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뜰리에 에르메스가 2024년 3월 22일부터 6월 9일까지 프랑스의 아티스트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e)의 개인전 <아름다움은 레디메이드(Beauty is a Ready-made)>를 개최한다. 우리 시대에 가장 논쟁적인 작가 가운데 하나인 클레어 퐁텐은 예술가 집단이자 여성주의 작가로서 작품 소유권의 개념을 강력히 비판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미술 시스템에 도전해왔다.
2004년 파리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가 풀비아 카르네발레와 영국 출신의 미술가 제임스 손힐이 함께 설립한 클레어 퐁텐은 그 이름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문구 브랜드의 상표명에서 가져왔다. 여성형 이름이자 이미 존재하는 상표명을 차용하는 행위를 통해 이들은 작가 개인의 주체성을 정의하기보다는 상업적 행위 또는 통제와 관련된 작가의 정체성을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자식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주거나 작품에 작가의 이름을 붙이는 가부장적인 관습 질서를 거스르는 정치적 선언이 되는 셈이다. 작가의 약력과 작품 사이의 일관성을 거부함으로써 작가의 정체성과 소유권, 그리고 국적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탈주체화의 공간을 여는 전략이 된다.
아방가르드의 종언 이후 현대미술은 탈역사주의와 다원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욱 깊숙이 자본주의와 결탁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이미 존재하는 작품들을 재가공하거나 대가들의 작품을 재해석이란 명분으로 차용한 작품들은 실제로 새로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마법적인 영감에 의해 완성된 유일무이한 개성의 산물로 여겨진다. 현대미술은 표면적으로 새로워 보이면서 논란거리 없는 내용을 문화산업에 공급하는 상품이 되거나 짐짓 개인의 진정한 창의성의 결실인 듯 고가의 사치품이 되곤 하는 것이다. 클레어 퐁텐은 상징자본의 핵심인 차별화된 작업을 ‘차라리 하지 않고’ 대신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차용하여 자본주의의 금기 사항인 소유권에 도전하는 길을 택한다. 레디메이드의 빈 공간을 자신이 추구하는 실존적인 사용가치로 채워 넣음으로써 친숙한 이미지들을 동시대의 긴급한 의제들을 다루는 강력한 매체로 변모시킨다.
영어로 ‘맑은 샘(Clear Fountain)’을 뜻하는 클레어 퐁텐은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연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Fountain)>(1917)에 대한 직접적인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무려 한 세기 전에 예술 작품의 상품적 지위를 비판했던 레디메이드의 날카로운 타격은 후대 미술가들의 그저 형식적 남용으로 무뎌지고 말았는데, 클레어 퐁텐은 그 전략의 급진성을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두 작가의 연관성과 차이점에 대해 흥미롭게 비교한 할 포스터에 따르면, 뒤샹이 1921년에 또 다른 자아인 ‘로즈 셀라비’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탈주체화를 위해 성별로나 민족적으로 분열할 때(로즈는 여성이자 유대인이다), 2004년 국적이 다른 남녀 두 사람은 한 명의 여성 작가인 클레어 퐁텐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클레어 퐁텐의 핵심은 두 사람의 불완전한 조수가 활약하는 ‘소집단으로 구성된 소집단의 다중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풀비아 카르네발레와 제임스 손힐 두 사람이 스스로를 작가가 아니라 클레어 퐁텐의 조수들이라 부르기로 결심한 것은 예술가의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자아를 포기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예술가를 천재로 간주하는 예술의 성스러움을 세속화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조수들이란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도우미들처럼, 어른의 얼굴을 한 영원한 학생과 같이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며 번역가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관련된 존재들이기도 하다. 레디메이드를 선택함으로써 독단적이고 전능한 예술가의 지위를 포기하고 조수의 역할에 머문다는 것은 작가 스스로가 타협과 토론,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무엇이든 수용하고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 ‘공통’의 공간을 연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적절한 것과 적절하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고 ‘무엇이든 특이성’이 존중되는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이번 전시에서 시리즈 중 네 점이 출품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 (2004-현재)는 클레어 퐁텐의 정치적 지향성을 드러내는 대표작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이민자와 난민, 실향민의 숫자가 기록을 경신하는 우리 시대에 타자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인종 편견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200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에서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증에 맞서 싸웠던 토리노 컬렉티브의 전단지에서 가져온 두 단어지만,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본 전시 주제로 채택될 만큼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로 기능한다. 오히려 오늘날 국경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난민들은 물론, 여러 범주의 소수자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언급한 ‘우리 자신 안의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타자의 범주는 점차 미분화되고 있기에, 이 작품은 우리 자신이 외국인이자 타자임을 인식하기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로 작동한다.
아시아에서 작가의 첫 개인전이기도 한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대표작들은 동시대의 시각문화는 물론, 긴급한 정치적 의제를 제안한다. 한글을 포함해 4개 국어로 제시되는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를 비롯, 깨진 액정 화면을 통해 바라본 이미지를 라이트박스 광고판으로 치환한 여러 점의 작업이 소개된다. 이들은 사적으로 소비되는 핸드폰 화면과 공공영역에서 광고로 재현되는 동시대의 시각문화 장치에 대해 통찰하는 것은 물론, 보호라는 미명하에 가부장적 통제 아래 놓인 약자의 취약성과 기후위기의 긴급성, 그리고 전지구적 재난에 대한 우리 자신의 무력감 등 동시대의 고통을 인터넷에서 발견한 이미지를 통해 공유한다.
전시는 다양한 시각적 표현들은 물론, 화이트 큐브의 전통적인 중립성을 변경한 몰입형 작품도 선보인다. 도시 주변의 오래되고 금이 간 타일 사진을 콜라주한 바닥 설치작업인 신작 <컷업(Cut Up)>이 그것이다. 다다이스트나 비트세대 문학, 또는 팝음악에서의 샘플링이나 매시-업처럼 무작위로 자른 패턴을 이어 붙인 작업으로 작가가 거주하는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안뜰 공간을 장식하는 바닥의 질감을 재현했다. 고대부터 해상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덕에 그리스, 로마를 위시해 이슬람과 게르만의 문화가 함께 녹아든 팔레르모의 이주의 역사는 문화적 순수성이 아닌 복합성을 통해 아름다움을 구현한다. 사진 바닥 작업 위에 놓인 수많은 레몬들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유럽 남부의 상징이자, 발에 차일 정도로 공간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민자들의 컬러풀한 침범을 비유한다. 그러나 전시장의 동선을 방해하는 존재들임에도 아름다운 색감의 존재만으로도 전ㅌ시 공간에 신선한 에너지를 부여하고 공존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예술은 정치적 난민들의 장소가 된다’고 믿는 클레어 퐁텐의 작품 세계는 질 들뢰즈나 조르조 아감벤의 사상으로부터 필경사 바틀비와 오드라덱과 같은 문학적 인물들과 정서를 공유한다. 그것은 정치적 무력감에 잠식되어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도 작품 안에 내재된 강력한 이상주의적인 에너지로 우리로 하여금 예술 작품을 통해 현실을 직시할 기회를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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