 선택이 쌓여 레이스 결과가 결정된다.
결과적으로 스위스는 이 경기에서부터 대역전을 시작했다. 배는 일직선이 아닌 갈 지(之)자 형상의 코스를 그리며 순항과 선회를 반복한다. 스위스는 처음부터 빨랐고 프랑스는 가장 중요한 첫 스퍼트에서 뒤처졌다. 순식간에 둘의 거리가 1000m 넘게 차이 났다. 그 차이는 끝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스위스는 중요한 승리를 거뒀다.
이날 경기는 스위스에게 분수령이 되었다. 이날부터 스위스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 프랑스와의 꼴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우리가 탄 보트도 중계가 끝나고 알링기 레드불 레이싱 팀의 도크로 돌아가고 있었다. 튜더 담당자가 “클럽하우스로 돌아가 승리의 분위기를 느껴봐도 좋다”고 말했지만 저널리스트 16명 중 그걸 느끼러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비바람과 배멀미 때문이었다.
요트 경기와 시계
“사람은 자연을 이길 수 “사람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 다음 날인 9월 4일 만난 엔지니어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연 앞에서 이보다 맞는 말도 없다. 9월 4일 경기는 예상치 못한 뇌우로 취소되었다. 스위스 팀이 꼴찌를 벗어날 기회인 미국 팀(이탈리아와 영국에 밀린 3위였다)과의 경기가 하루 밀렸다. 출장 일정은 9월 4일까지였기 때문에 우리의 경기 관람도 거기에서 끝났다. 대신 경기를 준비 중인 알링기의 실물을 볼 귀한 기회를 얻었다. 여기서 오늘날 초고속 요트의 성능을 만드는 수중익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의 요트가 이렇게 빨라진 비결은 선체 양편의 수중익 역할이 크다. 배의 속도가 높아지면 수중익 덕에 선체 전체가 뜬다. 그럴 때 배의 속도가 간선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가까울 만큼 빨라진다. 이번 아메리카스 컵 대회 요트 규격인 AC75급 요트의 이론적 최고 속도는 시속 50kn, 육지 최고 속도로 환산하면 시속 93km에 육박한다. 실제로 이번 대회에서도 시속 49kn가 넘는 속도가 나온 경기가 몇 번 있었다.
“아메리카스 컵은 바다 위에서 하는 경기이자 테이블 위에서 하는 경기라고도 해요.” 이날 만난 엔지니어가 재미있는 표현을 했다. ‘테이블 경기’란 룰 협상을 말한다. 아메리카스 컵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승자독식, 승자가 룰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요트 규격, 경기 방식, 경기 주기 등 상당수의 디테일까지도. 예를 들어 이번 본선에서는 자동적으로 결승 진출하니까 본선에 참가할 필요가 없는 뉴질랜드까지 총 6개 팀이 경합했다. 이건 뉴질랜드에게 유리하다. 경기 경험을 쌓고 다른 팀의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뉴질랜드의 뜻대로 진행됐다. 전번 대회 우승자니까.
스포츠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나 아메리카스 컵에는 그런 면이 더욱 강했다. 인생의 많은 승부는 승자독식이고 ‘테이블 위에서 하는 경기’다. 불공평한 게임이다. 그 면에서 승자에게 룰을 매길 권한을 많이 주는 아메리카스 컵에는 인생의 잔인한 법칙이 적용된다. 대신 그 불공평한 룰 사이에서도 누군가는 이겨낸다. 기회를 노리고 들어와 남다른 결과를 움켜쥔다. 1987년의 호주나 2003년의 스위스처럼.
그리고 탁월함에는 그 자체로 고유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누구나 알아본다. 바다 위에서 썰매처럼 미끄러지는 AC75 요트를 보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솟아난다. 요트들은 제한된 조건과 첨단 기술 사이에서 태어나 특별하다. 오늘날의 요트는 수십 명 단위의 디자인 팀과 카본 등 신소재로 만들어진 조선공학의 결정체다. 수중익도 배터리를 통해 날개처럼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 배의 주동력은 여전히 풍력이다. 1851년 대서양을 건넌 아메리카호와 같은 에너지원으로 배가 움직인다.
요트가 탈 수 있는 바람은 순풍 혹은 역풍뿐이다. 어떤 바람을 맞아 배를 얼마나 돌리고 돛을 얼마나 펴는지에 따라 배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무풍이 안전하겠으나 바람이 없으면 배가 움직이지 않는다. 배가 빠르게 가려면 결국 바람이 세야 한다. 좋은 배를 준비하고 항해술을 충실히 습득한 뒤 강한 바람 속에서 냉정히 컨트롤해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기술의 정신
경기를 보고 나니 튜더를 비롯한 고급 손목시계 회사들이 아메리카스 컵을 후원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원양 항해와 기계식 시계는 서양 근대 문명의 근간이다. 서양인은 돛단배로 원양 항해를 시작해 해양 제국을 만들었다. 원양 항해의 필수 장비 중 하나가 현위치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해상 시계였다. 이제 GPS가 위치를 알려주고 수소 엔진이 배를 움직이지만 요트와 기계식 시계는 현대 문명의 트로피로 남아 있다. 스포츠처럼 여전히 같은 규칙으로 배와 시계를 만들고, 대신 혁신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혁신한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요트와 시계다. 요트는 빠르고 날렵하다. 시계는 튼튼하고 정확하다. 그리고 둘 다 탁월함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이 있다. 기술의 정신이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고, 그 탁월함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기꺼이 비싼 값을 지불하며 ‘럭셔리 비즈니스’가 성립한다. 튜더의 브랜드 슬로건인 ‘본 투 데어(과감한 도전)’는 알링기 레드불 레이싱의 정신과 닿아 있기도 하다. 호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해상 요트 대회에 나간다니 실로 과감하지 않은가.
기사를 작성하는 동안 라운드가 마무리되었다. 스위스는 꼴찌에서 벗어나 4개 팀이 남는 세미 파이널에 진출했다. 탈락은 프랑스. 스위스는 4위로 진출했지만 마지막 라운드에서 그전까지 본선 1위였던 이탈리아를 꺾으며 점차 깨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덕에 이번 대회는 더욱 흥미로워졌다. 본선 1위는 아메리카스 컵의 창시자 영국이다. 이탈리아도 본선 내내 1위였을 정도로 강했다. 최대 우승 팀 미국도 안정적인 성적을 보였고 스위스의 알링기 레드불 레이싱은 본선 후반에 각성했다. 누가 우승하든 제37회 아메리카스 컵은 대단한 드라마가 될 것이다.
아메리카스 컵
아메리카스 컵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이벤트다. 1851년 시작해 올림픽과 월드컵보다 역사가 길다. 종목은 보트 레이스. 돛단배 두 척이 특정 지점을 더 빨리 돌아오면 이기는 경기다. ‘아메리카’스 컵인데 대회는 영국에서 시작했다. 1851년 세계 박람회를 맞아 영국인이 자신들의 앞바다인 와이트섬을 한 바퀴 도는 대회에 뉴욕 요트 클럽(NYYC)을 초청했다. 미국의 ‘아메리카’호가 대서양을 건너 그 대회에 참가해 영국의 모든 배를 제치고 1등을 했다.
경기가 끝나고 나눴다는 여왕과 신하들의 말이 유명하다. 여왕이 우승 팀을 물으니 신하들이 미국의 아메리카라고 답했다. 여왕이 놀라 2등을 물으니 신하가 답했다. “2등은 없습니다, 폐하.” 이때 만들어진 것이 아직도 이어지는 아메리카스 컵의 기조다. 우승 팀이 자기 팀 앞바다에서 도전자를 상대한다. 다른 건 1위가 정한다. 2등은 없다. 이후로 미국은 무려 132년을 우승하며 스포츠 대회 역사상 최장기간 우승 팀이 된다.
132년간의 미국 우승을 끝내버리고 우승자가 된 팀은 영국이 아닌 호주다. 이 기막힌 이야기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세기의 레이스>로 나와 있다. 사실 이 대회에 참관하기 전 내가 알던 아메리카스 컵에 대한 정보도 이것이 거의 전부였다. 다행히 현장에 가보니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것 같았다. 미국에서 온 시계 저널리스트 오렌은 뉴욕 요트 클럽의 고향 뉴욕에서 자라 지금 LA에 사는데도 “내가 아는 것도 그(다큐멘터리에서 본)게 전부야”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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