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전형적인 사무실 풍경과 온몸에 그림을 잔뜩 새긴 그들의 대비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여지껏 사무실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을 듯한 두 사람은 금세 공간을 자신들의 색으로 장악했다. 힙노시스 테라피는 짱유와 제이 플로우로 이루어진 전자음악 듀오다. 그들의 음악은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와 다층적인 사운드 레이어, 빠르게 질주하는 리듬을 내리꽂아 육체와 정신을 매료시킨다. 본능의 영역에 가까운 사운드는 순식간에 일상을 깨고 다른 차원으로 탈주를 돕는다. 절절한 감성에 호소하는 가요와 달리 ‘청각을 통한 시각적 체험’을 제시하는 이들의 일렉트로닉은 답답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탈출구일지 모른다.
짱유와 제이 플로우는 고향인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짱유가 고등학교 3학년 무렵, 제이 플로우가 스물두 살쯤이었을 때다. 당시 부산의 힙합 신은 모두가 래퍼를 꿈꿨고,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 정도로 좁았다. “저는 아기 강아지 같았죠.” 짱유는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표현했다. “반대로 형은 현재 수수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부산에서 제일 패셔너블했거든요. 항상 명품 선글라스 쓰고.” 제이 플로우는 웃으며 좋은 옷만 입고 다닌 사실을 인정했다. 인연은 이때부터 이어져 2015년 힙합 크루 ‘와비사비룸’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호기로운 시작과 달리 빛을 못 보는 곡들이 쌓여갔다. 인디 힙합 신의 구조상 좋은 음악을 만들어도 유통이 어려워 노력과는 상관없이 쓴맛을 봤다. 그럼에도 이들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짱유는 “단순해서 고통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제이 플로우 역시 공감했다. “저는 대차거든요.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다 보면 무엇이든 선택의 기로에 놓이잖아요. 그런 순간 ‘내가 이 선택을 하는 게 옳을까, 저 선택을 하는 게 옳을까’ 하지 않고 그냥 틀린 선택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것을 선택하든 맞는 선택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당시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그냥 해보자.’
시간은 흐르고 와비사비룸은 또 다른 팀원 에이뤠와 연락이 멀어지며 이를 기점으로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이후 짱유는 <쇼미더머니8>에 출연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고, 제이 플로우는 R&B팀 ‘히피는 집시였다’의 프로듀서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이 다시 만난 계기는 단순했다. 음악적 과도기를 겪으며 방황하던 짱유가 도움을 청한 것. 제이 플로우는 그에게 비트 메이킹을 가르쳐주었다. 둘은 매주 만나 만든 비트를 듣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곡을 쌓아갔다. “처음엔 팀을 만들 생각이 없었어요. 단지 ‘제이 플로우의 비트 교실’이었죠.” 둘은 팀 결성을 마음먹은 후 세계 곳곳의 클럽을 다니며 어떻게 디제잉을 하면서 노는지 보고 느꼈다. 어느 곳에서든 일렉트로닉 음악을 들었다. 제이 플로우는 모든 과정 속에서 섬세한 선생님이었다. 짱유를 위해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며, 음악 외적인 업무를 도맡았다. 동시에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흡수하는 모든 과정을 일상으로 구축하려 노력했다. 짱유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워서 지지부진한 노력처럼 느껴지지 않았어요”라 말했고, 제이 플로우는 “이를 생활화하기까지는 누구보다 열심이었죠”라고 덧붙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춧돌을 쌓고, 필드 위에서 최대의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것.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온 유대는 이렇게 빛난다.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짱유가 대답한 힙노시스 테라피의 현재다. “저희 10년 넘게 음악하면서 화보 찍어본 적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 힙노시스 테라피로 소개되다니 저희에게도 뜻깊은 일이에요.” 제이 플로우는 시대가 변했다고 말했다. “와비사비룸 때도 어려운 음악을 했잖아요. 지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쉽고 편한 음악이 아니지만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거예요.” 글로벌 시장에서 역시 한국 아티스트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힙노시스 테라피 또한 9월 독일 공연을 앞두고 있다. 10월부터 유럽 9개국을 돌며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발매를 앞둔 앨범도 국내보다는 해외시장을 겨냥했다. 이번 앨범은 환각을 겪는 과정과 이후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트랙 구성에도 변화를 주었고, 과격한 사운드 플레이도 서슴지 않았다. “실제 그 신에 속하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지금 한국 아티스트는 서브컬처보다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에만 집중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런 틀을 깨고 진짜 해외 애호가를 사로잡고 싶어요. 그게 목표예요.” 제이 플로우는 선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야 한국에 좋은 아티스트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AOMG처럼 하지 않아도 되고, BTS처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짱유가 말했다. 이들은 공존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는다. 혼자 성공하는 것보다 함께 성장하고 발전하길 원한다. 같은 음악 신에 위치한 이들과, 나아가 우리 모두 함께. “우리는 아무도 하지 않는 도전을 하는 거잖아요. 미지의 풀숲을 헤쳐 나가며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사람들이 ‘저렇게 해도 되는구나’라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색깔을 보여줘도 된다는 용기를 주고 싶어요.” 이들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항상 같다. ‘해나가자’ ‘하자, 우리도 할 수 있다’. 이것이 힙노시스 테라피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다가오는 8월 30일에 싱글이 발매된다. 해외 투어를 마친 둘의 음악이 갑자기 빌보드에 오르면 어쩌나 걱정이 된다. 나만 아는 팀이길 바라는 욕심은 아니다. 이들의 근원이 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개인의 성공보다 모두의 성공을 좇는 사람은 귀하니까. 하지만 별다른 도리 없이 이들의 음악은 언젠가 세상에 알려질 거다. 기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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