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한국판이 서점에 유통되는 날이 해외 출장 출국일이었다. 나는 이 책을 무척 읽고 싶었다. 출간일 전에 나오는 홍보용 서적이라도 구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오프라인 대형 서점에 하루 일찍 나와 있었다. 책을 샀다는 지인에게 사정해 출국날 새벽에 책을 입수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고 히트작 <노르웨이의 숲>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하며 시작한다. 나는 함부르크 대신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책을 읽었다.
<노르웨이의 숲> 주인공 와타나베는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첫 장면에서 옛날 생각 때문에 잠깐 고개를 숙인다. 나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으며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이 생각만 계속 났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 했던 이야기인데. 이 소설의 스토리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첫사랑을 잊지 못한 주인공이 첫사랑과 함께 만든 가상의 도시로 떠난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초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요약하면, 했던 이야기다.
이 소설은 정말로 한 번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80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중편소설을 출간했다.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하루키 애호가들에게도 미스터리였던 소설이다. 이번 소설은 그 중편소설의 장편화 버전이다. 하루키는 작가 후기에서 ‘이 작품에는 무언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느껴왔다. 다만 당시의 나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무언가를 충분히 써낼 만큼의 필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그런데 이제 다 써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적었다.
필력을 갖춘 원숙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표현하려 했던 ‘무언가’는 명확하다.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의 힘. (그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소중함. 그리고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의 고통. 무라카미 하루키 1타 강사 같은 게 있다면 방금 정리한 세 가지 개념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장편소설을 정리할 수 있다. 작가는 보통 한 가지 주제를 평생 쓴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저 세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평생 짜냈다.
이야기 기술 자체가 좋으면 했던 이야기도 재미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핵심 역량이 바로 그거다. 서사 기술. ‘어린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말로만 지었던 가상 도시에 어른이 되어서 가는 이야기’라면 웹소설로도 안 쓰일 것 같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면 글로벌 베스트셀러이자 칭송받는 문학이 된다. 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실력이자 저력이자 노력의 결과다. 이야기는 물론 멋지다. 하지만 전작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와 <1Q84>에 비하면 힘이 덜하다. 좋은 소설이지만 거장의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평은 아무 의미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미 살아 있는 작가의 영광을 모두 이뤘다. 국제적 베스트셀러 작가다. 명예도 가졌다. 모교에 자기 기념관을 지었고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기념관을 설계했다. 심지어 장수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궁극적 목표이자 성취는 작품의 불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 특히 이 소설이 불멸할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다. 신간이 나오고 잡지 마감일이 다가오는 사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알겠다. 이 소설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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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
사사키 아이, 모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이 세계를 휩쓰는 동안 한국에 조용히 발표된 일본 소설. <프루스트 효과의 실험과 결과>는 일본의 30대 작가 사사키 아이의 소설집이다. 책에 실린 소설 4편은 모두 도시로 올라온 젊은이들의 실패한(그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사키 아이는 젊을 때만 일어나는 사고 같은 사랑과 그때만 느껴지는 포말 같은 감정을 고화질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려서 독자에게 내놓는다. 이른바 ‘문학 독자’나 ‘일본 소설 애호가’가 아니어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만큼 공감을 부르는 소설. 조금 쌀쌀한 지금 읽으면 왠지 더 좋다. -
인간의 본질
로저 스크루턴, 21세기북스
<아레나>를 통해 좋은 논픽션을 하나씩 소개하고 싶어 골랐다. 이 책은 영국 블랙웰 서점이 꼽은 2017년 베스트 논픽션이다. 블랙웰 서점은 영국 옥스퍼드에서 1879년부터 지금까지 영업하는 서점이다. 그런 서점과 상이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감동적인데, 유서 깊은 지적 전통의 서점이 꼽은 책답게 내용도 보통이 아니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는 지금, 인간이 그저 DNA 뭉치일 뿐인지 헷갈리는 지금,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이 인간과 도덕과 인격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 받은 책답게 짧고 쉬우면서도 내용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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