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트를 많이 입으셨는데 평소에도 수트 입을 일이 종종 있습니까?
예전에는 진짜 많이 입었죠. 2016년에 트로트 앨범을 처음 내고 2년 정도는 늘 수트만 입고 활동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어르신들 앞에 많이 서다 보니까 정장이 제일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넥타이까지 꼭 챙겨서 입었죠.
트로트는 스리피스죠.
클래식이까요.(웃음) 이제는 다들 개성 있게 입으시는데 그때는 저도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여서 정장 사러 정말 많이 돌아다녔어요.
주로 어디서 사셨나요?
동대문이나 아웃렛이었죠. 싸니까요. 20만원대에 살 수 있었거든요. 스타일리스트도 없어서 시간 날 때마다 아웃렛 가서 직접 입어보고 샀어요. 지금은 집에 10벌도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가수는 노래방 가면 어떤 노래 부르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노래방 잘 안 가요.(웃음) 축구선수가 시간 내서 조기 축구하러 안 가잖아요. 비슷한 느낌이에요. 기억을 더듬어보면 옛날에 노래방 갔을 때는 정말 중구난방으로 불렀어요. 워낙 다양한 장르의 가수분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저도 여러 장르를 했던 사람이니까요.
커리어 초기에는 발라드, R&B 장르를 주로 부르셨잖아요. 트로트 가수로 전향해야겠다 결심하던 당시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전향이라는 말이 참 애매한 점이 있어요. 유독 다른 장르에서 트로트 앨범을 낼 때 전향이라는 표현이 붙는 듯해요. 힙합 하시는 분이 발라드 앨범을 낸다고 ‘발라드 가수로 전향했다’고 하지는 않거든요. 젊은 가수가 트로트를 부르면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실패해서 이쪽으로 어쩔 수 없이 건너왔다’는 느낌으로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재즈를 전공했어요. 발라드, 록, R&B, 심지어 랩까지 해봤고요. 음악 생활을 오래 하면서 새로운 장르를 했을 뿐이에요. 트로트가 더 솔직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미스터트롯> 이후 발매한 정규 앨범, <MMM>, <FORM>에도 다양한 장르가 녹아 있죠.
맞아요. 록, R&B, 재즈, 트로트, 국악, 재즈가 다 있어요. 저는 그렇게 음악을 하는 게 너무 좋거든요. 트로트를 부르면서 큰 사랑을 받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트로트만 해야지’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폼미쳤다’도 어떻게 보면 뉴디스코 곡이죠. 장르는 창법에 따라서도 달라져요. 예를 들어 같은 노래를 불러도 음절 앞에 힘을 주면 트로트처럼 들리지만, 뒷박을 타면 R&B 느낌이 들어요. 바이브레이션도 ‘어어~’ 하고 프레이즈를 길게 두면 트로트가 되지만, 빠르게 떨 듯이 하면 R&B가 되고요. 지금은 장르의 경계선이 완전히 무너진 시대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와중에 재미있는 트로트 요소의 곡이 나올 수도 있겠죠. ‘니가 왜 거기서 나와’처럼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해보고 싶어요. 재미있게요.(웃음)
그럼 질문을 바꿔서 트로트 장르의 곡을 내보고 싶다고 생각하신 계기가 있었나요?
제 커리어에서 트로트 작곡의 시작이라면 ‘니가 왜 거기서 나와’일 텐데요. 한 날은 개그맨 후배가 재미있는 곡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이 친구가 부를 거라면 유쾌하면서도 유머 코드가 있는 노래면 좋겠다 싶었어요. 노래를 못하지도 않으니 가창력도 보여줄 수 있는 맞춤형 노래를 만들어보자 해서 쓴 곡이에요.
지금은 영탁 대표곡이 됐지만, 원래는 남이 부를 노래로 만드셨던 거네요.
그렇죠. 그러다 이 친구가 사정상 그 노래를 못 부르게 됐어요. ‘그럼 누가 부르면 좋을까?’ 찾던 중에 주변에서 ‘너랑 잘 어울리니까 한번 해봐’라는 말을 듣고 직접 한 거예요. 사는 게 참 그런 것 같아요. 계획대로 안 되잖아요. 그냥 물 흐르듯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커리어 첫 앨범은 2005년 <가문의 위기> OST 앨범이죠. 그로부터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미스터트롯>까지 13년이 걸렸고요. 그동안 가수를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연습생 하려고 서울에 올라온 게 2004년이에요. 음악해보겠다고 서울 올라온 지도 벌써 20년이네요. 사실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한 가지였어요. 인복이죠.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주변에 좋은 동료들이 늘 많았어요. 힘들 때마다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제 안에서 이유를 찾자면 노래는 제가 제일 즐겁게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선택지는 생각도 안 했어요.
흔히 말하는 선택과 집중을 하셨던 거네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가 오래 고민하고 걱정하는 걸 싫어해요. 물론 작업하다 보면 예민해지고 복잡해질 때도 있지만, 안 좋은 건 빨리 버리는 편이에요. 해결 못할 문제는 굳이 계속 잡고 있지 않아요. 그러던 중에 기가 막힌 진리를 하나 알게 됐죠.
어떤 진리였나요?
노래는 하면 할수록 무조건 실력이 는다. 나 자신을 속이지만 않는다면, 나는 오늘보다 내일 무조건 더 잘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 내 실력이 출중하면 나를 찾는 사람은 반드시 생긴다.
운동선수가 그렇듯 가수도 실력이 정말 뛰어나면 듣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죠.
제가 부름받지 못하는 이유는 실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어요. 포기만 안 하면 아주 조금씩 실력이 좋아질 거고, 한 번쯤은 나를 찾는 사람들이 무조건 생길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어요. 누가 말해준 건 아니었지만, 저 혼자 이 생각을 불변의 진리처럼 믿었어요.
방금 말씀하신 생각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걸리셨나요?
다행히 빨리 찾았어요. 서울에 올라오고 5년 정도 지나고? 노래 연습을 2~3년 정도 열심히 하고 2009년에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나가서 우승을 했어요. ‘연습해서 도전하니까 상을 하나 주네?’ 싶더라고요. 그 뒤로는 반복이었죠. 이만큼 하니까 데뷔를 하네? 커리어가 쌓이니까 학교 강단에서 불러주네? 이제는 모창 프로그램에서도 불러주네? 곡 써달라는 사람들이 생기네? 트로트를 해보니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같은 노래가 나오네? 2~3년 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겠지 했는데 <미스터트롯>이 오네? 이런 식으로 계속 왔던 거죠. 어떤 일이든 10년 한 사람은 도사라고 하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내일의 나는 오늘 나보다 분명히 더 잘한다. 연습만 많이 하면. 그런 생각으로 20년 가까이 해왔어요.
<미스터트롯> 이후로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작업하는 환경이 더 좋아졌죠. 장비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고. 그러면서 더 유연하고 재미있게 음악을 하게 됐어요. 저는 경연 끝나고 나서 작업량이 더 늘었거든요. 후배한테 곡도 훨씬 많이 주게 됐고요.
보컬 트레이너 출신으로도 유명하시죠.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생업 때문에 한 거죠.(웃음) 돈은 벌어야 하니까요. 학원 강사도 했고, 학교에도 2년 정도 출강했어요. 그전에 가이드 보컬이랑 코러스 했던 경력 때문에 그렇게 코트 김서룡 옴므, 셔츠·타이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취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가이드 보컬은 얼마나 하셨어요?
정말 많이 했어요. 아실 만한 분들로는 SG 워너비, 다비치, 먼데이키즈, 슈퍼주니어. 환희 형이랑 박효신, 신화 형들 곡도 가이드 보컬 했어요.
가이드 보컬도 하다 보면 노래 실력이 늘어납니까?
어우, 당연하죠. 그때 실력이 엄청 늘었죠.
그런 점에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이것만 신경 써도 훨씬 좋아진다’ 하는 트로트 잘 부르는 비법이 있을까요?
트로트뿐 아니라 어떤 노래든 리듬을 잘 타면 돼요. 리듬 타는 놀이가 하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음악을 이렇게 틀어요. (영탁이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My Story’를 틀었다.) 음악을 듣다 보면 리듬을 타잖아요? (후렴 부분에서 볼륨을 최저로 낮췄다) 이렇게 볼륨을 줄이는 거예요. 그 와중에 계속 리듬을 타고 있다가 (다시 볼륨을 올렸다) 노래가 다시 나올 때 박자 맞나 보는 거예요. 재미있잖아요. 맞았을 때의 희열도 있고. 이렇게 노는 거예요.
보컬 트레이너 하실 때 실제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방법인가요?
그럼요. 억지로 시킨다기보다 ‘야 재밌지 않냐? 지하철에서 그냥 이어폰 끼고 이렇게 해봐. 맞히면 희열 장난 아니야’ 하면서.(웃음) 음악을 너무 학문으로 접근하면 피곤하니까요. 재밌는 게임한다 생각하시고 하다 보면 리듬감이 확실히 좋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출연자 입장에서 바라본 <미스터트롯>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실 저희 입장에서 <미스터트롯>은 천운이었죠. 코로나19로 힘든 시기였잖아요. 그 와중에 저희끼리 으라차차 하면서 무대를 꾸리고 파이팅하는 모습에 많이 감정이입하셨던 것 같아요. 감사한 일이죠. 지금도 저희끼리 만나면 늘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해요. 사실 저를 비롯해서 <미스터트롯> 출연자 대부분은 그전부터 친한 사이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찐으로’ 서로를 응원했고 선의의 경쟁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좋게 봐주셨다고 생각해요.
축구 팬이라고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오 필승 코리아’ 같은 응원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나요?
특별히 응원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많은 곳에서 ‘찐이야’를 응원가로 사용해주셔서 감사해요. 선수들 입장 곡으로 ‘폼미쳤다’도 많이 사용해주시고. 요즘 노래는 두 가지예요. 부르는 노래, 듣는 노래. 딱 들었을 때 노래방에서 부르기 좋은 노래가 있고, 틱톡, 쇼츠, 릴스에서 쓰기 좋은 노래가 확실히 나뉘잖아요. ‘폼미쳤다’는 후자를 염두에 둔 곡이고 실제로 그렇게 많이 쓰세요. 그 와중에 신기한 게 시간이 지나면서 응원할 때 부르는 노래로 본질이 바뀌더라고요. 좋은 메시지를 담아서 유쾌하고 경쾌한 곡을 만들면 대중이 판단하시는 것 같아요.
<놀라운 대회 스타킹> <미스터트롯>, 단독 콘서트 등 지금까지 수많은 무대에 오르셨잖아요.
그중에서도 영탁 님 인생에서 분기점이 된 무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전기 다큐멘터리를 보면 전환점마다 큰 사건이 있잖아요. 저한테도 그런 무대가 있죠. 우선순위를 따질 수 없으니 가장 오래된 걸 이야기해볼게요. 서울에 올라온 계기가 됐던 2004년 영남가요제. 그때 임재범 선배님의 ‘비상’을 불렀어요. 그전에도 주변에서 노래 잘한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여기저기서 상도 탔어요. 그래도 집에서는 늘 ‘가수 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하셨거든요.(웃음) 아버지도 워낙 노래를 잘하시고 할아버지는 작곡까지 하셨거든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영남가요제에서 대상을 타니까 ‘이 정도면 잘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때마침 휴학도 했는데 서울이나 가봐야지 하면서 올라왔어요.
그럼 서울에 처음 올라오던 당시에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셨네요?
하나는 있었죠. 오디션을 보긴 봐야겠는데 방법을 잘 모르잖아요. 인터넷으로 ‘연예인들 많이 찾는 카페’를 검색했어요. 홍대에 있는 카페가 하나 뜨더라고요. 거기에서 일하면 오디션 자리라도 하나 생길까 싶어서 그 카페에 취직하려고 했죠.
커피 마시는 카페요?
맞아요. 그 카페가 드라마 <논스톱> 촬영지로 많이 쓰였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일하면서 많은 연예인을 봤죠.(웃음) 홍대 럭셔리 수노래방 건너편에 있던 카페인데요. 이름은 기억 안 나고 매장 안에 커다란 빨간 장미가 그려졌던 것만 기억나요.
개념적으로는 트로트도 K-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트로트의 글로벌 진출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시나요?
최근 미국에 갔을 때, 올해 초 동남아 투어를 갔을 때도 느꼈어요. 이미 외국에서도 트로트를 알고 있어요. 태국, 인도네시아 관객이 ‘찐이야’를 다 따라 부르세요. 트로트가 국내에서 주목받는 장르가 되면서 아이돌 가수분들과 접점이 생겼잖아요. 아이돌 멤버들이 저희 노래를 불러주시니까 그 팬분들도 트로트를 알고 있어요. 그분들이 트로트 가수 팬이라고는 할 수 없죠. 다만 트로트를 인지하고 있다. 그걸 이번에 완벽하게 느끼고 왔어요. 더욱이 요즘에는 장르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잖아요. 곡이 아닌 보컬에 따라 장르가 바뀌는 시대예요. 팝 트랙을 트로트 창법으로 부르면 트로트가 되고, 트로트 노래를 R&B 창법으로 부르면 R&B가 되니까요.
말씀하셨듯 트로트의 해외 진출 여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수도 있겠네요.
제가 봤을 때는 그래요. 트로트의 해외 진출이라기보다, 한국 가요의 해외 진출 규모로 보는 게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어요. 국내 가수가 외국에서 앨범을 낼 때도 있잖아요. 가사는 영어고, 사운드는 팝에 가까운 앨범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팝인가, K-팝인가?’ 싶어지는 거죠. 모호합니다.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여전히 자기소개할 일이 많으실 텐데 영탁 이름 앞에 어떤 수식어가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한 번도 “안녕하세요 트로트 가수 영탁입니다”라고 해본 적이 없어요. <미스터트롯> 전에도 후에도 저는 ‘가수 영탁’이라고 소개합니다. “트로트 가수 누구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친구들도 있죠. 당연히 그게 틀린 것도 아니고요. 다만 저는 옛날부터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아요. 조용필 선배님 보세요. 디스코그래피에 모든 장르가 있잖아요. 트로트부터 국악, 일렉트로닉까지. 장르 구분 없이 그냥 ‘가수’ 그 자체가 저에게 맞는 수식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20년 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합니까?
인간적으로는 “영탁이, 걔 괜찮아. 사람 좋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음악적으로는 “영탁이, 걔 음악 좋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라는 말을 듣길 바랍니다. 그렇게 또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제 음악 중에 슬픈 곡이 거의 없어요. 예전에는 눈물 나오고 힘들고 슬픈 노래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싫어요. 그래서인지 제 곡 중에는 사랑 이야기보다 인생 이야기가 더 많아요. 사랑, 만남, 이별보다는 살아온, 살아감, 살아갈에 대한 내용이 많아졌죠.
슬픈 감정을 기분 좋게 들리게 하는 것도 능력이죠.
방금 말씀하신 게 제가 트로트에서 찾은 저의 재주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점이기도 하고요.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해주는 노래를 부르는 거. 앞으로 그렇게 노래하고 싶어요.
영탁의 인생 노래 5
김정민, ‘슬픈 언약식’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가장 많이 듣고 불렀던 노래. 김정민 선배님 노래는 전부 좋아한다. 사실 내 노래는 록이 기반이다. 지금도 보컬이 ‘땡땡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김정민 선배님 노래를 많이 불러서 그런 듯하다.
임재범, ‘비상’
22세 ‘영남가요제’ 대상 무대에서 불렀던 노래. 이날 이후 처음으로 ‘가수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휘성, ‘With Me’
20대 초반 정말 많이 듣고 부르면서 위로를 얻었던 노래. 위로를 전하는 가사가 아닌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휘성의 정규 앨범 2집 을 들으면서 R&B의 맛을 처음 알게 됐다. 연습생 초기 오디션을 볼 때 많이 부른 곡이기도 하다.
루서 밴드로스, ‘Dance With My Father’
오디션 볼 때마다 항상 부르는 노래였다. 잘 부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오디션에도 많이 붙었다. 연습생 시절 루서 밴드로스를 파면서 노래 연습을 했다.
강진, ‘막걸리 한잔’
지금의 영탁을 있게 해준 노래. 한동안 막걸리를 잘 안 먹던 시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시원하게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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