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 님과 인터뷰를 하니 제가 성공한 에디터가 된 기분이 듭니다.
기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냥 하시는 얘기죠?
말 그대로의 진심입니다. 종일 촬영하시느라 피곤하실 테니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댁이 여기서 먼가요?
그렇게 멀지는 않은데요. 애들과 가족이 있으니까 적당히 들어가야죠.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인터뷰에선 자제분들 언급이 많았습니다. 일상도 가족과 함께인가요?
그렇죠. 제 스케줄은 거의 아이들 위주예요. 아침에 저녁에 뭐 먹을지 생각하고요.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셨고, 최근작 <마에스트라>에서도 여성 지휘자 역할을 하셨습니다. 요즘엔 어떤 음악 들으세요?
혼자 있을 때는 집에서 클래식 채널을 고정으로 틀어둬요. 최근 드라마 <마에스트라>를 하면서 진솔 지휘자가 전해준 플레이리스트도 듣고요. 드라마 엔딩곡이었던 헨델의 ‘파사칼리아’도 재미있었고, 슈만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어요. 딸은 케이팝을 좋아해서 투모로우 바이투게더나 세븐틴 노래를 듣는 것 같아요. 딸과 친해지기 위해서 같이 공연도 가고, 그러다 보니 다양한 음악을 듣고 있어요. 딸도 음악으로 중학교를 갔거든요. 음악에 관심이 있으면 나중에는 하나로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가까이 있는 건 좋은 일이에요.
<마에스트라> 같은 작품을 하면 연기를 위해 어떤 자료를 참고하세요?
번스타인이나 카라얀 같은 고전적 지휘자 영상도 봤지만, 저는 여성 지휘자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지휘자 영상을 많이 찾아봤죠. 그분들의 연주 유튜브뿐 아니라 리허설 유튜브 장면도 있어요. 그분들이 뭘 갖고 다니는지, 책상에는 뭐가 놓여 있는지, 뭘 입는지, 손짓과 발짓의 디테일은 어떤지, 그런 모습이 있어요. 그 디테일을 찾는 데 메이킹 필름이 도움이 됐어요.
배우 일은 매번 그렇게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어서 재미있을 것 같아요. 원체 배우는 걸 좋아하십니까?
네,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배우는 걸 좋아해요.
2000년 쓰신 석사 논문 <스타니슬랍스키와 브레히트의 연기론 비교>를 읽으며 그런 분일까 생각했습니다. 그 논문에서 ‘연기는 고난도의 전문 기술’이라 쓰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너무 오래전 얘기지만 제가 그런 생각으로 이야기한 것 같아요. 연기에 본능과 감성이 있고 타고난 재능도 중요하죠. 풍부한 감성이 배우의 필요조건이지만 그 감정이 너무 과하면 관객이 울어야 할 부분까지 배우가 울어요. 그러면 관객이 울 부분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풍부한 감성이 있어도 적당히 여지를 남기는 절제가 필요하고, 그 의미에서 그걸 기술이라고 표현했어요. 테크닉이라 이야기하기엔 조금 인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요.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덜어내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의미였어요.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시는 동기는 무엇인가요?
재미있잖아요.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는 게, 저 말고 (캐릭터라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요. 오늘 만난 에디터님도 제게 오셔서 설렜죠. 에디터님도 설레지 않았나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얼마나 신선해요. 저도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자체가 설레요. 그런 모습을 제가 보는 것도 재미있고요.
작품이 안 될 가능성이 두렵지는 않으세요?
그런 것에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는 없죠. 제가 27세 때 날라리 학생으로 나온 주말극이 있어요. 그게 조기 종영돼서 쫑파티 때 엄청 울었어요. 그런 경우도 있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까 좋아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래서인지 배우 연차가 쌓일수록 더 도전적인 작품을 하시는 경향이 보입니다. <구경이>도 <마에스트라>도요.
이왕이면 조금 더 새로운 걸 하고 싶어요. 자신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때 아니면 언제 할까’라는 생각에.
그렇다면 새 작품을 고르는 가장 큰 기준이 새로움일까요?
결혼과 출산을 하고 나니 될 수 있으면 따뜻한 영화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요즘 OTT도 그렇고 너무 자극적인 게 많아요. 제가 <봄날은 간다>를 할 때는 힐링되는 영화가 많이 제작됐어요. 그런데 요즘은 너무 한쪽으로 장르가 치우친 것 같아요. 골라 먹는 재미가 없어요. 편협하고. 주위 후배들도 “언니, 저도 옛날 <봄날은 간다> 같은 멜로를 하고 싶은데 없어요”라고 해요. 킬러 같은 역할은 많지만요. 교육 드라마를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게 너무 자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메시지였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은 조금 바뀌었어요. 옛날에는 좋은 감독, 좋은 작품이 중요했어요. 메시지를 떠나 잔인하더라도 내가 잘되는 게 의미 있었는데, 지금은 두루두루 사람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주는 영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 때도 힘들긴 했지만 요즘에는 결혼도 안 하려고 하잖아요.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순기능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서 이영애 님의 기부 활동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꾸준히 다양한 곳에 기부하시는 것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같은 옛말을 생각하면 부끄럽죠.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나 같은 사람도 하는데’라는 생각도 해요. (제 기부가) 다른 사람에게도 시너지를 주면 좋을 것 같고요. 기부하며 제가 배우는 것도 많아요. 아기 아빠는 저보다 더 적극적이에요. 저는 국내를 생각하는데 아기 아빠는 국외까지 생각하기도 하고, 제가 하는 브랜드 중에는 수익 전액을 기부하는 곳도 있어요. 좋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면 좋으니까, 기부하는 것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고, 그 때문에 사회에 의무감도 느끼시나요?
나잇값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오랫동안 사랑받아왔으니까요. 연예인이나 배우가 공무원이나 공인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연예인의) 도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연기자와 공인 아닌 공인으로서 줄타기를 잘하는 게 쉽지는 않아요. 제가 얼마 전에 아시아 필름 페스티벌 때문에 홍콩에 갔는데 홍콩 영화 잡지 기자분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한국은 배우나 연예인에 대해서 혹독하다고. 그들에게 큰 짐을 지워줘서 힘들 것 같다고요. 저도 공감했지만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는 일이잖아요. 관심이 많은 만큼 사랑도 너무 많고, 기대가 크니까 미움도 실망도 크고. 그런 걸 다 안고 가야겠죠. 그만큼 제가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만큼 올라왔으니까.
말씀대로 쉽지 않은 연예계에서 오랜 사랑을 받는 비결이 있으세요?
예전에는 저보다 재주도 많고 저보다 예쁜 친구들도 많고 능력이 뛰어난 친구들도 많았어요. 그냥 제 위치에서, 제 기준에서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육아를 하는 엄마와 아내 역할에 집중해야 하니 그렇지 않지만, 돌아보면 저는 20대에 작품을 1년에 3~4개씩 했거든요. 학부에서는 독문과를 졸업했으니까 연극영화 대학원도 가보고, 직접 학문적으로나 실기적으로도 부딪혀봤어요. 꾸준하게 했죠. 그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게 중요해요. 누군가 제게 (오래가는 방법을) 물으면 꾸준함, 성실함, 자기 관리, 스트레스 관리. 그리고 공부를 하라고 이야기해요.
스트레스 어떻게 관리하세요? 산책을 즐기신다고 인터뷰에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술로 풀면 안 되겠더라고요. 술로 풀면 오히려 부정적인 쪽으로 마음이 흘러가니까. 저는 그렇지 않았고, 아이 낳고 한 7~8년 양평 문호리 시골에 가서 ‘숲멍’했어요. 디톡싱되는 기분이었어요. 밥 안 먹고 간헐적 단식을 하는 것처럼 숲 보면서 간헐적 디톡싱을 하는 거죠. 하루 종일 바람 부는 것만 봐도 몸에서 독소가 빠지는 것을 느꼈어요. 혼자 자연에 오면 생각하고 숲을 보고 빗소리도 듣고 바람 부는 소리 듣고 제가 그런 자연의 소리에 되게 민감하거든요.
좋아하는 산책 코스가 따로 있으십니까?
문호리에 살 때는 강가도 있고 집 옆에 산도 있어서 산책할 곳이 많았어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와서는 남산 산책을 해요. 남산은 코스가 많아요. 산행 수준의 코스도 있고 걸어다니기 쉬운 평지도 있고요. 남산에 자주 가요. 될 수 있으면 걸어다니고.
걸어다니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나요?
모자 쓰고 마스크 쓰면 못 알아보죠.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없어요. 자기 휴대폰 봐야 해서.
삶의 자세나 일에서나 가장 큰 영향을 받으신 분이 있나요?
가족이죠. 남편을 만나고 아들과 딸을 만나고 가족을 이루며 조금 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어요. 나만 잘 살자고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아이들을 포함한 후대의 아이들이 잘돼야 하니까요. 배우로 생각나는 분은 샬롯 램플링이 있네요. 2007년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갔을 때 만났어요. 그분도 여배우로서 저처럼 경력 단절 고민을 똑같이 하시더라고요. 결혼하고 돌아와서 배우가 될 수 있을까, 나이 들어가며 내 자리가 있을까. 그런 똑같은 고민을 하는데 그 나이에도 앉은 자세가 되게 꼿꼿했어요. 그래서 저도 ‘저 나이가 되어도 저렇게 꼿꼿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얼마 전 보테가 베네타 패션쇼에서는 줄리안 무어가 왔어요. 그분도 나이가 60대인데 아들딸, 남편과 가정을 지키며 연기 생활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더라고요. 젊을 때부터 쭉 그 자리를 지키며 사랑받는 모습을 보니 배울 게 많았어요. 저도 배우로서도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런 부분을 많이 닮고 싶더라고요.
요즘 자제분과는 어떤 이야기를 하세요?
(다른 사람들과) 똑같죠. 아들에게는 게임 그만하라고 해요. 딸은 요즘 연예인에 관심이 많아요. 친구들과 놀고 그런 일에도 관심 많을 때고요.
자제분들도 내 어머니가 어머니일 뿐 아니라 말하자면 ‘이영애’임을 알고 있습니까?
아는 것 같긴 한데요, 크게 관심은 안 두는 것 같아요. 딸은 사람 많은 데 가면 “연예인 보고 싶다”고 하고, 홍콩 갔다 오면 “엄마 연예인 많이 보고 왔어?”라고 해요. 평상시에는 다른 엄마들도 만나는 식으로 그냥 똑같아요. 다른 엄마들과 같이 잘 다니고.
요즘은 연예인의 자녀들이 연예계 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님께서 연예인을 좋아한다고도 하셨고요. 자제분께서 관심이 있다고 하면 지원해주실 생각도 있으세요?
우리 아들은 전혀 관심 없고요. 딸은 노래나 춤을 좋아해서 혼자 댄스 학원 다니더니 오디션도 봤어요. 저는 오디션 봐서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놔뒀어요. 1차에 붙었지만 2차에 떨어지더라고요. 본인이 갈 길을 스스로 알아야겠죠.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음악 계통에 관심이 많아서 그쪽에 관여하면서 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음악하고 오랫동안 함께하는 것도.
오늘 촬영한 보테가 베네타는 여러 패션 브랜드 중에서도 미묘하게 우아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영애 님도 우아한 이미지로 유명하고요. 막연한 질문입니다만, 우아함은 어디서 나올까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같아요. ‘나만 우아할 거야, 나만 예뻐질 거야’라고 생각해도 충분히 예쁘죠. 그런데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함께하려는 배려의 마음이 쌓이면 태도나 인상이 부드러워지지 않을까요. 제게 (우아하다는) 좋은 수식어를 주셔서 너무 좋고 감사한데, 저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지 늘 그렇지는 못해요. 집에 가서 저도 애들에게 화나면 짜증 내고 소리 지르는 건 똑같으니까.
전혀 상상이 안 갑니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딸은 제게 이중적이라고 해요. “엄마 이중 성격이야”라고.(웃음)
여러 작품의 캐릭터에 몰입하고 해석하시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변하기도 합니까?
결혼 전에는 작품을 하면 집에 가도 그 작품만 생각하고 작품에 매달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집에 오면 제가 엄마고 아내라 가정을 이끌어야 해요. 그래서 요즘은 집에 오면 오로지 그냥 애들 엄마, 남편의 가족, 이렇게 딱 구분해서 살아요. 다 털어버리고.
저도 <봄날은 간다>를 좋아합니다. 그 영화의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쓰이는 걸 아세요?
그 대사가 그렇게까지 오랫동안 회자될 줄 몰랐어요. 그게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사람이 사랑하고 헤어지고 헤어짐을 당하고, 차이고 차는 감정은 몇십 년이 흘러도 똑같구나 싶어요. 그래서 좋은 영화는 옛날 영화와 새 영화의 구분이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사람의 감성은 그대로니까. 좋은 영화와 좋은 대사가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 참 영광스럽죠.
긴 필모그래피에서 특히 의미 있는 작품들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대장금>을 꼽을 수 있겠죠. 국내에 많이 알려졌으니까요. 그리고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제가 국외에 많이 알려졌어요. 최근작인 <구경이>나 <마에스트라>도 의미 있어요. <구경이>는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OTT에서 반응이 좋았고 젊은 친구들이 좋아해줬어요. 젊은 마니아 친구들이 많이 생겨서 좋았죠. <마에스트라>는 제가 음악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척 행복했어요.
여러 사람들한테 이제 기억되는 삶을 살게 되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 같은데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그냥 가정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애들도 무난하게 키우고, 별 탈 없이 자기 일을 충실하게 한 사람. 오랫동안 성실하게 배우로 살았구나, 자기만 생각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도 돌아보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구나, 그런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요.
인터뷰가 끝나갑니다. 오늘 돌아가시는 길에는 어떤 음악 들으실 것 같으세요?
음악이고 뭐고 저 집에 전화해야 돼요. 애들 스케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그거 챙기느라 음악 들을 시간이 없을걸요.
그런데 인터뷰 같은 평상시 대화를 나눌 때도 제가 듣던 CF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랬어요? 지금 기운이 없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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