뵙기 쉽지 않은 분인 걸 알아서 무척 기쁩니다. 보내드린 질문지는 보셨어요?
일부러 미리 준비하지 않았어요. 준비하면 원래 내 속에 있는 말보다는 준비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어색하더라고요.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가감 없이 빨리, 그냥 생각나는 대로 얘기하는 게 더 솔직한 것 같아서요.
요즘 연예인들은 질문지를 많이 원합니다.
다 달라고 하죠. 그래서 모범 답안을 쓰죠. 그게 자기의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건데, 저는 실수보다는 솔직히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실수라고 하셨지만 제게는 실수 없이 커리어를 쌓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요. 인생 자체가 실수일 수도 있어요. 저는 체육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 방송을 하고 음악을 하게 되었어요.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냐고 하면 저는 흠칫해요.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노래를 시작하셨다는 기사가 정말이었군요.
중고등학교 때 교회 성가대 경험이 용기를 준 거죠. 그때가 통기타(포크 가수) 선배들의 르네상스였어요. 그분들을 클럽에서 볼 수 있었거든요. 그 유명한 어니언스, 김정호, 그런 분들을 만나서 비빌 언덕이 있었죠.
음악을 좋아하셨던 건 확실하네요.
그럼요. 그럼요. 재능이 있냐 없냐는 두 번째 문제고 음악이 너무 좋았으니까 클럽을 전전했죠. “저도 등록금 좀 벌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서.
내가 준비된 게 있고 자신감이 있어야 무대에 올라갈 것 같아요. ‘내가 노래를 좀 하는구나’라고 언제쯤 느끼셨어요?
저는 못 느꼈어요. 늘 두렵고 무서웠어요. 그때는 절박함만 있었죠. ‘무대에 올라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등록금을 벌 수 있다. 그러려면 이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 ‘철저히 준비를 하자’는 생각이 용기와 동기부여가 되었죠. 가수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어요. 친구들은 학생을 가르치거나 막노동을 하는 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 공부를 했죠. 저는 그 아르바이트를 노래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어요. 통기타를 치면서 부른 팝송이 주요 레퍼토리였어요. 신승훈 후배는 2백~3백 곡을 연습했다고 해요. 악보 없이 다 외워서. 저는 그 정도로 전문적인 알바생은 아니었고(웃음) ‘한 10곡 정도의 레퍼토리만 확보하면 무대 하나는 하겠다’ 그런 거였죠. 제 레퍼토리는 통기타를 치면서 하기 쉬운 스탠더드 팝이었어요. 비틀스의 음악 몇 곡, 짐 리브스,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Quando, Quando, Quando’, 엘비스 프레슬리라든가 그런 분들의 음악을 했죠. 가요는 송창식 선배나 어니언스 노래.
그리 하시다 ‘음악에 인생을 걸어야겠다,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라고 생각하신 때는 언제였나요?
제대 후예요. 그때도 가수가 꿈은 아니었어요. 제대 후 TV 프로그램 중 어린이 뉴스인 <달려라 중계차> 앵커 오디션을 봐서 복귀했어요. 군대 가기 전에는 기독교방송 DJ를 했고요. 기독교방송이 통폐합되면서 돌아갈 자리가 없었는데 <달려라 중계차> 앵커를 구해 공개 오디션을 봤어요. 덜컥 제가 된 거예요. 그러다 MBC 프로그램 <영11>의 MC로 방송과 인연이 닿았어요. 당시 KBS 라디오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했고, 그렇게 풀리기 시작했어요.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냥 알바로만 노래했던 이문세인데, TV 프로그램을 자주 하다 보니 연말 특집에서 (소개 멘트로) “이 사람은 DJ이며 사회자인데 노래도 잘해요”라고 소개된 거예요.
그때는 이문세 님의 노래가 아직 없었나요?
전혀 없을 때였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반응이 너무 좋은 거예요. 정식으로 TV 프로그램에 데뷔하니까 여러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때 킹 프로덕션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어 1집부터 5집까지 냈죠. 빅 히트곡도 있었고요. 그렇게 저는 음악하는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한편 저는 <별이 빛나는 밤에> DJ를 동시에 하고 있었어요. 그때는 라디오 DJ의 일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만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별이 빛나는 밤에>(이하 <별밤>)를 떼고는 나의 공적인 일이 존재할 수가 없었어요. TV 프로그램에서도 그렇게 러브콜이 오는데, “저는 별밤지기예요”라는 프라이드가 강했어요. “저는 별밤지기예요. 라디오의 청소년을 아울러야 하는 사람이에요. 어디 가서 웃기고 노래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가 된 거예요.
말씀대로 당시 <별밤>은 정말 청소년들을 선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별밤>은 엄마의 잔소리나 아빠의 폭행으로부터 보호 구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어요. 삐뚤어지기 쉬운 청소년을 잡아주는 역할도 하고.
실제로 안타까운 청소년들의 사연도 많이 왔습니까?
엽서가 하루에 6만여 통, 특집을 하면 10만 통 이상이 왔어요. 엽서를 보내놓으면 10만 분의 1 확률로 내 사연이 나올 텐데, ‘오늘은 (사연이) 안 나오네, 내일 나오나’ 이랬던 청소년이 꽤 많았겠죠. 그렇게 <별밤>을 했어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하잖아요. 그때 이문세의 명성은 행사, 콘서트, TV 프로그램 등 많이 퍼졌는데, 저는 그런 건 변두리라고 생각하고 <별밤>에만 주력했어요.
행사, 콘서트, TV 등 모든 일에 수익이라는 게 있잖아요. DJ의 수익은 어땠나요?
적었죠. 근근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익이었죠. 그런데도 결혼을 하고도 그것만 했으니까. 제 딴에는 굉장한 자부심으로 생각했어요. 다른 걸 포기하고 그걸(별밤지기를) 성취했다, 지켰달까요. 12년 동안 그렇게 살아간 프로그램이 없었으니까요. 그 후 제가 그 프로그램과 작별했어도, 그 영향으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 사랑을 느끼십니까?
별밤 키즈가 지금 성장해서 40~50대가 됐어요. 그 사람들이 사회 어디를 가나 있죠. 그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냥 유명했던 연예인 이런 게 아니에요. 저 사람은 나의 문화를 책임졌던 사람. 나의 정신세계를 어느 정도 성립시켰던 사람. 존경까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의 덕을 봤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 같아요.
‘청소년기의 나를 형성시킨 사람’이군요. 그건 금전을 넘어서는 보상이네요.
엄청난 거죠. 그래서 그런 결정을 하길 잘했다 싶어요. (별밤지기) 그 후에 음악에 더 집착하고 몰두한 건 그다음을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예능 프로그램일까, 더 유명해지기 위해 TV로 더 많이 나가야 할까? 그런 선택의 기로에 있었죠. 그때 <이문세쇼>나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하기도 했고요. 제가 선택한 건 공연입니다.
‘이문세 독창회’ 말씀이시군요.
‘공연을 브랜드화하자. 공연만 잘해도 이문세뿐 아니라 주변의 스태프와 출연진도 경제적인 혜택을 볼 수 있다. 이문세 콘서트의 크루가 되면 직장에 적을 둔 것처럼 경제적인 안정 혹은 인생의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을 만큼 (공연을) 성장시키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콘서트라면 세트리스트를 가수가 짜고 노래 한 곡 끝나면 주저리주저리 얘기하다가 또 노래하던 정도였어요. 거기에 뮤지컬처럼 분업화된 시스템 아웃소싱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문세 독창회’라든가 ‘이문세의 붉은 노을’이라든가 ‘씨어터 이문세’처럼 브랜드화한 공연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었죠.
그런 선진적인 시스템을 만들기까지 영향을 받으신 사람이나 레퍼런스가 있었습니까?
너무너무 많죠. 대한민국의 발전 속도에 비해 공연의 발전 속도는 너무 느렸죠. ‘어떻게 하면 이문세만 잘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공연 문화가 향상될까. 선배인 내가 사명감을 갖고 바로잡자’라고 생각해서 한 게 몇 개 있어요. 약속된 개런티는 먼저 지급하고 공연하자. 그렇지 않으면 사인하지 않는다. 이런 게 지켜지면서 스태프들이 “문세 형 공연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줘요”라고 할 수 있게 됐죠. 그런 것이 전반적인 문화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 아닙니까. 외국 공연을 보면 너무 부러웠어요. 가수는 대기실에서 커피 한잔하고 메이크업하고 기다리다가 스탠바이 오케이 하면 나가서 노래만 쭉 부르면 되었죠. 그때 한국은 가수가 “조명 들어왔어?” “의상은 누구야?” 등의 백몇 가지를 다 확인해야 했어요. 지금 가수들은 음악만 해도 돼요. 시스템이 갖춰졌으니까.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서 바꾸신 게 많네요.
제가 바꿨다고 이름을 날리고 싶지는 않아요. 저부터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니까 그렇게 했다고 자부합니다.
변화를 선도하는 부담이나 무게감 등은 없습니까?
그럴 수 있죠. 욕도 많이 먹고요. 이런 적도 있어요 “이문세 (공연) 안 들어갈래.” “왜?” “너무 까다로워.” 저는 너무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어요. 최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까다로워야 하거든요.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됐지 너무 디테일하게 다 챙겨” 같은 경우도 있었어요. 저는 사명감을 가졌죠. 노래를 잘하는 건 기본이지만, 그런 걸(시스템) 구축해 길을 잘 닦아놓는 것도 선배가 가야 할 가시밭길이라 여겼어요. 그래서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그런 건 제가 가요계를 떠나도 (남겠죠). ‘이문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왔어’가 아니고, 그런 걸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공연 문화가 많이 발전했어요.
음악평론가 임진모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배리 매닐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신 걸 봤습니다.
그분의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곡을 쓸 때 감미로우면서도 쉽지 않은 배리 매닐로 특유의 코드 등을 많이 연구했죠.
저는 그게 신기했습니다. 당시 1980~90년대 한국 사람이 만들고 듣던 노래와는 조금 다른 노래였을 것 같아서요. 그때 어떻게 방향성이 다른 노래를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유재하 씨 곡을 받으며 유재하 음악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재하는 저보다 서너 살 어린 동생인데 ‘어떻게 저런 팝 스타일의 가요를 만들 수 있을까?’ 싶었어요. 듣다 보니 배리 매닐로가 떠올라서 재하에게 물어봤더니 재하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스티비 원더와 배리 매닐로 등 영향받은 사람이 몇 명 있어요. 그 당시는 댄스 트로트가 많았죠. 최헌 선배의 ‘오동잎’이 1위 하던 때였어요. 가요 하면 트로트, 아니면 통기타일 때 우리는 발라드 계열 노래, 새로운 영역의 노래도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좋으니까 그렇게 만든 거죠. 그리고 이영훈 씨랑 만났고요. 이영훈 작곡가는 그냥 시예요. 노랫말도 시고 멜로디도 클래식하고. 그 음악에 배리 매닐로 스타일의 음악, 그런 것들이 우리나라 발라드 계열에 정착된 거죠. 유재하 스타일의 계보를 잇는 친구들이 몇 명 있고요. 유희열이 그렇죠. 익숙한 이문세 스타일의 발라드는 이제 변진섭, 신승훈 계열이고요.
노래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깁니까?
노랫말을 어떻게 표현할지. 가사 전달을 어떻게 할지가 중요해요. 멜로디나 가창이 미흡하더라도.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곧 멜로디를 얹은 노랫말이에요. 노랫말은 시죠. 말하자면 저는 시를 읊는 거잖아요. 그 시를 읊을 때 독자나 청취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빠져들지는 시를 전달하는 낭송자에 의해 좌우돼요. 오버해서 하기도 하고, 덤덤하게 하기도 하고. 노랫말이라는 시를 표현하는데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에 대한 연구를 제일 많이 했어요.
노래를 만드실 때는 좋은 시이기도 한, 좋은 가사가 중요하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새 앨범을 준비할 때 아무리 좋은 멜로디라도 노랫말이 나와 안 맞으면 쓸 수 없어요. ‘알 수 없는 인생’이 노랫말이 좋아요. 리듬은 펑키하고 신나는데 노랫말을 음미하다 보면 눈물이 울컥할 수 있는 곡이죠. 그런 노랫말은 오래갑니다. ‘옛사랑’도 노랫말이잖아요. 노랫말의 힘으로 30년, 40년을 가고 있어요. 노래가 주는 힘은 결국 시예요. 저는 70~80%는 노랫말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해요.
프로 음악인 이문세의 전문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즐겁습니다. 좋은 노래는 처음 들으시거나 불러보기만 해도 느낌이 옵니까?
저는 그래요. 저는 노랫말로 끝까지 가는데, 처음 데모(음원)가 올 때, 멜로디가 너무 슬프거나 아름다우면 멜로디의 완성도가 저를 훅 하고 걸어요. ‘그다음에 얹히는 시는 뭘까’ 싶죠. 가사가 미흡하면 더 만들어요. ‘이건 너무 어린애 같아’ ‘내가 부르기에는 너무 닭살 돋아’ ‘이런 것들은 좀 어른스럽게’ 혹은 ‘좀 더 깊이 있게’. 저는 관념적인 걸 싫어해요. 예쁜 말로 뜬구름 잡는 건 하나도 공감을 못해요. 회화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구체적인 묘사를 좋아합니다. ‘광화문 연가’는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내가 살아온 인생이 쭈르르 필름같이 펼쳐지고, 나는 어떻게 가야 할까, 어차피 정동교회당은 남아 있고 나는 가는데, 그러면 그 길이 헛헛한 길일까 뿌듯한 길이어야 할까,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노랫말을 만들어야만 제가 “오케이, 레코딩합시다”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조조할인’도 무척 회화적인 가사네요.
약간 위트가 있죠. 흑백필름, 조조할인, 이런 정서가 다 묻어 있어서 ‘이건 찰떡궁합이다. 노래를 내가 잘하기보단 사람들에게 잘 전달만 하면 된다’ 싶었어요. <가요톱10>이라든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마지막으로 1위를 한 곡이 그 ‘조조할인’이었어요. 가장 최근에 히트한 노래라고 했는데 그게 어느덧 1996년이네요. 그 이후에는 ‘빨간 내복’이라든가 ‘봄바람’ 등 여러 음악이 있었지만 순위에서 1위를 한 적은 없었죠.
프로그램이나 순위 등 많은 게 변했죠. 음악 산업의 변화도 많이 느끼십니까?
너무너무 많이 바뀌었죠. 좋은 쪽도 있지만 불편한 쪽도 많아요. 음악을 완성할 때 투자를 해야 되는데, 홍보나 마케팅 쪽에 투자를 많이 하고 실제로 그 음악을 만드는 본질에는 투자를 안 하는 거죠. 예전에는 노래 한 곡을 위해서 런던의 오케스트라한테 갔어요. 함께 녹음하고 그 한 곡을 위해 1억을 썼어요.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거죠. 음반이 없어지고 음원만 있잖아요. 음원 시장에 투자해서 그 정도를 뽑아낸다는 건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한국에 월드 스타가 탄생하니까 음반 판매 추이가 달라졌지만 그건 최근 이야기죠. 과도기에는 가수들이 투자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홈 레코딩 같은 게 활성화될 수밖에 없었죠. 저렴한 제작비로 잠깐 치고 빠지는 음원 정도. 예전에는 1위를 한 번 하면 한 두세 달은 차트에 계속 있었는데 요즘은 1주, 2주 이렇잖아요. 그러니까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없는 구조가 되고, 그게 악순환이 됐다고 생각해요. 좋은 점도 있어요. 음원 쪽에 투자를 많이는 못하지만 홈 레코딩을 통해 협업해서 양산하듯이 음악을 만들잖아요. 트렌드에 발맞추면 그 사람들은 계속 어느 정도 안정적인 결과가 나오겠죠.
그러면 빨리 많이 뿌리는 사람이 유리하죠. 저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게 중요해요. 제 갈 길을 가자. 그래서 새 앨범을 준비하고 내는 것뿐이에요. ‘사업은 회사에서 하는 거고 나는 음악을 해야지. 그래서 빅히트가 되든 아니면 사람들에게 계속 회자되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는 그냥 내 음악을 하면 돼.’ 그렇게 생각해요. OST도 좋은 곡이면 하고. ‘사랑은 늘 도망가’도 OST잖아요. 약간 트로트 감성도 있지만 그 드라마와 그 배경과도 잘 어울려서 제가 선택한 거고요. 당시 최고의 사랑을 받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회자되기도 했죠. 좋은 것은 시간을 두고 가만히 있으면 언젠간 또다시 조명받을 수 있다는 걸 느낍니다.
저는 요즘 ‘서로가’를 알게 되어 계속 들었습니다. 그 노래가 참 좋더라고요.
‘오늘 하루’라는 곡이 있어요 그거 한 번 혼자, 이렇게 혼자 조금 힘들고 피곤한 날, 그 노래를 한번 얹어보면 ‘이 노래는 또 왜 이런 식으로 나를 위로하나’ 싶을 거예요. 오래된 곡이거든요. 앨범마다 한 세 번에 걸쳐 편곡을 다시 했어요. 13집에 있는 게 조금 더 완성된 ‘오늘 하루’예요. 내 얘기 같기도 하고, 사람을 위로해주는 얘기 같기도 하죠.
자기 노래를 스스로 다시 들어보는 편입니까?
가끔. 매일은 조금 이상하니까.(웃음) 드라이브할 때 CD 한 번 얹어서 듣고 나면 그때 감정이 되살아나요. ‘아 이때 이렇게 노래하지 말걸’ 후회도 하고요.
저도 나름 부침 있는 잡지계에서 일해오고 있습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오랫동안 커리어를 이어오신 이문세 님 같은 분들께 비슷한 질문을 합니다. 오랫동안 잘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랫동안 잘됐다’는 것의 기준과 평가가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는데요. 저는 한 번도 정상이라는 자리에 올라가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남들이 인정하는 이문세 외에 내가 나를 인정하는 말은 ‘이 정도면 됐어’예요. 가요계든 방송계든 공연계든, 내가 완전히 유아독존, 모두 내 밑에 있어,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저는 오늘 하루 공연이 잘됐으면 최고. 공연의 모든 게 만족스럽게 돌아가면 ‘이 맛에 내가 음악하는 거야’ 그게 끝이에요. ‘이 정도 됐으면 세상이 날 알아주겠지’가 아니라 스스로 평가해요. 내 공연, 음악, 어느 TV 프로그램에 한 번 나갔는데 사람들 반응이 좋아, 그러면 ‘그걸로 끝이야. 너무 좋은 일이니 감사해라’ 이거죠. 그 기쁨을 오래 가져가지도 않아요. 거기에 젖어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 자신에게 더 냉정한 거죠. 그게 저를 만드는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이문세!” “이문세!” 외치면 저는 “감사합니다” 하고, 차를 타고, 차 문을 닫는 순간, 다시 내려와야죠. 저는 그렇게 해왔어요. 붕 떠 있는 마음으로 살아온 적은 없어요.
그런 건 누가 알려줍니까?
아닙니다. 본능일 텐데, 저는 무대에서는 가장 멋지고 빛나는 아티스트지만 무대 계단 몇 개 내려오는 순간 완전히 평범한 사람이 돼요. “그렇게 하라”고 누군가 저에게 이야기한 적도 없어요. 제가 나중에 더 쓸쓸하고 허무할 것을 미리 커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당장 누군가 “당신은 이제부터 공연할 수 없습니다” “건강상 노래를 못 합니다”라고 하면 굉장히 슬프고 섭섭하겠지만 그럴 수 있어요. 받아들여야죠. 죽음을 받아들이듯이. 40년 동안 박수 받으면서 노래했잖아요. 무슨 욕심이 더 있어요. 저는 당장 오늘 누가 마이크를 뺏거나 꺾어놓는다고 해도 그게 정당하다면 인정할 거예요.
그 말씀 자체가 역으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서 했어요. 그래서 (노래를 그만해야 할 때) ‘아니야,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거든요. 신이시여,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저는 아직 배가 고픕니다.’ 전혀. 그런 생각은 없어요. 저는 배를 채우고도 남아요. 제가 가진 능력, 제가 가진 음악적 소양. 이런 것들이 과분할 정도로 세상에 알려진 거예요.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며 가족과 신앙이 이문세의 음악과 인생에서 좋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 추측했습니다. 시시콜콜한 가정사를 여쭐 생각은 없습니다만 가족과 신앙이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저는 가족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제 가족이고요. 그걸 떼놓을 수가 없어요. 신앙처럼 저희 가족을 숭배하고, 가족의 와해가 제게는 신앙을 잃는 거예요. 저는 결혼 전부터 부모님과 가족이 너무 소중했어요. 내내 그랬고 지금도 가족이 우선이에요. 가족이 ‘아빠 또는 남편이 우리를 등한시하진 않았나’라고 여길 수는 있겠죠. 물리적으로 제가 공연 많고 해외 공연도 있어서 떨어져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의 정신에서 가족은 신앙과 같은 거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무대에서 내려가서 보통 사람이 되는 데도 가족이 도움이 되었겠네요.
그럼요. 가족이 항상 저를 바로잡아줬죠. 가족은 항상 “아빠 정말 팬이에요” “저한테 사인해줄 수 있어요?” “이게 잘못됐어요” “그래서 돈을 얼마나 벌었어?” 이러지 않잖아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이제 좀 쉬세요” “애쓰셨어요, 땀 좀 봐” 같은 말을 나누고 소머리국밥 먹으면서 영양 보충하는 게 가족이란 말이죠. 가족은 가장 냉철하게 저를 바라보고 저에게 과하지 않은 요구를 해요. 그래서 공연 끝나기가 무섭게 저는 가족으로 돌아가죠.
저 같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이문세 님은 정말 많은 영광을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걸 다 이룬 지금의 이문세는 무엇을 위해 노래합니까?
그게 가장 큰 숙제고 딜레마예요.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서 노래할까? 생활을 위해서인가?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진짜 이문세의 음악이 갈급한 팬들을 위해서 해야 되는 건가? 그에 대한 정체성을 아직 못 찾고 있어요.
아직 고민하시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그게 저는 너무너무 아파요. 안 해도 되거든. 아까 물리적으로 (누군가) “이제 못 합니다”라고 하면 수긍한다고 했잖아요. 나는 뭐지? 직업이니까 그 탄성으로 하는 건가? 언제까지 내가 공연을 해야 될까? 항상 저는 최선을 다하고, 이게 마지막 공연이라는 생각을 갖고 해요. 그 마지막이 그냥 스케줄에 의해서 연장되고 또 연장되는 거잖아요. 제 나이가 이제 60대 중반인데 사람들은 지나가는 말로 “80까지는 하셔야죠”라고 해요. 그 사람들은 툭 던지는 이야기지만 저는 ‘진짜 80까지 하라고? 할 수 있어? 그렇게 되면 나 추해질 텐데?’ 같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요). ‘박수 받을 때 그만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내년에도 또 공연이 잡혀 있는데 하는 게 옳은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하지만 아직 부르지 않은 시가 있지 않습니까? 이문세에게서 나올 새로운 노래가?
물론이죠. ‘그런데 그걸 꼭 내가 해야 되나? 이문세가 히트곡을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막 애써야 되나? 지금도 공연에서 (히트곡을) 다 못 부르는데?’ 싶어요. 단지 지금 저한테 주어진 이 기회를 어떻게 좋은 쪽으로 활용할지 생각합니다. 어떻게 추해지거나 더럽혀지지 않고 나 자신을 고귀하게 고결하게 잘 영위하며 (경력을) 마무리할까, 그게 언제일까, 늘 저는 자문해요. 아직 그 숙제를 못해서 (무엇을 위해 노래하는지) 답을 드릴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같은 시대에 태어나 함께 살면서, ‘그 사람은 시로 나를 다독여주기도 했고, 눈물을 빼놓기도 했고, 어떨 때는 굉장히 용기를 주었던 노래하는 시인이야’라고 기억될 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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