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버벌진트 래퍼·프로듀서
조용필 정규 앨범 19집 <Hello>에 유일한 피처링 아티스트로 참여하셨죠. 당시 피처링 제안을 받은 이유에 대해 들으셨나요?
<Hello>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으셨던 작곡가 MGR 님이 조용필 선생님께 저를 추천하셨어요. 그 말을 브랜뉴뮤직의 라이머 사장님을 통해 전달받았고요. 당시 저는 ‘이게 사랑이 아니면’을 발매하고 방송 활동을 하던 시기였어요. 라이머 사장님이 “진태야 조용필 선생님 새 앨범에 랩 피처링 해볼래? 너무 바쁜데 할 수 있겠어? 좀 힘들려나?” 하는 뉘앙스로 말씀하셨죠. 저는 깜짝 놀라서 “무조건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타이틀곡 ‘Hello’를 작업하는 동안 조용필 선생님께서 음악적으로 어떤 점을 요구하셨나요?
‘Hello’ 의 랩 파트 작사 과정에서 따로 요구하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저 스스로 조용필 선생님이 10년 만에 내시는 정규 앨범에 누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랩 파트를 만들었어요. 날짜도 정확히 기억합니다. 2013년 3월 8일 오후 3시. YPC 프로덕션에 방문해서 처음으로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살아 있는 전설이잖아요. 선생님 앞에서 녹음하려니 생각처럼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어요.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녹음 시간이 꽤 걸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간에 조용필 선생님께서 “진태야,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돼”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나네요.
후배 뮤지션들에게 ‘조용필 앨범 피처링’은 어떤 의미입니까?
‘조용필 앨범’ 트랙리스트에 ‘featuring’ 표기가 들어간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제목 뒤에 제 이름이 쓰여 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느낌입니다. 저도 비교적 꾸준히 작업을 해온 터라 수백 곡 넘게 발표했거든요. 하지만 제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서 ‘자랑스럽다’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은 ‘Hello’입니다. 저 역시 조용필 선생님 정규 20집을 기대하고 있어요. 새 앨범에 게스트 피처링이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앞으로도 ‘Hello’ 피처링 작업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겁니다.
조용필 선생님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직접 뵌 횟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2013년 4월 23일 올림픽홀에서 열린 첫 쇼케이스가 기억납니다. 대기실에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가수들이 축하하러 오셨어요. 하나같이 멋진 오라를 지닌 분들이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내가 한국 대중음악 역사의 산증인들 사이에 앉아 있구나. 지금 꿈을 꾸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함께 무대에 선 입장에서 느꼈던 ‘조용필 콘서트’만의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일단 음향이 최고 수준이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팬분들이죠. 40년 넘게 함께해오신 분들이 감동받고 즐거워하는 표정으로 무대를 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말 부럽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Hello> 앨범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걷고 싶다’가 공개될 때는 저도 살짝 눈물이 났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조용필 선생님의 곡은 무엇인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너무 많아요. 일단 ‘단발머리’가 있죠. ‘간양록’ ‘여와 남’ ‘생명’ ‘비련’ ‘한강’ ‘어제, 오늘, 그리고’ ‘고독한 Runner’ 등 실험적인 곡들도 좋아하고, 조용필 선생님 특유의 애절함이 담긴 곡들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언제 들어도 가슴속에서 불이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 곡은 ‘꿈’입니다.
오랜 시간 뮤지션으로 활동하다 보면 음악 스타일이나 작업 방식에 관성이 생길 것 같습니다. 반면 <Hello>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명곡의 탄생’이라는 평을 받았죠. 프로듀서 입장에서 바라본 조용필의 대단한 재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선생님의 가창 실력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고요. 이번 인터뷰를 앞두고 선생님 디스코 전체를 다시 한번 들으며 놀란 점은 ‘그 당시 어떻게 이런 모험적인 곡을 만드셨을까’ 생각하게 하는 음악적 용기였습니다. 여러 장르의 요소를 대담하게 활용하셨으니까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노래마다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한 아티스트가 정규 앨범을 19장 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뮤지션으로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활동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량과 창작에 대한 열정, 도전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 없이는 정규 앨범을 19장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도 ‘한국어 다음절 라임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잖아요. 버벌진트 님이 생각하는 조용필 선생님의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에서 ‘가왕’이라 불리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잖아요. 가수 조용필을 설명하는 많은 수식과 기록들이 있죠. 개인적으로 바라본 조용필 선생님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 대중음악을 통해 보여준 장인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2 | 박준우 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차지하는 조용필의 위치를 비유하자면 미국, 영국, 일본에는 어떤 뮤지션이 있습니까?
미국은 척 베리, 영국은 제프 벡, 일본은 다니무라 신지를 꼽고 싶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조용필 선생님보다 먼저 음악을 시작했다는 점일 텐데요.
세 뮤지션은 기타를 놓지 않으면서 록 장르에 큰 영향을 주었고, 나이가 들어서도 당대 음악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앞서갔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용필 선생님의 55년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를 5곡만 꼽자면 어떤 곡이 있을까요?
우선 ‘단발머리’. 사실 곡 자체만 놓고 보기보다는 앨범 전체를 함께 이야기하면 더욱 좋을 것 같은데요. 트로트와 함께 담긴 신스팝 사운드는 여러모로 신선하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긴 시간 사랑받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가수들이 조용필 모창할 때 부르는 곡 중 하나죠. 두 번째는 ‘고추잠자리’.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얼터너티브 장르를 남들보다 앞서 만든 뮤지션임을 증명하는 곡이죠. 지금 들어도 여전히 배울 게 많은 곡입니다. 세 번째는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토록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곡이 또 있을까요? 내레이션과 하이 노트가 교차하는, 5분이 넘는 이 곡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조용필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네 번째는 ‘슬픈 베아트리체’. 현악 앙상블과 건반만으로 완성했는데 록 느낌이 나요. 1990년대 조용필이 얼마나 음악적으로 훌륭했는지 알 수 있는 곡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찰나’. 굳이 설명을 더할 필요가 없는 명곡입니다. 조용필의 훌륭한 현재가 반영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연한 질문입니다만 ‘포스트 조용필’이라고 할 수 있는 혹은 그 재목이 될 만한 인물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없다고 말씀드려야겠죠. 한편으로는 BTS 멤버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릴 때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각자의 색채를 찾아서 솔로 활동을 하고 있잖아요. 앞으로 아주 긴 시간 홀로 혹은 함께 활동을 이어간다면 음악가로서의 오라가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멤버 한 명 한 명이 자기 특색을 찾아가고, 그 특색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감각도 있으니까요.
‘조용필 노래’의 공통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통속적인 주제를 세련되게 들리게 만드는 힘. 한국적인 정서가 록, 펑크, R&B 속에서 자연스럽게 들려요. 더 놀라운 점은 그 모든 것을 의도하고 고려해서 만들었다는 인상이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가왕’ 조용필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나이와 깊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웃음) 나름대로 말씀드려보자면 커리어 초창기 성인 가요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시대적 배경, 공백이 있을지언정 멈추지 않고 활동하는 꾸준함, 아티스트의 오라를 유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조용필 선생님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조용필만큼 영향력 있는 가수가 나올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게 아닐까요. 커리어 내내 음악적으로나 흥행 면에서 매번 스스 갱신해나갔고, 여전히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는 뮤지션이라는 점도 정말 큰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조용필 선생님은 ‘가수’ ‘연예인’ ‘노래하는 사람’이 아닌 ‘음악가’라는 개념을 보여준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3년 발표한 ‘Bounce’는 같은 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를 수상했습니다.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노래’는 어떤 기준으로 선정하나요?
‘올해의 노래’는 여러 가지 요소를 살핍니다. 여러 분야의 선정위원들과 함께 그해 나온 노래들을 한데 모아 살피죠. 그 과정에서 상업적 성과 외에도 얼마나 음악성이 높은지,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 곡의 완성도와 표현 방식이 얼마나 독창적인지 등을 보는 편입니다.
평론가님이 바라본 조용필은 어떤 뮤지션입니까?
여전히 욕심도 고민도 많은 현역 음악가라고 생각합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이토록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곡이 또 있을까요? 내레이션과 하이 노트가 교차하는, 5분이 넘는 이 곡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조용필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3 | 김춘추 밴드 ‘실리카겔’ 보컬 & 기타리스트
조용필 선생님은 기타리스트 출신 가수로도 유명하죠. 본인이 생각하는 기타리스트 출신 보컬 뮤지션의 특징 혹은 장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기타가 지닌 장점 자체가 싱어송라이터에게는 매우 유리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기타는 다양한 음악 활동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악기죠. 아주 다양한 톤을 낼 수 있으면서도 휴대하기 편해 편곡 아이디어를 바로바로 기록하고 실현할 수 있고요.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뮤지션이라면 작곡을 할 때도 앞서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조용필 선생님은 50주년 콘서트 당시 2시간 내내 이어진 라이브로 화제가 됐죠.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20곡을 부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도 힘들지만 집중력을 유지하는 게 어렵습니다. 조용필 선생님의 무대는 엄청나게 크잖아요. 그런 대규모 무대에서는 정말 많은 소리가 뒤섞일 텐데, 그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잘 찾아서 컨트롤하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해요. 긴 시간 쉬지않고 노래하는 일은 프로 뮤지션만이 할 수 있는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조용필 음악’이 젊은 뮤지션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랜 기간 꾸준히 활동하시고, 음반을 지속적으로 발매하신다는 점 자체로 젊은 뮤지션에게는 정말 귀감이 됩니다. 젊은 뮤지션에게는 짧은 활동을 마치고 음악을 쉬거나 포기하게 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해요. 그 상황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환경적인 것일 수도 있죠. 그런 점에서 아주 오랫동안 음악을 만들고 활동을 멈추지 않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죠. 젊은 뮤지션이 목표로 삼아야 할 행보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 대중음악 가수에게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단독 콘서트는 어떤 의미입니까?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공연한다는 건 그만큼 큰 규모의 무대를 꾸밀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더 큰 사운드와 다이내믹한 연출을 보여준다는 건 뮤지션으로서는 무척 소중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수많은 관객들로 가득한 공간을 음악으로 채우고 만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실리카겔 콘서트에서 조용필 커버곡을 선보인다면 어떤 곡을 부르시겠습니까?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조용필 베스트 1집>에 수록된 ‘단발머리’를 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단발머리’는 정규 1집 앨범 수록곡이지만 <조용필 베스트 1집>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편곡됐어요. ‘단발머리’ 편곡 버전은 실리카겔이 잘 다루지 않는 리듬감이 인상적인 곡이어서 더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조용필 선생님의 가장 큰 무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용필 선생님의 디스코그래피를 쭉 들어보면 당대의 음악 흐름을 꾸준히 반영한다는 게 느껴집니다. 1970년대 발매하신 음반에는 드라이한 팝과 디스코 계열이, 1980년대에는 뉴웨이브적인 신스 사운드가 담겨 있어요. 1990년대에는 발라드 트랙과 LA 메탈적인 접근, 2000년대 이후 발매하신 음반에서는 모던록과 오토튠까지 적극적으로 사용하세요. 이런 음악적 변화가 오랫동안 건재하실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해요. 뮤지션에겐 무엇보다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춘추 님이 바라본 조용필 선생님은 어떤 가수입니까?
196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무대와 스튜디오에서 활동하시는 뮤지션이 계시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모습을 보고 배워온 뮤지션으로서 그분들이 활동하신다는 점만으로도 저 역시 성장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조용필 선생님을 직접 알지는 못해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뮤지션으로서 매번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음반 발매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용필의 음악 인생
조용필의 데뷔
첫 음악 활동은 1968년 결성한 4인조 록그룹 애트킨즈로 시작했다. 애트킨즈에서는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으며, 미8군을 주 무대로 삼아 공연했다. 조용필이 처음부터 노래를 불렀던 건 아니다. 애트킨즈 보컬이 건강이 나빠지면서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이후 조용필은 ‘파이브핑거스’ ‘김트리오’ ‘조용필과 그림자’ 등을 거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밴드 ‘위대한 탄생’은 1979년 결성했다.
조용필의 첫 히트곡
조용필의 데뷔곡은 1976년 발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당시 국내에서 화두였던 재일동포 고국 방문에 힘입어 큰 인기를 얻었고 조용필은 단숨에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조용필은 처음부터 조용필이었던 셈이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80년 조용필 정규 1집 앨범에 편곡 버전으로 수록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1980년 버전에 가깝다. 해당 곡은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모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며 화제를 모았다.
조용필의 콘서트
2003년 조용필은 데뷔 35주년을 맞아 단독 콘서트를 연다. 장소는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그전까지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솔로 콘서트를 연 가수는 한 명도 없었다. 당시 조용필의 나이는 53세. 올해 5월 조용필은 데뷔 55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올림픽주경기장에서 팬들을 맞았다. 조용필이 보유한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단독 콘서트 8회’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올림픽주경기장은 지난 8월 리모델링 공사에 착수했다. 이로써 조용필은 기존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첫 콘서트와 마지막 콘서트를 치른 가수가 됐다.
조용필의 첫 밀리언셀러
조용필 첫 정규 앨범 <조용필 1집>은 1980년 발매됐다. 타이틀곡은 조용필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인 ‘단발머리’로 자신이 직접 작곡했다. 총 수록곡은 11곡. ‘돌아와요 부산항에’ ‘잊혀진 사랑’ ‘한오백년’ ‘대전 블루스’ 등 조용필 대표곡들이 이 앨범에 들어 있다. 장르적으로는 트로트, 발라드, 민요, 록 등 다양한 색깔이 녹아든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한국 최초로 1백만 장 이상 팔린 단일 앨범이기도 하다. 정규 1집 발매로부터 14년 뒤 조용필은 한국 가수 최초로 누적 음반 판매량 1천만 장을 돌파했다.
조용필의 20번째 앨범
조용필은 지난 55년간 총 19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가장 최근에 발표한 정규 앨범은 2013년 공개한 <Hello>. 해당 앨범은 10년 만의 정규 앨범으로 팝, 록, 일렉트로닉 장르를 세련되게 담아내며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이듬해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Hello>를 ‘우수 팝 음반’으로 선정하며 “고집이 아닌 도전이야말로 가왕(歌王)을 넘어선 가황(歌皇)의 경지에 오르는 영리한 선택”이라고 평했다. 2023년 4월 조용필은 EP 앨범 <Road to 20 - Prelude 2>를 통해 수록곡 일부를 선공개하며 정규 20집 발매를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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