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O
“죽기 살기로 했어요. 졌어요, 그때는. 지금은 죽기로 했어요. 이겼어요. 이게 답입니다.” 2012년 7월 31일. 엑셀 런던 노스 아레나에서는 대한민국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터뷰 중 하나로 기억될 장면이 녹화되었다. ‘2012 런던 올림픽’ 유도 남자 -81kg 결승전은 대한민국 김재범과 독일 올레 비쇼프의 맞대결로 성사됐다. 두 선수는 서로에게 익숙한 상대였다. 4년 전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2008년 당시 김재범은 스포츠 팬들로부터 조롱 섞인 우려를 견뎌야 했다. 올림픽 개막을 10개월 앞두고 체급을 -73kg에서 -81kg으로 올렸기 때문이다. -73kg급에는 이원희, 왕기춘 같은 강자가 버티고 있었기에 ‘도망가듯 체급을 바꾼 것 아니냐’라는 말이 쏟아졌다. 김재범은 우려 속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대단한 성과였지만 김재범에게도, 국민에게도 아쉬운 결과였다. 우리는 TV 속 유도선수가 얼마나 힘든 훈련을 견뎌내야 하고, 그 끝에 도달한 경기장에서 상대 선수의 깃을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경기 직후 인터뷰를 통해 그 시간들을 그저 짐작해볼 뿐이다.
김재범은 4년 만에 같은 선수를 상대로 은메달이 아닌 금메달을 따냈다. “죽기 살기가 아닌 죽기로 했다”는 말 속에선 그간의 혹독함이 여실히 묻어났다. 이날 인터뷰 후로 김재범은 수많은 금메달리스트 중 하나가 아닌 노력의 아이콘이 됐다. 훗날 지도자가 된 김재범은 국가대표 유도선수를 꿈꾸는 열세 살 소년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내가 자부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는 있어. 선생님은 어떤 운동을 했어도 1등을 했을 거야. 왜냐하면 노력을 타고났으니까.” 이어지는 말은 더 인상적이다. “처음에 유도 배울 때 뭐부터 했어? (낙법). 잘 넘어지는 것부터 배웠지? 잘 치고 일어나.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또 도전하면 되는 거야. 그래서 낙법이 있는 거야.”
WRESTLING
금메달리스트의 인터뷰만 회자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 9월. 시드니의 달링하버 전시홀에서 올림픽 남자 레슬링 -58kg 결승전을 앞둔 김인섭은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당시 김인섭의 기량은 세계 최정상급이었다.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한 ‘1998·1999 레슬링 세계선수권 대회’와 ‘1998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늘이 저를 은메달밖에 안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당시 그는 41연승을 기록 중이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대진운은 최악이었다. 예선 1차전에서는 동 체급 최강자 중 하나로 꼽히던 카자흐스탄의 유리 멜리첸코를 상대했다. 힘겹게 승리를 따냈지만, 상대의 항의로 재경기가 치러졌다. 이때 김인섭은 예상에 없던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예선 2차전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딜쇼트 아리포프를 만나 이겼지만, 이번에도 상대편 항의로 재경기를 치렀다. 예선 두 경기에서 이미 네 경기나 치른 것이다. 체력 소진보다 더 심각한 건 늑골 부상이었다. 늑골 부상은 그레코로만형 선수들에게 특히 치명적이다. 레슬링 그레코로만형에서는 공격 및 방어를 할 때 허리 위 상체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한다. 김인섭은 으스러진 갈비뼈를 끌어안은 채 토너먼트마다 진통 주사를 맞아가며 경기에 나서야 했다. 결승전에 올라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럼에도 김인섭은 자신의 금메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결승전 상대는 불가리아의 강호 아르멘 나자리안. 김인섭은 후일담으로 “그 선수한테는 무조건 자신이 있었다. 그라운드에서도 자신 있었고, 테크니컬로 이기겠다는 자신이 있었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김인섭은 자신의 주특기였던 엉치걸이로 3점 선취점을 따냈다. 하지만 손가락과 늑골 부상을 알아챈 상대는 부상 부위를 공략했고 결국 역전승을 내줘야 했다. 경기 직후 김인섭은 땀과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을 다 바쳤거든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늘이 저를 은메달밖에 안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훗날 지도자가 된 김인섭은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시드니 올림픽 은메달 따서 지도자로서 더 많이 공부했어요. 선수들한테 예기치 못한 불운을 당했을 때 누구보다도 더 좋은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코치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아픔이 있는 게 지도자로서 선수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HANDBALL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지만, 실제로 영화로 제작된 된 경기도 있다.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은 ‘2004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 진출했다. 상대는 대회 3연패에 도전하는 덴마크. 결승전답게 양 팀은 치열했다. 경기는 연장 2차전까지 이어졌고, 17번이나 동점이 거듭된 끝에 32-32로 승부를 매듭짓지 못했다. 결국 승부던지기 끝에 한국 대표팀은 2-4 패배를 기록했다. 대표팀 ‘언니 4인방’ 중 한 명이었던 포워드 오성옥 선수는 눈물을 흘리며 카메라 앞에 섰다. “후배들이 열심히 뛰어줬는데 제가 마지막에 조금만 더해줬으면 금메달이 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많이 나는데요.” 오성옥 선수의 인터뷰는 임영철 감독의 인터뷰와 함께 4년 뒤 개봉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마지막 장면으로 삽입됐다. 임영철 감독의 말이다. “우리 선수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잘해주었습니다. 비록 은메달이지만 금메달 못지않은 투혼을 오늘 발휘하지 않았나 이렇게 평가를 하고 싶고요. 어떻게 올림픽에 이렇게 나와서 대표 선수 하는 종목의 선수가 마음 놓고 뛸 수 있는 그런 팀이, 팀이 없다는 자체가 그건 뭐, 뭘로 어떻게 얘기를 해드릴까요?” 아테네 올림픽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는 남자부 6개 팀, 여자부 8개 팀으로 꾸려진 프로 리그 ‘핸드볼 H리그’가 자리 잡았다.
BASEBALL
좋은 인터뷰는 때로 말보다 침묵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우생순’ 대표팀이 은메달을 따고 4년 뒤. 베이징에서는 훗날 MLB에 진출하게 될 야구 꿈나무들이 평생토록 기억할 경기가 열릴 예정이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남자 야구 준결승전은 한일전으로 확정됐다. 당시 한국 대표팀의 가장 큰 걱정은 4번 타자 이승엽의 부진이었다. 경기를 앞두고 상대팀 일본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기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이승엽)가 누구냐? 제대로 치지도 못하는 타자를 4번에 계속 두다니 대단하다.” 한국 대표팀은 ‘전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며 출사표를 던졌지만, 국민타자 이승엽은 준결승전까지 ‘23타수 3안타, 타율 0.115’라는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이승엽은 훗날 ‘약속의 8회’라는 말을 탄생시킨 홈런을 쏘아올렸다. 8회말 2-2 동점 상황. 1사 1루에서 이승엽은 투런 홈런을 걷어 올리며 팀을 결승전으로 올려두었다. 이승엽은 경기 후 기자가 소감을 묻자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아주 짧게 한마디 남겼다 “선배로서 후배들 보기에 너무 미안했는데 마음의 빚을 갚은 것 같다.” 이승엽은 후에 한 인터뷰에서 “사실 올림픽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찡합니다”라며, 당시 김경문 감독이 대타를 세웠으면 했다고 말했다. 이날 경기는 야구 팬들 사이에서 ‘베이징 대첩’으로 불린다.
HIGH JUMP
아주 드물지만 노메달리스트도 대회에서 존재감을 나타낼 때가 있다. ‘2020 도쿄 올림픽’ 육상 남자 높이뛰기 결선이 끝난 날 저녁. 국군체육부대 소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육상 남자 높이뛰기 대표 우상혁은 라면 봉지를 뜯으며 자축했다. “어젯밤엔 대회가 끝난 기념으로 그동안 못 먹었던 라면을 먹었어요. 아주 매운 짬뽕 라면으로.” 우상혁은 해당 대회에서 2m 35를 뛰어 넘으며 자신의 최고 기록은 물론 대한민국 신기록을 새로 썼다.
“이건 당연한 결과예요. 저희는 무조건 믿고 있었고 의심하지 않았어요.”
우상혁은 경기 내내 관중의 박수를 유도하며 경기에 나섰다. 우리가 그동안 올림픽에서 봤던 어떤 선수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 미소는 경기가 끝난 후에도 구겨지지 않았다. “저는 행복합니다, 오늘. 메달은 비록 못 땄지만 괜찮습니다.”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이 방금 TV를 켰다면 ‘이 사람이 금메달리스트구나’ 할 법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우상혁은 씩씩한 말씨로 인터뷰를 이어 나갔다. “이건 당연한 결과예요. 저희는 무조건 믿고 있었고 의심하지 않았어요. 제가 첫 번째 (리우) 올림픽 때는 즐기지 못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추억이 없더라고요, 이번에는 즐기면 더 잘되는 거고, 못하면 즐겼으니까 후회는 없고. 이런 생각에 그냥 즐기면서 했습니다.” 우상혁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는 처음부터 자신감 있던 선수는 아니었어요. 어느 순간 준비되고 나서 확신이 들었을 때 자신감을 표출하는 건 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카메라 앞에서 미래를 기약했다. “3년 후에 파리 올림픽, 내년 아시안게임 그리고 최초로 세계선수권 메달리스트. 최초로 금메달까지 바라봐요. 저는 파리 올림픽에서는 강력한 우승 후보가 될 것 같습니다.” 이날 이후로 우상혁은 ‘스마일 점퍼’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3년 사이 우상혁은 자신의 개인 최고 기록을 2m 36으로 올려놨다. 그가 파리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공언한 목표는 2m 37이다.
스포츠에서 중요한 건 승패다. 승패가 있기에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한다. 하지만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 이름을 호명하며 박수를 보내는 건 경기 종료 후가 아닌 경기 전이다. 나는 그 이유가 결과보다 과정을 기꺼이 지켜보겠다는 뜻에서 비롯됐다고 믿는다. 우리는 금메달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 때로는 금메달보다 더 오래도록 기억될 무언가를 목격하게 된다. 그 무언가가 아이러니하게도 승패와 무관하게 진짜 챔피언을 낳기도 한다. 다가올 올림픽에서 보고 싶은 것 역시 새로운 금메달리스트가 아닌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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