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즈의 힘
01 Editor 김종훈
내게 미술이란 익숙하지만 먼 존재다. 살아오면서 그 존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딱히 친밀해지지 않았으니까. 전시야 물론 간간이 봤다. 그렇다고 안목이 높아질 정도는 아니다. 그냥 본다. 알고 보면 더 좋겠지만, 모르고 봐도 좋을 수 있는 게 미술이니까. 때로 잔잔한 마음에 파문이 일기도 하고,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기도 하면서. 그 정도 거리감으로 살아왔다. 한동안 연락하다가 소원해지기도 하고 다시 연락하는 고등학교 동창 같은 거리감이랄까. 아마 대부분 그럴 테다. 딱 그 정도 거리감으로.
그런 거리감이 확 좁혀진 듯 보이는 시점을 발견했다. 몇 년 전부터 그랬다. 어느 한 기간, SNS에 미술품 앞에서 찍은 사진이 늘어났다. 주변에 유명한 사람은 모두 그곳에 있는 듯했다. ‘인증샷’이 이어졌다. 내 거리감은 여전했지만, 그들의 거리감은 한층 밀접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이렇게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 그들이 올린 포스트 아래에는 태그라인이 하나 붙어 있었다. ‘#프리즈서울.’ 내 기억 속에 프리즈 서울이 박힌 순간이었다.
프리즈 서울은 올해 3회째다. 이번에는 SNS를 통해서가 아닌 실제 가서 보기로 했다. 우선 프리즈에 대한 기본 정보부터 살폈다. 프리즈는 영국 런던에서 태동했다. 첫 발화점은 1980년대 영국 현대미술을 이끌 젊은 예술가들이었다. ‘프리즈(Freeze)’란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다. 전시는 반향을 일으켰고, 그걸 흥미롭게 본 젊은 미술 평론가가 발음이 비슷한 ‘프리즈(Frieze)’로 바꿔 잡지를 만들었다. 1991년 일이었다. 창간호 표지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 데이미언 허스트는 발화점이 된 ‘프리즈’ 전시에 참여한 작가이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를 조망하는 새로운 잡지랄까. 그 잡지가 지금의 국제 아트페어로 성장했다. 런던을 넘어 뉴욕, LA 그리고 서울까지. 지금도 프리즈는 아트페어뿐 아니라 세 가지 잡지 형태로 나온다. 예술 잡지가 국제 아트페어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놀랐다. 그럴 수 있는 시대였겠지만, 그 과정 자체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프리즈는 아트바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트페어가 됐다. 영웅 서사를 보는 기분이다.
우려와 기대
한국에서 열리는 프리즈 서울은 조금 독특하다. 키아프 서울과 함께 열리는 까닭이다. 키아프 서울은 한국화랑협회가 여는 아트페어다. 국내 갤러리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장이다. 물론 외국 갤러리도 참여한다. 그럼에도 주최 협회에서 알 수 있듯 국내 갤러리가 주축이다. 해외 아트페어와 국내 아트페어가 함께해 시너지를 내겠다는 의미다. 부끄럽지만, 키아프가 23년이나 열렸는지 몰랐다. 미술과 나의 거리감을 알 수 있다. 프리즈 서울에 관심이 생기니 키아프도 보였다. 중요한 지점이다. 나처럼 알게 된 사람도 많을 거다. 이것은 프리즈 서울에 득일까, 키아프 서울에 득일까. 공동 기자회견에서 둘의 연합이 계속 이어질지 한 기자가 묻기도 했다. 지난 2회 동안 프리즈 서울에 쏠린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은 까닭이다. 어렴풋한 긴장도 느껴졌지만, 어쨌든 둘은 같이 열린다. 어느새 3회째 함께했다. 애초 5년 계약을 맺었다. 프리즈 서울은 해외 갤러리를 중심으로 국내 갤러리도 참여한다. 키아프 서울은 국내 갤러리를 중심으로 해외 갤러리도 참여한다. 내수시장과 해외시장 차이려나. 어쩔 수 없이 주목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대신 키아프는 더 넓은 공간과 더 많은 작품을 선보인다. 관람자 입장에선 함께할수록 볼 게 많긴 하다.
“숫자 그 자체가 화제가 되잖나. 이번에는 그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킬 작품은 없었다. 1회라는 특이성을 감안하더라도, 점점 화제성을 담보한 작품이 줄어드는 건 생각해볼 문제다. 충분히 던질 만한 질문이었다.”
중요한 건 둘 모두 아트페어라는 점이다. 아트페어는 판매가 목적이다. 전시 역할도 하지만 결국 많이 팔아야 다음을 이어나갈 수 있다. 시장이 크다고 잘 팔릴까, 각자 색깔을 또렷하게 하는 게 잘 팔릴까. 주목도를 높이는 것과 주목도를 빨아들이는 건 다른 얘기이기도 하고.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도 이런 우려를 반영한 결과일 게다. 프리즈 서울에 관한 우려 섞인 질문도 있었다. 첫 번째보다 무게감 있는 작품이 점점 줄어든다는 우려. 1회 프리즈 서울에서 워낙 걸출한 작품을 선보이긴 했다. 파블로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 프랜시스 베이컨. 누구나 알 만한 작가의 수백억대 작품을 내걸었으니까. 숫자 그 자체가 화제가 되잖나. 이번에는 그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킬 작품은 없었다. 1회라는 특이성을 감안하더라도, 점점 화제성을 담보한 작품이 줄어드는 건 생각해볼 문제다. 전체 매출 규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 충분히 던질 만한 질문이었다.
질문을 뒤로하고 직접 보러 갔다. 숫자에 얽힌 문제는 나보다 운영하는 쪽에서 신경 쓸 일이니까. 우려든 뭐든 일단 지금은 열렸으니까. 가늘어진 눈초리를 거두고 프리즈 서울 그 자체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찾은 날은 9월 5일. VIP 프리뷰 다음 날이었다. 일반 관객은 오후 3시부터 입장할 수 있었다. 오전 시간을 노려 돌아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루 전인 프리뷰와 일반 공개 그 사이의, 딱 사람이 적을 시간이었다. 프리즈 서울은 코엑스 3층을 썼다. C홀과 D홀을 이어 갤러리별 부스를 배치했다. 산책하듯 봐도 꽤 시간이 걸릴 규모다. 물론 코엑스 1층 A홀, B홀을 비롯해 2층까지 쓰는 키아프 서울의 규모가 더 컸다. 그런데도 1, 2회에는 사람들이 주로 프리즈 서울에 몰려 상대적으로 더 비교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일단 5일에는 그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두 번이나 함께한 경험이 있으니까. 키아프 서울도 나름의 대책을 마련하고 개선할 시기를 보냈다. 자극을 받으면 변화한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런 변화 역시 프리즈 서울의 영향력일지 모른다.
주목도와 영향력
아트페어는 미로 같다. 규모가 클수록 더욱 그렇다. 수년 전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바젤을 보면서도 느낀 바다. 갤러리 부스는 하얀 칸막이를 세워 만든다. 부스 크기는 차이 나도 구축 방식은 공통적이다. 커다란 공간에 흰 벽과 흰 부스가 반복해서 이어진다. 그 속에서 이정표는 각기 다른 작품이다. 이 점이 아트페어의 재밌는 점이다. 전시가 주목적인 비엔날레는 전시 공간 자체도 신경 쓴다. 공간 디자인은 작품 배경이 되기도 한다. 아트페어는 간결하다. 판매해야 하니까. 이런 건조한 방식이 오롯이 작품에 집중하게 한다. 판매가 목적인 아트페어가 작품 자체를 감상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라니.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점에선 당연하다. 작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에겐 다른 요소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다른 요소가 영향을 미치면 오히려 거슬릴 수 있다. 오직 작품 그 자체로 승부한다. 아트페어에서 작품을 보면 좋은 점이다. 프리즈 서울에서도 미로 속에서 작품을 이정표 삼아 다녔다.
“커다란 공간에 흰 벽과 흰 부스가 반복해서 이어진다.
그 속에서 이정표는 각기 다른 작품이다. 이 점이 아트페어의 재밌는 점이다.
전시 공간 자체도 신경 쓰는 비엔날레와 다른 지점이기도 하다.”
프리즈 서울을 보니 몇 가지 인상적인 점이 눈에 띄었다. 우선 유명 갤러리 부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타데우스 로팍, 가고시안, 화이트 큐브, 하우저앤워스, 데이비드 즈워너 등등. 국내 유명 갤러리 역시 사람이 많았다. 국제갤러리, 갤러리 현대 등등. 프리즈 서울 안에서도 유명세로 인한 쏠림 현상은 어쩔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브랜드 부스다. 브랜드가 작가와 협업해 작품을 선보였다. 가장 큰 규모는 메인 스폰서인 LG전자의 브랜드 부스다. 미술가 서도호와 건축가 서을호 형제의 협업 작품을 공개했다. 쇼메는 김희찬 작가와 협업한 조형 작품을, 브레게는 프랑스 출신 작가 노에미 구달의 작품을 공개했다. BMW도 빼놓을 수 없다. 꾸준히 선보인 아트카 시리즈의 신작을 전시했다. 브랜드 부스가 많다는 건 그만큼 프리즈 서울을 주목한다는 뜻이다. 외부에서 하는 브랜드 행사는 더 많다. 프리즈 서울 기간에 이런저런 행사를 한다는 메일이 수북하게 쌓였다. 애초 프리즈 서울은 부대 행사와 파티가 많다. 갤러리가 모인 삼청동, 한남동, 청담동에서 ‘프리즈 나이트’가 열렸다. 프리즈 서울이 열리는 기간에 서울이 미술을 화두로 들썩인 건 분명하다. 작품 판매 외적으로도 산업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얘기다.
프리즈 서울이 끝나자 작품 판매 소식이 들렸다. 대표 갤러리별로 작품이 얼마에 팔렸는지 공개됐다. 몇몇 작품이 20억~30억원에 팔렸지만, 대체로 10억대 미만으로 팔렸다. 대단한데? 이렇게 생각했지만 전만 못하다는 평이다. 어쩔 수 없다는 평도 있다. 불경기니까. 첫 번째 프리즈 서울이 국내 미술 시장을 1조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확실히 유명 국제 아트페어의 파급력은 컸다. 반면 작년에는 6600억원대로 줄었다. 올해는? 이런 변화가 앞서 공동 기자회견 때 우려 섞인 질문을 하게 했을 게다. 하지만 호황기와 비교하는 건 무리다. 호황기는 특별한 순간이니까. 매출을 떠나 올해 보여준 프리즈 서울의 전략에 주목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프리즈 서울이 초고가 작품보다 접근성 좋은 작품을 많이 선보였다는 점이다. 화제성은 뒤로하고 내실을 기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아시아 시장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합리적인 변화로서.
프리즈 서울은 끝났다. 3회에도 프리즈 서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프리즈 서울을 중심으로 앞뒤로 여러 미술 행사가 열렸다. 바로 비엔날레도 이어졌다. 9월, 한국은 분명 아트라는 화두가 관통했다. 프리즈 서울이 세 번 열리면서 일어난 변화다. 그 중심에 프리즈 서울이 있음을 부인하긴 힘들다. SNS에서 ‘인증샷’의 배경으로 소비되더라도.
안녕 프리즈
02 Editor 주현욱
먼저 고백해버리는 편이 낫겠다. 나는 내 돈 주고 미술관에 가지 않는다. 뒷짐 지고 그림 보는 일이 왠지 거창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정적인 미술관보다는 야구장에서 치킨 뜯으며 시끌벅적하게 경기를 지켜보는 편이 더 즐거웠다. 내게도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작가를 찾거나 좋아해보려는 노력을 한 적은 없다. 3년 전 프리즈가 처음 서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저 요란스럽게 느껴졌다. ‘세계적인 아트페어’라는 헤드라인 아래 쏟아지는 수많은 기사와 보도자료도 그저 피로감을 더할 뿐이었다.
이번 프리즈 기사가 기획회의를 통과하자, 공부부터 해야 했다. 도대체 프리즈가 어떤 행사인지, 왜 이렇게 프리즈가 유명한지는 알아야 하니까. 프리즈 서울 홍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프리즈는 뭐 하는 행사예요? “쉽게 말해서 백화점이라 생각하면 돼요. 백화점 1층 가보면 유명한 럭셔리 브랜드들이 있잖아요. 샤넬, 루이 비통, 디올, 에르메스 구찌 등등. 프리즈도 똑같아요. 화이트 큐브, 가고시안, 글래드스톤 갤러리, 페이스 갤러리, 리슨 갤러리처럼 세계적인 갤러리들이 부스를 차리고, 소속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요. 물론 그보다 규모가 작은 갤러리도 참여하고요. 프리즈와 백화점의 공통점은 간단명료합니다. 작품을 파는 것.”
프리즈에 대해 공부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프리즈는 잡지로 시작했다. 1991년 매튜 슬로토버, 아만다 샤프, 톰 기들리가 영국에서 잡지 <프리즈>를 처음 만들었다. 지금 주목해야 할 신진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 그것이 <프리즈>가 탄생한 이유다. 프리즈는 자신의 이름을 건 아트페어를 2003년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처음 개최했다. 이후 뉴욕,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아트페어를 열었고, 네 번째 도시로 서울을 선택했다. 잡지 에디터로 일하는 내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만일 <아레나>가 플리마켓 ‘아레나’를 열고, 그 플리마켓이 20년 뒤 런던에서 열린다? 막연한 상상이지만 왠지 고무적인 기분이 들었다. <프리즈>는 여전히 발행 중이다. 올해 9월 발행된 <프리즈> 이슈 245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화가, 마를렌 뒤마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길을 잃는 즐거움
9월 4일 오전 11시 삼성동 코엑스 앞은 한국인보다 외국인으로 붐볐다. 이날은 프리즈 서울 프리뷰 데이로, 초청권을 받은 VIP들만 먼저 들어갈 수 있는 날이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백화점 VVIP처럼 보이는 외국인들이 분주히 코엑스로 향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프리즈 기간이 되면 서울 인근 공항에는 전세기가 들어오고, 서울 시내 럭셔리 호텔의 투숙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그림 사는 데 수십억원을 쓰려고 한국까지 날아왔겠구나. 그 행렬에 섞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내심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프리즈 전시장이 마련된 곳은 코엑스 3층.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전시장에 도착하자 어깨너머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낯선 언어가 들렸다. 프리즈 전시장은 각 갤러리들이 공간을 꾸리고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을 선보이는 식으로 운영된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여느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개념적으로는 노량진수산시장과도 큰 차이가 없었다. 파는 물건이 다를 뿐. 쉽게 말은 했지만 정작 전시장에 들어서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코엑스 3층은 ‘C홀’과 ‘D홀’로 구성된다. 두 공간은 합쳐서 1만7629㎡(약 5332평)가 넘지만, 남는 공간 없이 갤러리 부스로 가득 찼다. 차라리 전시장보다 그림으로 가득한 미로에 가까웠다. 여기서 지도는 의미가 없겠구나. 나는 입구에서 받은 안내서를 주머니에 찔러 놓고 그저 발이 향하는 대로 헤매보기로 했다.
이때부터 프리즈의 재미가 시작됐다. 예를 들어보자. 평생 흰쌀밥만 먹고 살아온 남자가 있다. 남자는 허기를 채우려 시장에 들렀다. 그런데 웬걸. 서울의 광장시장부터 런던의 버로우 마켓, 방콕의 딸랏롯파이 야시장, 오사카의 구로몬 시장, 뉴욕의 유니언 스퀘어 그린 마켓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한데 뒤섞여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는 게 아닌가. 평생 쌀밥만 먹어온 사람은 자신의 음식 취향은 물론, 어떤 음식이 어떤 맛을 내는지, 쌀밥에는 어떤 음식이 어울리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음식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발걸음을 멈추다 보면 자신도 몰랐던 ‘내 입맛’을 알게 된다.
“이곳에서 구입한 그림 대부분은 누군가의 집에 걸릴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그림이 조금 달리 보인다.
안방에 걸어둘 커튼을 고르고, 욕실의 타일 색깔을 고르듯 생각하게 된다.”
프리즈가 그랬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는 전 세계 30개 국가의 갤러리 110곳 이상이 참가했다. 나는 수억원짜리 작품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중 어떤 작품이 가장 비싸고, 가장 유명한 작가의 작품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정보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만 있을 뿐이었으니까. 나는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하나둘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고 스마트폰 사진첩을 들여다봤을 때, 그간 몰랐던 나의 취향과 안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나는 조각보다는 회화를, 풍경화보다는 인물화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구나. 프리즈의 가장 큰 재미는 수많은 작품을 ‘일관성 없이’ 한데 모아둔 데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프리즈에서 작품을 살 생각이거나, 미술에 익숙한 관람객에게는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잡지 <프리즈>가 처음 만들어진 이유와 같을 것이다. 지금 미술계에서 떠오르는 작가와 트렌드를 한 공간에서 확인하는 것. 프리즈에는 비교적 최근 수년 안에 만들어진 신작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주인이 없는 작품이어야 하니까. 유명한 작품들은 진즉 컬렉터의 손에 들어갔을 테다. 요즘 미술계 트렌드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거장의 ‘회고전’보다 ‘아트페어’를 가는 게 낫다. 동시에 프리즈는 훗날 거장이 될 작가의 작품을 가장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프리즈 서울은 올해 독일에서 열린 ‘유로 2024’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지금 가장 세련된 축구 전술이 무엇인지, ‘차세대 리오넬 메시’가 될 재목이 누구인지 점쳐볼 수 있으니까.
국적에 따라 선호하는 작품의 형태가 달라진다는 설명도 흥미로웠다. 이곳에서 구입한 그림 대부분은 누군가의 집에 걸릴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그림이 조금 달리 보인다. 안방에 걸어둘 커튼을 고르고, 욕실의 타일 색깔을 고르듯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기에는 좋지만 사기에는 애매한 작품도 생긴다. 예를 들면 너무 큰 작품들. 서울의 펜트하우스에 사는 사람과 유럽 고성에 사는 사람에게는 ‘내 집에 걸어두고 싶은 그림’ 기준이 다를 것이다.
당신이 좋아할 법한 거의 모든 것
프리즈를 찾은 이틀 동안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 돈 주고 방문하라면 할까? 가격이 중요할 것이다. 이번 프리즈 서울은 9월 4일부터 7일까지 나흘간 열렸다. 이 중 프리뷰를 포함해 나흘 모두 참관할 수 있는 티켓은 25만원, 1일 입장권은 8만원, 1일 학생 입장권은 5만5000원이었다. 요즘 영화관 티켓 가격은 주말 2D 상영관 기준 1만5000원이다. 그걸 감안하면 일일 8만원은 분명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가성비’를 따져본다면 마냥 비싼 가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 프리즈에서는 영화를 보는 두 시간보다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곳 중 하나는 런던베이글뮤지엄 팝업스토어였다. 런던베이글뮤지엄은 2021년 처음 오픈했고 서울 시내에 매장은 3곳이나 있지만, 여전히 이곳 베이글을 먹기는 쉽지 않다. 줄이 너무 길다. 프리즈가 열리는 나흘 동안 팝업스토어는 가장 줄을 짧게 서고 먹을 수 있는 런던베이글뮤지엄이었다. 런던베이글뮤지엄 때문에 프리즈 입장 티켓을 사는 사람이 있겠냐만, 관람하러 온 이들에게는 확실한 즐길 거리 중 하나였다.
평소 자동차를 좋아하는 내게도 반가운 공간이 있었다. BMW는 프리즈 서울에서 자신의 스무 번째 아트카를 공개했다. 현대 예술가 줄리 메레투와 협업해 만든 차로, BMW M 하이브리드 V8 레이스카에 작가의 아트워크를 둘렀다. 자동차 애호가들에게 BMW 아트카가 지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BMW는 1975년부터 아트카를 만들어왔다. 미국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를 시작으로 로이 릭턴스타인, 앤디 워홀, 데이비드 호크니, 제프 쿤스 등 거장들과 함께 지난 49년간 아트카를 만들어왔다.
전 세계에 단 한 대뿐인 BMW를 보는 것. 누군가에게는 프리즈를 찾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프리즈에는 많은 돈이 모인다. 그만큼 많은 브랜드들이 참여하고, 모이는 사람들도 많다. 프리즈의 중심에는 미술이 있지만, 그 테두리에는 우리가 ‘주말을 알차게 보냈다’ 느끼게 할 법한 거의 모든 즐거움이 있다. 그것이 나도 몰랐던 미술에 대한 애정를 발견하는 것이어도 좋고, 처음 맛보는 런던베이글뮤지엄이어도 좋고, 그저 더운 날씨를 피해 산책하며 사람 구경 하는 것이어도 좋다. 분명한 사실은 ‘영화관 5번 갈 돈’ 정도로 단정 짓기에는, 프리즈에서 보내는 하루가 훨씬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