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밴드 티셔츠를 사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려 보이는 이미지 탓에 나는 언제나 강하고 세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살았다. 그래서 그 방편으로 가죽 소재의 옷들을 마구 사들일 때가 있었다. 가죽 바지, 가죽 재킷, 가죽 코트, 가죽 부츠 등 다양한 종류로. 이왕이면 너무 새것보단 자연스럽게 태닝된 헌것으로. 그리고 그와 함께 입고 싶었던 건 바로 너바나의 밴드 티셔츠였다. 음악도 물론 좋았지만 심드렁한 태도 속에 반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커트 코베인의 모습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를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으면 나도 왠지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치기 어린 마음이 그때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생각이 희미해질 때쯤, 우연히 세컨드 핸드 숍에 들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각각의 사연들이 짙게 묻은 티셔츠들 중 너바나의 밴드 티셔츠를 발견했다. 오래전 투어 콘서트의 굿즈라 가격이 매우 비싸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섰지만, 집에 돌아와 온라인 마켓 그레일드에서 미친 듯이 검색했다. 적게는 1백 달러부터 많게는 6천~7천 달러를 웃도는 것까지. 천차만별의 가격대를 실감하다 결국 또 포기하고 말았다.
음악은 언제나 패션과 뗄 수 없는 장르다. 마돈나, 데이비드 보위 등 유명 뮤지션들의 스타일은 통념을 깨고 새로운 패션 스타일을 개척하는 혁명적인 역할도 종종 해왔다. 그런지 룩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지는 하드록, 펑크, 헤비메탈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좀 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사운드로, 기성 사회에 반기를 든 반항적인 젊은이들로부터 시작됐다. 그런지 음악과 패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었다. 빛바랜 프린트 티셔츠, 플란넬 셔츠, 찢어진 청바지와 헐렁한 카디건, 가죽 부츠 등 다양한 질감을 혼합하는 특유의 무심한 스타일링은 자연스럽지만 멋스러웠다. 그렇게 음악과 일맥상통하는 그의 패션은 세상을 향한 또 다른 발언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패션의 유행은 손쉽게 바뀌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스키니한 실루엣, 화려한 장식이 넘실대며 그런지 룩은 자취를 감췄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코로나19가 몰고 온 패션의 암흑기를 통과한 뒤, 드디어 그런지 룩이 돌아올 조짐이 보였다. 1990년대 패션이 인기를 끌면서 인스타그램과 텀블러에선 지난 시절의 아이콘들을 아카이빙한 계정이 생겨났고, 그런지 룩을 대표하는 커트 코베인, 조니 뎁과 케이트 모스, 크리스 코넬 등의 스타일이 다시금 언급됐다. 콰이어트 럭셔리, 올드머니와 같은 이상한 별칭이 통용되는 세상에 그런지 룩이 돌아와 별나고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펼치길 바랐다.
나의 바람대로 그런지 룩은 이전보다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방시는 길이와 소재, 패턴이 모두 다른 옷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이어링해 그런지코어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또한 구찌에서는 성글게 늘어진 니트와 기다란 체크 스커트를 매치해 성별의 경계를 허문 룩을 선보였다. 특유의 섹슈얼한 요소를 더한 디스퀘어드2는 실키한 레이스 슬립 톱과 플란넬 체크 셔츠를 매치한 룩을 완성했으며, 마르지엘라는 늘어진 미키마우스 티셔츠에 체크 쇼츠와 라텍스 쇼츠를 겹쳐 입은 후, 헤드피스를 씌워 전위적인 느낌을 더했다. 이 밖에도 에곤랩, 디젤, 루이 비통 등의 브랜드에서 과거의 전형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현대적인 변형으로 새롭게 완성한 다채로운 그런지 룩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지 정신은 젊음을 상징하는 동시에 젊은 세대가 토로하는 불안과 불만, 그리고 갈망 또한 품고 있다. 오늘날에 보이는 이러한 기조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반발심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든 꿈틀대고 움트는 일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희망적이다. 그저 진실된 마음과 유효한 의심을 품고 자유롭게 나아가면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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