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부터 호기심을 부른다. 색이 산뜻하다. 보통 위스키 박스 색은 진중하지 않나. 위스키는 어른의 술이고, 어른은 발랄함보다 진중함을 택한다. 게다가 위스키는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다른 술에 비해 고급스러움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청록색 박스라니. 선입견을 깨는 산뜻함이 있다. 왜 청록색일까? 청록색은 심리적으로 긴장과 피곤, 패배감에 효과적으로 작용한단다. 덧붙여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효과도 있단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술의, 위스키의 효능 얘기 아닌가. 그래서 청록색을 썼나?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지는 색이다. 하지만 제대로 헛짚었다. 청록색은 싱글톤의 맛을 대표한다. 그러니까 청사과 같은 과일의 산뜻함. 산뜻한 위스키를 색으로 표현한 결과다. 싱글톤은 박스뿐 아니라 병도 청록색이다. 마개도, 라벨도 청록색을 내세운다. 특별한 색으로 차별화하는 위스키가 또 뭐가 있지? 싱글톤은 전략적으로 색을 썼고, 전략은 성공적이다. 일단 아무 정보 없이 봤을 때 관심이 생기니까.
호기심을 끄는 데 성공했으니 다른 정보도 살펴보기로 한다. 몇 가지 전략적 장치를 찾아냈다. 일단 이름. 싱글톤은 증류소 이름이 아니다. 보통 싱글 몰트위스키는 증류소명을 이름으로 쓴다. 싱글톤은 따로 만든 이름이다. 게다가 싱글톤은 세 종류다. 디아지오 그룹이 소유한 증류소 세 곳에서 각각 만들어 싱글톤이란 이름을 붙인다. 원래 네 개였는데 하나가 줄었다. 각 증류소 이름은 더프타운, 글렌 오드, 글렌듈란. 지금 한국에서 접하는 싱글톤은 더프타운 증류소에서 병입한 제품이다. 라벨 아래쪽에 더프타운이라고 적혀 있다. 이름부터 출신까지 일반적이지 않다. 그 말은 곧 전략적으로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싱글 몰트위스키의 유행을 정조준하면서. 전략적이란 말이 단점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을 강조한 싱글 몰트위스키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보다 부담 없이 편하게. 청록색이 환기하는 산뜻함도 같은 맥락이다.
병 모양도 독특하다. 힙 플라스크처럼 납작하다. 병이 작지 않기에 휴대성을 고려한 형태로 보이진 않는다. 이 또한 차별화를 위한 전략적 장치로 다가온다. 진중함보다 젊고 위트 있게. 싱글톤이 노리는 고객층을 예상할 수 있다. 수많은 위스키를 섭렵한 마니아보다 이제 막 관심이 생긴 초보자를 위한 싱글 몰트위스키. 남다른 색과 특이한 병, 거기에 싱글 몰트위스키라는 위상까지 호기심을 건드릴 요소가 많다. 마지막으로 결정적 문구가 라벨에 있다. ‘달콤한 과즙(lusious Nectar).’ 대놓고 과실의 향긋함을 내세운다. 어떤 맛이기에?
달콤한 과즙
첫 잔을 따랐다. 갈색이 진하지 않다. 12년 숙성이니 짙은 갈색을 기대하진 않았다. 햇살을 머금은 투명한 갈색 정도라 해야 할까. 산뜻함을 내세우는 콘셉트와 어울린다. 입에 대기 전 향을 맡아봤다. 눈앞에 광활한 사과밭이 펼쳐졌다, 라고 할 만한 산뜻함은 없었다. 오히려 쏘는 향이 코끝을 건드렸다. 첫 모금을 넘겨봤다. 입안에서 맴도는 질감이 가볍다. 산뜻함 대신 보디의 가벼움이 먼저 첫인상을 결정했다. 가볍기에 복합적인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첫 모금의 여운도 달콤함이나 산뜻함보다 피트나 스파이시로 이어졌다. 부드러운 건 맞다. 그런 의미의 산뜻함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그러기엔 결정적 문구인 달콤한 과즙이 아쉬웠다. 첫 모금은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안주와 함께 보다 친해지기로 했다. 안주는 세 가지. 초콜릿과 말린 망고, 캐슈너트를 번갈아가며 곁들였다. 먼저 초콜릿. 묵직한 달콤함이 가시기 전에 싱글톤을 마셨다. 그러자 전에 느끼지 못한 화사함이 퍼졌다. 찐득한 달콤함 사이에서 과실이 열렸다. 사과 한 입 베어 문 정도의 상큼함이랄까. 싱글톤의 문을 여는 열쇠는 초콜릿이었다. 존재를 감지하자 더욱 풍성해졌다. 첫 모금에 느낀 스파이시함도 상큼함이 더해지니 여운이 깊어졌다.
싱글톤의 결정적 문구가 어렴풋이 미각으로 전해졌다. 말린 망고를 곁들이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망고의 산뜻함은 싱글톤의 개성과 맞닿아 있으니까. 하지만 강렬한 망고의 산뜻함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싱글톤만의 여운을 즐기기는 쉽지 않다. 캐슈너트는 추천하지 않는다. 입안에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뒤섞였다. 견과류의 질감이 섬세하게 뭘 찾아내고자 하는 의욕을 꺾었다. 다시 초콜릿에 손이 갔다.
브리딩의 마법
싱글톤의 테이스팅 노트는 청사과, 꿀, 견과류, 커피다. 라벨에 달콤한 과즙 외에도 꿀, 견과류, 커피의 맛이 난다고 따로 적혀 있다. 초콜릿을 이용해 청사과의 산뜻함은 발견했다. 꿀 같은 달콤함도 연장선에서 찾을 수 있다. 커피 맛은 음미하는 와중에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견과류는 잘 모르겠다. 커피와 견과류 사이에 연결점이 있을 듯한데 끝내 찾지 못했다. 반면 마시면 마실수록 상큼한 과실의 흥취는 명확해졌다.
다음 날 다시 마시자 극적으로 다가왔다. 첫 잔의 향을 맡으며 상상한 사과밭이 정말 펼쳐졌다. 과실의 상큼함이 확연히 전해질 정도로 개성이 살아났다. 위스키 브리딩(Breathing)이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낼 줄 몰랐다. 싱글톤은 처음보다 두 번째 마셨을 때 확실히 맛이 살아난다. 시작부터 화사하게 반기니 그 너머에 있는 맛도 선명해졌다. 더 머금으면 부드러운 달콤함이 맴돌다가 톡 쏘는 스파이시가 강타한다. 이후 향긋한 여운도 은은하게 퍼진다. 이 일련의 과정이 전반적으로 가볍고 부드럽다. 그러고 보니 싱글톤이 연출하는 맛은 더프타운 증류소가 있는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위스키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셰리 위스키의 화사한 맛 말이다. 싱글 몰트위스키로서 고유한 지역적 특색까지 발견할 수 있다.
싱글톤을 마셔보니 두 가지가 인상적이다. 가볍다. 그리고 화사하다. 이런 특징이 오해를 부를 수 있겠다 싶다. 싱글톤은 싱글 몰트위스키니까. 보통 싱글 몰트위스키는 개성 강한 맛이 강점이다. 가볍고 화사한 특성은 강점보다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위스키와 친해지려는 사람에겐 더 친절하게 길을 열어준다. 부담 없이 자주 마시기에도 좋다. 특별한 순간이 아닌 일상의 위스키로서 함께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마트에서 파는 싱글톤 박스의 뒷면에는 하이볼 제조법도 적어놓았다. 취향은 존중하겠지만, 테이스팅 잔에 마시길 추천한다. 사과밭이 펼쳐지는 심상을 경험하면 달리 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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