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배우를 꿈꾼 게 연말 시상식 때문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만큼 작년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받을 때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화면이 천천히 흘러갈 때가 있잖아요. 제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웅웅대면서 아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순간 어렸을 때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TV 앞에 앉아서 귤 까먹으면서 연말 시상식 보던 제 모습이요. 머릿속으로 수없이 상상했던 장면이니까요. 그때 TV로 보던 배우들 앞에서 상을 받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이번 인터뷰 앞두고 6년 전 <아레나> 인터뷰를 찾아봤어요. <마녀>가 공개된 직후였고, 연기를 시작하던 시기였죠. 본인만이 느끼는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있을까요?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웃음) 6년 전이면 오디션 한창 볼 때였거든요. 목표를 향해 달려나간다는 생각 때문에 행복한 시기였어요. 지금보다 겁도 없었고요.
오디션을 정말 많이 봤다고 들었어요. 배우님만의 오디션 잘 보는 노하우가 있나요?
제가 오디션을 많이 보기도 했지만, 진짜 많이 떨어져도 봤거든요. 하지만 ‘이러다 나 배우 못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당당해야 오디션에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후회 없이 내가 보여주고 싶은 연기,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질문 다 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오디션에 나가니까 붙더라고요.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이 토마토죠.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도 토마토가 자주 나오고요. 토마토 좋아하세요?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공개되기 한 달 전에 토마토 사진으로 바꿨어요. 그전에는 <서진이네2>에서 채소 들고 있는 프로필 이미지였거든요. 그전까지는 꽤 오랫동안 엄마가 저한테 써주셨던 편지 사진을 프로필로 걸어뒀어요. 아마도 다음 작품이 나올 때쯤이면 또 프로필 사진이 바뀌지 않을까요?(웃음)
시청자가 이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보면서 ‘고민시 화보집’이라고 하잖아요. 배우님은 사람들이 ‘유성아’를 보면서 어떻게 느꼈으면 했나요?
유성아는 살인마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살인마의 이미지와는 달랐으면 했어요. 이 친구의 행동이 보고 싶어져야 하니까요. 위협적인 느낌이 덜했으면 했죠. 김윤석 선배님이 맡은 ‘전영하’가 충분히 제압할 것 같은 왜소한 이미지이길 바랐고요. 그래야 유성아의 도발이나 위협에 휘말릴 때 더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테니까요.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해치울 것 같은 살인마인데, 그러지 못하는. 외적인 모습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썩어 있는 인물로 보였으면 했어요. 그래서 다이어트도 많이 했어요. 등 근육이나 뼈가 더 잘 두드러져서 동물적인 느낌이 났으면 했거든요.
살을 빼는 건 감독님이 권하셨나요?
아니요. 제가 그런 느낌을 더 내고 싶어서 스스로 뺐어요. 성아는 그림 그리는 예술가 기질이 있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모든 부분에서 예민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아무리 연기일지라도, 살인마를 연기하면 유사 경험을 해보는 거잖아요. 그 과정에서 찝찝함이나 거리낌은 없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유성아는 자기 행동이 잘못됐다고 인지하지 못하거든요. 그냥 놀이인 거죠. 어린아이가 비눗방울 터뜨리듯 사람들을 죽이니까요. 애초에 캐릭터가 그런 감정을 못 느낄 테니 저 역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연기하려고 했어요.
평소 내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와 다른 캐릭터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연기하기 편한가요?
아무래도 저랑 비슷한 캐릭터가 수월해요. 하지만 저랑 정반대 인물을 연기해야 할 때는 더 재미있죠. 제가 평생 살아본 적 없고, 살아볼 일도 없을 인물을 연기하는 거니까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계속 궁금해지는 배우 있잖아요.
저도 늘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지금까지 맡았던 인물 중에 가장 달랐던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유성아도 저랑 달랐지만, <오월의 청춘> 명희가 많이 달라요. 명희는 너무 착하거든요.(웃음) 저는 명희가 자기보다 타인을 더 배려하면서 사는 게 안타까웠어요. 한 번쯤은 자기 자신을 돌봐줬으면 했어요. 그래서 더 슬펐고요.
배우분들은 본인 작품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경우도 있나요?
그럼요. 물론 저도 제가 나온 장면에는 잘 집중하지 못하는데요. <오월의 청춘> 볼 때는 정말 많이 울었어요. 실제 역사 속에 녹아든 이야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제3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스위트홈> 시즌 1 마지막에 오빠 부르는 장면이 있어요. 그 장면은 촬영할 때도 슬펐는데, 편집본으로 보니까 또 슬프더라고요.
평소 글 쓰는 것도 좋아하시죠. 요즘도 일기 쓰세요?
네 써요. 유독 일기로 기록하고 싶어지는 날들이 있어요. 뜻깊은 무언가를 느낀 날. 그럴 때는 그 감정을 잊지 않으려고 기록해두는 편이에요.
글을 쓴다고 하니 언젠가 각본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에 제가 글을 쓸 줄 알고 연출할 능력이 있다? 그럼 저는 배우 안 했을 것 같아요. 카메라 뒤에서 지휘한다고 할까요? 그걸 너무 해보고 싶어요. 경험을 더 쌓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쯤 해보고 싶어요. 각본도 좋고 연출도 좋아요.
저는 이번 <서진이네2>를 보면서 고민시는 다른 일을 했어도 무조건 잘했겠다 싶더라고요. 실제로 일을 잘해서 ‘황금인턴’이라는 별명도 얻었고요. 배우 이외에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배우 하고 나서는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앞서 말씀드렸듯 배우가 아닌 감독이나 극작가를 했다면 어땠을까 정도?
흥행 여부를 떠나 연기 커리어에서 분기점이 된 작품은 무엇인가요?
<오월의 청춘>인 것 같아요. 사실 제 첫 주연작은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애정이 많이 가요. 나오기 힘든 소재의 드라마였고, 역사 속 멜로 안에 저의 20대를 담아낼 것이 감사했어요.
관객으로서 선호하는 장르와 연기자로서 선호하는 장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둘 다 같은데요. 따뜻한 이야기를 보고 싶고, 저 역시 연기해보고 싶어요. 제가 2018년부터 정말 좋아하는 감독님이 한 분 계세요. 윤가은 감독님.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작품을 많이 연출하셨어요. 제 눈물 버튼이 아이들이거든요. 그냥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요. 어른들이 싸우는 것보다 아이들이 싸울 때 뭔가 더 느껴지더라고요. 아이들에게도 사회라는 게 존재하고, 서열이 있고, 영역이 있잖아요. 너무 순수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때로는 어른보다 더 많은 걸 아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정말 잘 담는 감독님이세요.
올해로 30대가 됐어요. 30대에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사극을 한 번도 안 해봤거든요. 정통 사극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엄마 역할. 그중에서도 미혼모. 저는 사회적으로 보살핌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질문이지만 저는 <서진이네2> 보면서 특히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어떤 메뉴가 가장 맛있었나요?
진짜 어려운 질문인데요.(웃음) 정말 모든 메뉴가 맛있었는데, 그중에서 두 가지 메뉴가 독보적으로 맛있었어요. 유미 언니가 만든 육전 비빔국수, 서준 오빠가 만든 닭갈비. 누군가 집에 초대할 일이 있으면 대접하고 싶은 메뉴예요. 정말 최고였어요.
앞으로 10년 뒤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기다려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고민시 작품 언제 나오지? 이번에는 고민시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저는 궁금증이 안 생기면 매력이 없어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계속 궁금해지는 배우 있잖아요. 저도 늘 궁금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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