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시계 관련 책을 좀 샀다. 2월 프랑스 출장을 갔을 때는 프랑스의 시계 박물관이 있는 브장송에 갔다. 브장송은 프랑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박물관 하나만 남았다. 거기서 읽지도 못하는 프랑스어 시계 관련 책을 잔뜩 샀다. 뒤이어 찾아간 파리의 기술 박물관에서도 시계가 언급된 책을 샀다. 읽지 못하는 책이라면 돌덩이를 사온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 출장도 다닐 만큼 다녀봐서 굳이 외국에서 사고 싶은 것도 없다. 이상하게 책을 계속 사게 된다. 내 허영일 수도 있고 언젠가 어딘가에서 업무 자료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일 수도 있다. 둘 다일 테지만 허영 비율이 더 높을 것 같다.
4월 제네바에서 열린 시계 박람회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도 책을 샀다. 사실 워치스 앤 원더스에서 가장 기대하는 곳 중 하나는 책과 잡지 코너다. 박람회장 한편에는 세계의 시계와 라이프스타일 관련 잡지들을 배포하는 코너가 있다. 시계 관련 기사들은 인터넷에 상당히 많이 올라와 있지만 거기서만 볼 수 있는 정보도 있어서 갈 때마다 시간을 들여서 찾아본다. 스위스 시계 박람회 현장에서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케팅 용어와 자사 위주의 신화 뒤편에 있는 실제 제조 난이도와 산업 역사를 엿보게 된다. 잡지 코너에서도 시장의 이면이 약간 보인다. 시계 제조 산업 잡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잡지에는 나사 제조사나 바늘 제조사의 광고가 4분의 1페이지로 실리곤 한다.
배포 코너 옆에는 스위스 시계 서점도 있다. 매년 똑같은 회사의 아저씨가 나와서 늘 팔던 책들을 판매하되 조금씩 신간이 보인다. 시계 박람회에 갈 때마다 ‘이곳이 내 기념품 가게다’라는 생각으로 책들을 한두 권씩 사곤 했다. 올해는 아주 두꺼운 책 한 권과 역사책을 한 권 샀다. 두꺼운 책은 전 세계 군용 시계를 모아서 사진과 정리한 도감 같은 책이다. 역사책은 스위스 시계 산업사를 전문으로 하는 피에르 이브 돈제의 신작인 롤렉스의 역사책이다. 롤렉스 역사책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나 역시 프랑스어판만 나와 있어서 읽을 수가 없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일단 일시불로 샀다.
현대사회의 기계식 손목시계는 비합리적인 물건이다. 효율 면에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기계식 시계 기술이 아직도 이어지면서 귀금속계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맥락을 모른다면 시계가 마냥 대단한 물건으로 보이거나 전부 다 사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반면 어떻게 기계식 손목시계가 지금의 지위를 가졌는지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면 이 모든 게임이 흥미로워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맥락은 브랜드의 보도자료나 광고성 기사에는 적혀 있지 않으니 책을 읽는 게 도움이 된다.
시계를 다룬 한국어 책도 있다. 기계식 손목시계에 대해 이해하기 전에는 기계식 시계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고, 기계식 시계에 대해 이해하려면 시계와 서양 문명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면에서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의 <시계와 문명>은 서양의 시계 문화에 관한 훌륭한 개론이다. 어떻게 스위스에 시계공들이 모여들었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데이터로 보여준다. 그다음에는 데이바 소벨의 <경도 이야기>를 읽으면 좋다. 시계가 왜 더 작아지고 정확해져야 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느 개인과 기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책들을 추천하는 이유는 책 속 옛날이야기들이 오늘날의 시계 산업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스위스 시계 산업은 몇 가지 계기를 거쳐 사실상 다른 산업 영역으로 넘어갔다. 초기 시계는 공예에 가까웠다가 20세기에 대량생산 정밀 기기가 되었고, 20세기 후반을 거치며 마케팅의 산물이 되어 인간 감정에 호소하는 물건이 되었다. 이 흐름을 정리한 책이 에이자 레이든이 쓴 <세상이 탐한 보석의 역사>다. 이 책의 3부 후반부가 손목시계에 대한 것이다. 오늘날 손목시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고 나면 분명히 더 재미있다. 손목시계라는 물건의 기술과 아름다움, 역설과 진심을 느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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