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 생활 10년 차. 이토록 러닝이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곱씹어 본다. 2010년대 초반 서울의 러닝 크루가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직장 선배의 권유로 러닝 클럽에 가입했다. 직업, 거주지, 나이 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교집합이 없는 사람들이 매주 정해진 시간에 ‘러닝’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함께 구호를 외치고 땀을 흘리며 뛰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의 러닝 크루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기에, 러닝 브랜드에서 행사를 개최하면 5-6개의 크루가 또 하나의 팀처럼 삼삼오오 모여 행사에 임했던 기억도 있다. 일과 생활에 치여 러닝 크루를 탈퇴하고 혼자만의 러닝을 즐긴지도 어느덧 5년 차.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인류사의 굵직한 상처를 겪기도 했지만, 이는 ‘러닝'이라는 또 다른 새살이 돋으며 오늘날 러닝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러닝 크루와 문화를 구체적으로 정리한 내용이 없기에, 아카이브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동네 운동장만 뛰던 내가 ‘러닝 문화’라는 하나의 흐름 안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러닝 붐이 일어난 오늘날까지 꾸준하게 문화를 선동한 브랜드가 있다. 바로 나이키다. 나이키는 오늘날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러닝에 관심을 갖기 전부터 언제나 개성 있고 세련된 방식으로 한국 러닝 문화 성장에 씨를 뿌렸다. 나이키 홍대 매장 오픈을 기념한 러닝 이벤트, 광화문을 전력 질주로 가로지르는 스피드 런, 여의도 일대를 달리며 미션을 수행하는 대회까지 그 형태와 방식은 매번 러너들의 열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올해는 나이키 러닝화의 굵직한 기둥인 나이키 페가수스 탄생 40주년과 페가수스 41 출시를 기념해 이전과 남다른 규모의 특별한 레이스를 준비했다. 나이키가 올해 개최한 대회는 ‘나이키 런 제주 2024’. 제주도에서 진행하는 이번 대회는 4명이 한 조를 이룬 남성, 여성팀이 페가수스 41에 맞춰 제주도 동쪽 해안 41km를 나눠 달리는 대회다. 예선전은 여느 마라톤 대회를 방불케할 정도로 전국의 수많은 러너가 참가했다. 남성, 여성팀 각 35팀, 총 280명을 뽑는 자리에 총 720팀, 2880명인 약 10배에 달하는 러너들이 한곳에 모였다. 예선 방식은 800m를 가장 빨리 돌파하는 남, 여 각 35팀이 본선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800m를 2분대에 들어와야 안정적으로 결선에 갈 수 있었던 만큼 전국의 러닝 고수들이 모두 집결했다.
그간 나이키 러닝화를 견인해온 페가수스의 노고를 인정하듯, 이번 대회 규모는 지금껏 선보였던 대회와 사뭇 달랐다. 선발된 280명의 러너들은 나이키 스우시 로고가 랩핑 된 제주항공 전용기를 탑승해 여정에 나섰으며, 대회 베이스캠프인 카멜 커피 제주에서는 팀 포토 서비스, 응원도구 제작 프로그램, 해변 스트레칭, 스포츠 마사지 등 마치 페스티벌과 같은 다양한 러닝 이벤트를 누릴 수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 후 여러 이벤트를 자유롭게 즐김과 동시에 본격적인 대회는 오후 2시 30분에 시작됐다. 대회는 베이스캠프인 코난해변: 카멜커피를 시작으로 1번과 3번 주자가 김녕 해수욕장을 반환하며 11.1km를 달리고, 2, 4번 주자는 코난 해변: 카멜 커피를 시작으로 평대포구를 반환하며 9.4km를 달리는 코스다. 입상과는 무관하게 미디어팀 초청으로 참석했기 때문에 승부와 경쟁보다는 즐기면서 뛰자는 마음으로 대회에 참석했지만, 치열한 예선 결과와 대회장에 감도는 러너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과 열기 덕에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특히 이번 대회는 컷오프가 4시간이었기에, 주자 별로 1시간 안에는 들어와야 완주가 가능했다. 대회 시작 1시간 전부터 몸을 풀고, 30분 전부터 1번 주자들이 주로에 서기 시작하는데 왜 이리 가슴이 벅차오르고 울컥하는지. 그간 잊고 있었던 러닝에 대한 기쁨과 스포츠가 선사하는 특유의 에너지를 잊고 살았던 까닭에 이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졌다. 게다가 현장을 둘러보니 러너들의 얼굴과 자세에서 무결할 정도로 순수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들을 존중 할 수밖에 없었고, 나 또한 단순한 취재가 아닌 진심을 다해 대회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출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응원과 함성 소리가 바닷바람을 뚫고 코난 해변을 꽉 채웠다. 이번 대회의 또 한 가지 묘미는 베이스캠프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에서 실시간으로 팀별 순위가 공개 된 점이었다. 각 포인트를 지나는 팀원의 위치 파악은 물론, 현장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엎치락뒤치락하는 순위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얼마나 치열한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1번 주자가 도착하고 2번 주자가 나섰다. 1번과 같은 코스를 뛰는 3번 주자였기에 코스에 대한 조언을 구하며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강한 맞바람과 뜨겁다 못해 모든 수분을 증발시킬 것 같은 태양 그리고 야속하리만큼 잔잔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상당히 힘들다는 평이었다. 2번 주자들이 반환점을 돌고 실시간 순위가 공개될 때마다 경기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예선전 결과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몸에 열을 내기 시작하고 근육을 풀던 와중 드디어 달릴 차례가 왔다. 흔히 말하는 ‘대회 뽕'에 취해 오버 페이스 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지만, 신선한 해풍과 제주도 절경이 담긴 해안 도로를 달리니 살짝 오버 페이스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즐기면서 뛰자고 마음먹었지만, 본능적으로 승부욕이 발동됐다. 아무도 경계하지 않았지만 나 혼자 다른 러너들을 의식하며 이를 악물고 뛰었다. 역시 쉽지 않았다. 바닷바람은 상당히 밀도가 있어 맞바람이 불 때는 앞으로 치고 나가기 힘들었다. 그리고 오후 4시 제주도의 해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1번 주자가 조언했던 잔잔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달리니 서울에서 타던 따릉이가 그리워졌다. 이미 완주한 1, 2번 주자가 부럽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팀에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과거에 ‘풀 코스는 어떻게 뛰었을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해안 도로를 달렸다. 풀코스에서 40km를 지나고 남은 2.195km가 가장 고통스럽 듯, 10km 지점을 돌파하고 남은 1.1km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5분의 시간이 마치 50분처럼 흐르고, 길고 긴 생각 끝에 어느덧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4번 주자에게 어깨끈을 전달하고 나서야 드디어 안심하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쿨다운을 마치고 정신을 차리니 베이스캠프는 어느덧 축제의 장으로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기록에 상관없이 코스를 완주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모두가 충분히 기뻤으니까. 축제하면 빠질 수 없는 음악과 맥주 그리고 서울에서부터 공수한 재료를 직접 가지고 현장에서 조리한 유용욱바베큐연구소의 만찬까지. 모두가 피로를 잊은 채 마지막 주자를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 된지 2시간 30분이 흐른 오후 5시경 남성팀의 첫 완주자가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그리고 뒤이어 하나둘씩 경기 시작된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5시 37분경에는 여성팀 첫 완주자가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나이도, 성별도 그리고 예선전의 결과도 무의미하게 모두가 공평하게 완주의 승리를 맛봤다.
갈증과 허기를 채우고 기념사진을 찍으니 시상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번 대회는 남성 5팀, 여성 5팀이 입상자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며 부상으로는 나이키 러닝 제품 풀 세트와 우승 트로피를 대체해 팀 이름을 각인한 은장 바통을 전달한다. 재밌게도 남성과 여성 상위 5위 팀에는 모두 패자 부활전에서 올라온 팀이 포함돼 있었다. 스포츠가 왜 각본 없는 드라마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순간이었다. 남성팀 1등은 2시간 29분 25초 만에 완주한 ‘목동마라톤교실 S’, 여성팀 1등은 3시간 7분 33초에 골인한 ‘와이낫’이 차지했다. 각 1위 팀에게는 제주항공이 제공하는 발리 왕복 항공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남성 20명, 여성 20명 총 40명의 입상으로 행사가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잊고 있었던 개최 이유 ‘페가수스 41’ 출시에 맞춰 최후의 1인을 추가 발표했다. 그 기준은 나이키 러닝 애플리케이션에서 올해 가장 많은 누적 거리를 달린 이를 찾아 나선 것. 최후의 1인에 꼽힌 이는 9월 28일 기준 올해 4,108km를 달린 남성 러너였다. 얼추 계산해 보니 1월 1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약 16km를 달려야 얻을 수 있는 수치였다. 대회에 참석한 러너들은 그 수치가 나타내는 의미를 모두 알고 있었다. 매일 해가 뜨고 지듯 꾸준하게 달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땀방울이 일궈낸 방대한 훈련량이 얼마나 고된지 러너이기에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 있던 러너들이 보낸 환호와 박수 속에는 존경심은 물론 귀감을 주는 또 다른 자극에 대한 다짐이 담겨있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승자는 있어도 패자는 없었던 나이키 런 제주 2024가 마무리됐다. 돌이켜보니 러닝이 삶의 일부분으로 들어온 후 러닝이라는 스포츠가 이토록 만개했던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러닝에 푹 빠지고 사랑하게 될 줄 10년 전에는 몰랐으니까. 그리고 이 꽃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물과 씨를 뿌리며 한국 러닝 문화의 양분을 준 나이키의 역할이 분명 컸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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