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정구호가 창조해낸 모든 콘텐츠를 좋아한다. 그냥 너무 좋은 게 아니라 미치도록,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한국적인 미가 정말 탁월한데, 한마디로 촌스럽지 않아서다. 달항아리처럼 단아하기도 하고, 종종 단색화처럼 세련됐으며, 어쩔 땐 종묘의 건축물처럼 절제미가 돋보인다. 국립무용단의 <묵향>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내 말에 금세 수긍할 것이다. 평창 올림픽 개막식도 나쁘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정구호가 끝까지 관여했다면, 정말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작이 나왔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말한 미스 반데어로에만큼이나 정구호의 창작물에는 곳곳에 그만의 코드가 묻어 있다. 그래서 내 소원 중 하나는 정구호의 손길이 닿은 콘텐츠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접하는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차치하고 그만큼 개인의 취향이 업그레이드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뷰이에 대한 상찬이 지나치다고 타박할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디렉터 정구호에 대한 나의 믿음이 그만큼 확고했기에 ‘유은호’라는 예명으로 디지털 싱글 <눈부시다>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평상시 그의 음성에 대한 신뢰도 한몫했다. ‘김나박이’의 명품 내지름보다 카더가든, 검정치마의 서글픈 처절함을 더 선호하기에 솔직히 듣기도 전에 그의 보이스피싱에 낚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인 가수 유은호는 정구호라는 ‘본캐’가 가진 차갑도록 날카로운 세련미를 내려놓고 따뜻하고 서정적인 음율에 실린 목소리를 가졌다. 그는 세라 본, 엘라 피츠제럴드 등 미국의 여성 재즈 보컬들을 특히 좋아했다. 국내는 인디 가수 카더가든이 무명(?)이었을 때–메이슨 더 소울로 불리던 때를 말하는 것 같다-부터 좋아했다고 하는데, 개인적 감상평은 세라 본의 폭발적인 고음보다 사라 강의 살랑이는 속삭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하고 절제미를 추구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화려해 보이는 정구호의 창작물과 달리 유은호가 들려주는 노래는 소박한 들꽃이 연상된다. 새하얀 설국 같은 정구호와 초록초록 봄 같은 유은호, 사실 정구호라는 사람 자체는 유은호에 더 가깝다 여겨진다. 따뜻하고 정이 많아 대화를 즐기고, 대화 중에는 주로 들어주는 걸 잘한다.
한편으론 이것저것 파격적인 도전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막연히 음악을 사랑하고 즐겨 듣다 보니 음원이나 하나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어요. 내 음악이 담긴 CD를 주변 동료나 친구들에게 하나씩 선물해보면 어떨까? 시작은 그랬는데 일이 커졌네요. 올 연말 제 생일 때 다들 모여서 쇼케이스나 작은 콘서트를 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인디 가수 유은호의 다음 행보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밝힌다.
“두 번째 곡은 6월 말이나 7월 초에 녹음을 하기로 했어요. 내가 열여덟 살 때 1932년도 노래 ‘Beautiful Love’를 즐겨 들었는데,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싶어요. 오리지널 버전은 느리고 차분한데 저만의 스타일로 편곡해서 커버링을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소울풀한 노래를 좋아해서 미디엄 템포의 록 발라드를 한 곡 더 녹음할 생각입니다. 두 곡으로는 부족할 거 같아서 커버곡도 추가해보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신인 가수 몇 분 초대해 협업도 해보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 두 번째로 고백하건대 유은호의 음원이 내 플레이리스트에 올라갈 것 같지는 않다. 혁오나 데이먼스 이어와 경쟁이 될까? 부정적 의견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유은호의 ‘눈부시다’ 가사가 계속 내 머릿속에 맴도는 건 왜일까? 그리움이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그러니까 그리운 대상이 있다면 실컷 그리워해도 되지 않을까?
‘힘겨워한 날의 겨울도 / 지나 보니 모두 눈부시다’ ‘그리워할 수는 있으니 / 넌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
‘그리운 사람 언젠가는 만나지겠지’
아무리 신인 가수 유은호와의 만남이지만 이 인터뷰의 마지막은 예정되어 있다. 유은호로 시작해 정구호로의 귀결.
정구호는 현재 다시 비주얼리스트로 돌아와 퓨전 시대극의 연출과 시나리오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황진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업처럼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콘셉트와 퀄리티를 보여줄 것이다. 정구호는 진짜와 가짜, 프로와 아마를 구별하기 어려운 이 혼돈의 시대에 몇 안 되는 진짜배기 비주얼리스트이자 디렉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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