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급성을 감안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찬다면 1000만원.
구형 익스플로러 1이 딱 그 정도 해요.
하나만 찬다면 그 시계를 고를 겁니다.
롤렉스치고는 투박해요.
자랑하는 느낌이 확실히 덜하죠.”
“865만원. 그게 제 상한가입니다.” 차종현은 <아레나>의 디지털 에디터다. 책상 너머로 지켜본 차종현은 불가사의한 남자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갖고 싶은 물건이 많다. 내게 불가사의한 건 그의 호기심이 아닌 구매력이다. 현재 차종현이 소장한 시계는 총 열네 개. 백설공주 옆 난쟁이 수보다 두 배나 많다. 직장인 차종현은 자신이 시계에 쓸 수 있는 최대 예산을 ‘865만원’으로 밝혔다. 어디서 나온 숫자일까?
“롤렉스 오이스터 퍼페추얼 36이 865만원입니다. 시계 가격이 500만원 넘어가면 난도가 확 올라요. 직장인에게는 확실히 쉽지 않죠. 제 시계 중 가장 비싼 것도 퇴직금으로 산 거예요.” 차종현은 6년 전 생애 첫 기계식 시계로 튜더 블랙베이 36을 구입했다. 당시 가격은 약 300만원. “지금 생각해도 살 떨려요. 시계에 300만원 태우는 게 맞나 싶었거든요. 지금처럼 시계를 잘 알지도 못할 때였어요.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잘한 일이었어요.” 튜더는 2018년 한국에 진출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튜더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가격도 지금보다 저렴했다. 6년이 지난 현재, 신형 블랙베이 36의 가격은 644만원이다.
나는 차종현에게 물었다. 왜 하필 오이스터 퍼페추얼입니까? 그는 예상 밖으로 꽤 현실적인 답변을 들려주었다. “웬만한 시계쟁이들은 다 롤렉스 좋아합니다. 오이스터 퍼페추얼은 롤렉스에서 기본 모델이에요. 가격 면에서도, 의미 면에서도. 보통 ‘롤렉스’ 하면 데이트저스트나 서브마리너를 떠올리죠. 둘 다 오이스터 퍼페추얼에서 파생된 모델이에요. ‘롤렉스 중의 롤렉스’가 오이스터 퍼페추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차종현과 같은 이유로 오이스터 퍼페추얼을 갖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당장 내 수중에 1000만원이 주어진다면? 차종현이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도 오이스터 삽니다. 서브마리너는 저한테 너무 커요. 저는 기본적으로 37mm 이하 시계만 모읍니다.” 신형 서브마리너 케이스 지름은 41mm, 가격은 1306만원이다. 실제로 차종현의 시계 컬렉션은 케이스 지름 37mm 이하 시계로만 꾸려졌다. 튜더 블랙베이 36, 론진 헤리티지 콘퀘스트 35mm, 라도 캡틴 쿡 37mm, 태그호이어 포뮬러 원 쿼츠 35mm, 글라이신 에어맨 No.1 36mm 등등.
차종현은 지난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기혼 남성이라면 시계 예산이 빠듯하지 않을까?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시계가 많으면 좋은 점이 뭔지 아세요? 한두 개 정도는 추가돼도 티가 안 나요.” 차종현의 시계 생활에는 미혼남인 내게 없는 호연지기가 있었다.
시계를 사고파는 게 일이라면 상한가의 기준도 남다를 것 같았다. 나는 빈티지 숍 ‘수박 빈티지’의 김정열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박 홈페이지에서 가장 최근 판매된 시계는 1992년식 빈티지 스와치 크로노그래프였다. 가격은 10만원. 나는 김정열 대표에게 물었다. 시계 구매에 얼마까지 쓸 수 있습니까? 김정열 대표가 답했다. “저는 시계 가격에 둔한 편이에요. 늘 되팔 걸 생각하거든요. 시계를 소유한다기보다 렌털하는 느낌에 가깝죠. 상한선이 크게 의미 없어요. 그렇다고 1억까지 쓰지는 않죠. 꼭 한 번 차보고 싶다면 3000만원 정도? 그 돈이면 빈티지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를 살 수 있거든요.”
판매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환급성을 감안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찬다면 1000만원. 구형 익스플로러 1이 딱 그 정도 해요. 하나만 찬다면 그 시계를 고를 겁니다. 롤렉스치고는 투박해요. 자랑하는 느낌이 확실히 덜하죠.” 김정열 대표는 ‘남자들이 시계를 사는 이유’에 대한 생각도 들려주었다. “시계가 처음 등장했을 때, 시계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기계였어요.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로봇, 레고, 자동차 좋아하잖아요.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시간’이라는 메타포를 손에 넣을 수 있잖아요. 여전히 실용적이고요. 시계는 이과와 문과가 동시에 좋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물건이죠.”
김정열이 생각하는 좋은 시계는 ‘족보 있는 시계’다. 오리지널리티가 명확하게 남아 있는 시계. 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시계.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경제적 수입과 심미적 안목이 늘 비례할 수는 없어요. 만일 나의 안목이 수익보다 객관적으로 뛰어나다. 장기적으로는 안목의 편을 드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시계를 차는 것 자체가 주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당장의 내 분수만 생각한다면 정말 아름다운 시계는 찰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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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시계 브랜드의 대표 모델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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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예산 상한선
스타일리스트 박선용은 빈티지 워치 숍 ‘빈티크’를 운영 중이다. 그는 시계 추천을 부탁하는 수많은 지인들을 위해 시계 가격의 하한선과 상한선을 아주 명확하게 정해두었다. “200만원 이상부터 3000만원 미만. 수입에 상관없이 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각 숫자의 의미가 궁금했다. “보통 빈티지 오메가가 200만원 정도 합니다. 문제는 구매 후 가격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반면 롤렉스, 까르띠에 일부 모델, 파텍 필립은 그렇지 않죠. 드라마틱하게 오르지도 않지만, 그만큼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3000만원 이상의 빈티지 시계를 추천하지 않는 건 왜일까? “빈티지 시계 가격이 3000만원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취향의 영역이에요. 롤렉스는 기호와 무관하게 누구라도 좋아하는 시계예요. 반면 브레게, 바쉐론 콘스탄틴, 랑에 운트 죄네는 찾는 사람들만 찾거든요. 현금화가 힘들죠.” 요즘 빈티크에서 가장 인기 많은 모델은 까르띠에 탱크 머스트와 파텍 필립 골든 엘립스다.
박선용이 시계를 매입하는 첫째 기준은 ‘금전적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시계’다. “시계도 자동차와 똑같아요. 포르쉐 911은 세대가 바뀌어도 디자인에 큰 변화가 없잖아요. 탱크 머스트도 데이트저스트도 마찬가지예요. ‘한결같음’이 클래식을 만듭니다. 클래식 반열에 오른 시계는 시간이 흘러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아요. 금전적 가치도, 상징적 가치도요.”
두 번째 기준은 보다 주관적이었다. “제 눈에 예쁜 시계를 삽니다. 같은 이유로 현금화는 잘되지만 예쁘지 않아서 안 사는 시계도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데이트저스트를 비롯한 스포츠 워치를 잘 안 삽니다. 반대로 금전 가치가 낮아도 예뻐서 사는 시계들이 있죠. 예를 들면 오데마 피게와 피아제의 클래식 워치. 이 시계들은 모델명도 없어요. 레퍼런스 넘버만 있죠. 그래도 삽니다. 예쁜 시계 앞에는 장사가 없어요. 이 시계들도 결국은 팔립니다.”
박선용은 세속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시계의 상한선만큼은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뭔가를 좋아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하지 않잖아요. 내가 오데마 피게를 갖고 싶다, 한 번 마음먹으면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 시계를 갖고 싶다는 것 자체가 동기부여가 되니까요. 갖고 싶은 시계가 명확한 분들은 결국 돌고 돌아 그 시계를 사더라고요. 얼마나 방황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은 내 마음속에 있던 시계로 돌아와요. 그런 시계 대부분이 클래식이기도 하고요.”
오늘날의 기계식 시계는 올림픽 금메달 같은 물건이 됐다. 실질적 기능보다는 상징과 의미가 중요한 물건. 서브마리너를 차고 태평양 아래 300m까지 들어갈 사람은 지구상에 제임스 카메론 정도뿐이다. 필요한 시계는 없다. 갖고 싶은 시계가 있을 뿐. 저마다의 능력을 떠나, 특정 시계를 갖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비난할 수는 없다. 열 살 소년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꿈꾼다고,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이라 비난할 수 없듯. 물론 우리가 언제까지고 열 살 소년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 당장 분수에 걸맞지 않은 시계를 산다고 해도 응원은 보태줄 것 같다. 한 남자의 인생에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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