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가 종영했죠. 배우분들은 촬영 전후로 어떻게 일상이 달라지나요?
모든 배우가 그렇겠지만 촬영 기간에는 늘 캐릭터에 집중해 있을 거예요. 다만 영화 촬영할 때는 드라마에 비해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에요. 영화는 4~5개월 동안 러닝타임 2시간 만든다면, 드라마는 비슷한 기간 동안 10시간 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이렇다 할 취미 활동 없이 오롯이 작품에 몰입합니다. 촬영이 끝나면 원래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죠.
요즘은 주로 뭘 하세요?
골프나 낚시죠.(웃음) 이번 <소방서 옆 경찰서 그리고 국과수> 촬영 끝나고는 큰마음 먹고 유럽으로 3주 정도 골프 투어를 다녀왔어요. 런던에서 차를 타고 스코틀랜드까지 갔다가 프라하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거든요. 제 인생에서 굉장히 특별한 여행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저는 매달 잡지를 만들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질문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배우는 누구에게 어떤 질문을 하나요?
저도 질문 많이 해요. 감독님께 제일 많이 하죠. ‘지금 제가 하는 연기 톤이 맞을까요?’ ‘이 장면에서 이렇게 디테일을 살리면 작가님이 의도하신 방향에서 많이 어긋날까요?’ 질문하면서 감독님과 계속 생각을 공유합니다. 예전에 한 영화 촬영장에서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캐릭터가 자식이라면, 감독은 아버지고 배우는 어머니다.” 물론 배우와 감독이 생각하는 캐릭터의 결이 다를 수 있죠. 하지만 저처럼 주인공을 오랜 시간 연기한 배우라면 연출의 의도는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태껏 출연한 드라마가 20편이 넘는데 대부분 시청률이 높더라고요. 출연작을 고르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나요?
단순해요. 처음 대본을 봤을 때 내가 재미있는 작품. 드라마 시청률은 물론 저의 영향도 있겠지만 작가님과 감독님의 영향이 훨씬 크죠. 운도 따라줘야 되고요. ‘이건 잘될 것 같아서’ 선택하기보다 ‘재미있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를 더 봐요.
필모그래피를 보니 사극이 거의 없더라고요.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에요. 실제로 제안도 몇 번 받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작품을 선택했어요. 그 이유가 사극이어서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커리어 내내 대부분 주인공 역을 맡으셨잖아요. ‘김래원 작품’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실 텐데, 그런 점에서 연기할 때 더욱 신경 쓰는 점이 있나요?
진정성이에요. 쉽게 말하자면 자연스러움이죠. 연기는 기본적으로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터무니없이 가짜 같은 이야기도 진짜처럼 보일 수 있게 하는 게 일이잖아요. 그래야 관객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에요. 정말 100% 진짜라면 그건 다큐멘터리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죠. 다만 누군가 제 연기를 볼 때 ‘김래원이 연기를 하는구나’가 아니라 ‘진호개가, 오태식이 무슨 기분일까?’ 생각될 만큼 연기하려고 해요.
그만큼 집중하다 보면 캐릭터의 감정이 개인적인 영역까지 번질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확실히 영향을 받는 편이에요.
힘들진 않으세요?
20대 후반에는 길 가다 주저앉은 적도 있어요. 너무 힘들어서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촬영이 다 끝난 후였는데도 캐릭터의 감정이 떨쳐지지 않더라고요. 예전에는 그런 감정이 너무 버거워서 작품을 피하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일단 건강해야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잘할 수 있는데, 이렇게 다치면서까지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조금 나아졌죠. 지혜롭게 벗어나는 방법을 조금은 깨달았어요.
어떤 작품이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해바라기>였어요. 당시에는 제가 열심히 하려다 보니 지나치게 몰입해서 작품이 끝난 후의 공허함 때문에 힘든 줄 알았어요. 어느 정도는 그랬을 수도 있고요. <해바라기>에서는 지키고 싶은 가족을 잃고 자기 삶마저 포기하는 인물을 연기했잖아요. 그 감정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제 안에 무언가가 뿌리내리지 않았나 싶어요.
그만큼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요.
그때는 휴대폰 몇 달 동안 꺼놓고 작품에만 몰입했어요. 단순히 대본을 자주 보는 게 아니라 영화 속 인물과 상황을 계속 느끼는 거죠.
극 중 인물과 비슷한 모습으로 사는 거네요.
맞아요. 그때는 촬영장도 서울에서 떨어진 곳이었어요. 만일 서울에서 촬영하고 휴대폰도 있었으면 쉬는 날에는 친구도 만나고 낚시도 했겠죠. 지금 보면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한 방법이었어요. 자기를 지키면서 연기하는 거니까요. 그때는 스스로를 그 캐릭터로 덮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 촬영이 끝나면 제 안에서 여러 가지가 밀려오더라고요.
‘김래원 대표작’으로는 <해바라기>를 고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촬영 당시에도 지금처럼 <해바라기>의 대사가 회자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셨나요?
전혀요. <해바라기>가 오늘의 <해바라기>가 된 건 강석범 감독님의 힘이에요. 저도 열심히 했지만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강석범 감독님께 공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해바라기> 마지막 장면은 결국 오태식이 어떻게 됐는지 모호하게 끝나잖아요. 결말에 대한 본인 생각은 어떠세요?
지금은 많이 알려지긴 했는데, 삭제된 장면이 있어요. 오태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거든요. 저는 그 결말도 좋았다고 생각해요. 고생해서 찍은 장면이기도 하고요.
만일 <해바라기 2> 제안이 온다면 출연할 의사가 있으세요?
아니요.(웃음) 사실 <해바라기 2> 제안은 정말 많이 받았어요. 드라마로 만들자, 영화로 만들자 등등. 저는 회의적이에요. 그렇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는데 2를 만든다고 기존만큼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싶어요.
벌써 20년 가까이 된 작품이지만 아직도 오태식 성대모사하는 분들이 많아요. 기분이 어떠세요?
이제는 하도 많이 들어서.(웃음) 별 감흥 없어요. 그래도 너무 감사하죠.
오태식이라는 캐릭터가 숙제나 짐처럼 느껴진 적은 없으세요?
그런 적은 없어요. 다행스럽게 좋은 작품과 좋은 감독님을 만나서 나온 캐릭터니까요. 저 역시 열심히 연기했고 한때는 정말 오태식으로 살았으니까요. 오태식 좋아합니다.
<해바라기>의 오태식부터 <소방서 옆 경찰서>의 진호개까지 그간 많은 캐릭터를 연기하셨잖아요. 그중 자연인 김래원과 가장 닮은 인물은 누구인가요?
모든 캐릭터가 분명 제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예전에 드라마 촬영하는데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할 줄은 몰랐다.” 같은 대본을 보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식으로 연기했다는 건 ‘김래원 식’으로 했다는 뜻이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가 대본 속 캐릭터를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죠. 그런 점에서 제가 연기한 모든 캐릭터에는 자연인 김래원의 모습이 들어 있어요.
반대로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요?
드라마 <닥터스>의 홍지홍. 너무나 건강하고 듬직한 사람이에요. 남자답고요.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묵묵히 들어줄 것 같아요. 친구를 사귄다면 홍지홍이랑 제일 친해지고 싶어요.
지질한 남자(<가장 보통의 연애>)와 심각한 남자(<해바라기>)를 고루 연기하셨는데, 기술적으로는 어떤 역할이 더 어렵나요?
저는 밝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조금 더 힘들었어요. 저라는 사람 자체가 그저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 아니어서.(웃음) 저는 조용하고 깊이 있는 역할이 아무래도 더 편하죠. 밝은 캐릭터는 그만큼 제가 더 많이 연기해야 하니까요. 지금은 예전보다 성격이 밝아졌고 나이 먹으면서 여유도 생겼어요. 그래서 훨씬 편해졌어요.
배우 한석규 씨는 한 인터뷰에서 “배우는 나이 먹는 게 기다려지는 직업”이라고 하셨어요. 올해로 30년 가까이 연기하시는데 나이에 따른 부담과 기대 중 무엇이 더 큰가요?
한 선배님이 어떤 의미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가끔 통화 나눌 때 “올해 몇 살이지?” 하시면 제가 “몇입니다” 하거든요. 그럼 선배님이 “제일 좋을 때다. 이제 시작이다” 하세요. 제가 혼자서 ‘난 앞으로 뭘 해야 하지? 하던 대로 해야 하는 건가?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닌데?’ 고민을 할 때쯤 “이제 시작이다”라고 너무 진지하게 말씀해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저는 또 한 번 연기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그 노력을 시작한 것만으로 이미 무언가를 찾은 것이기도 하고요.
데뷔 초에는 하지 못했던 요즘의 노력이 있습니까?
데뷔 초에만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있어요. 그걸 ‘신선함’이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걸 되찾으려고 합니다. 연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저만의 억양이나 톤이 생기잖아요. 그러면서 사라진 무언가일 수도 있어요. 똑같이 웃고 똑같이 말해도 묘하게 느낌이 다르거든요. 말씀드린 ‘신선함’이 가끔 운 좋게 요즘 연기에 묻어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기쁘죠. 그걸 다시 찾으려고 노력해요.
촬영하는 동안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술이요. 평소에는 즐겨 마시거든요. 촬영하면 안 마십니다. 8개월 동안 안 마신 적도 있어요. 요즘은 3일 정도 쉬면 가볍게 맥주 한두 잔은 마시는데 취하도록 마시는 일은 없어요.
마음가짐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실제로 연기할 때 영향을 미치나요?
촬영하는 동안에는 정신적으로 캐릭터에 몰입하잖아요. 그런데 술을 마시고 나면 캐릭터에서 한 번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그때 느껴지는 붕 떠 있는 기분이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럼 <가장 보통의 연애> 때도 안 드신 거예요?
전 100% 먹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나도 안 마셨어요.
충격적이네요. 반대로 꼭 하는 게 있다면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생활 패턴을 아침형으로 유지해요. 촬영은 보통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니까요. 그래야 일이 편해요.
그간 수많은 칭찬을 들어오셨을 텐데 그중 어떤 칭찬이 가장 좋으신가요?
저는 칭찬보다 스스로에 대한 만족이 더 중요한 사람이긴 한데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어떤 장면이든 ‘진짜 같더라’ ‘연기 아닌 것 같더라’ 할 때 기쁘죠.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나 역할이 있습니까?
몇 번 했던 장르라 도전은 아니지만, 멜로나 로맨스 한번 해보고 싶어요. 지금 시점에 멜로 연기를 하면 조금은 또 다른 게 나오지 않을까 싶아요. 그리고 완전 악역 해보고 싶어요.
생각해보니 여태까지 완전 악역 캐릭터는 없었던 것 같네요.
영화 <강남 1970>에서 ‘용기’가 비열하긴 했지만 그 친구도 나름 사연이 있었으니까요. 그 정도까지 나쁜 놈은 아니었어요.
완전 악역을 맡으면 <해바라기> 때보다 더 힘들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는데 한 번은 해보고 싶어요.
흥행과 별개로 본인 커리어에 분기점이 된 작품이 있을 것 같습니다.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이 그런 작품이죠. 드라마 <카지노>, 영화 <범죄도시> 연출하신 강윤성 감독님 작품이거든요. 강 감독님을 만나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신선함을 찾으려고 고민했어요. 정말 많은 영향을 준 분이에요. 감독님의 작업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자연스럽고 물 흐르는 듯한 연출을 원하는 분이세요.
이미 답을 주신 것 같은데, 좋은 연기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좋은 연기는 대본에서 요구하는 연기와 자연스럽게 보이는 연기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유연함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배우는 그 유연함을 바탕으로 현장에서 감독님, 동료 배우와 소통하면서 좋은 캐릭터와 작품을 이끌어내는 배우겠죠.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니까요. 저도 그걸 하려고 계속 노력 중이에요.
자연인 김래원이 지난 10년 동안 후회하거나 다짐한 것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3년에 두 작품 정도 했어요. 요즘에는 1년에 한 작품은 하려고 해요. ‘그때 작품을 조금 더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을 때가 있죠. 제가 자연이 좋다고 매일 바다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 한 작품이라도 더 했으면 필모그래피가 조금 더 근사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다짐이라면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좋은 배우에 대한 부분이에요. 어릴 때는 작품 안에서 내 연기가 빛나기 위해서 노력했어요. 지금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요. 그게 훨씬 배우로서 큰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30년 뒤 김래원은 어떤 배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하나요?
배우 김래원보다 ‘어떤 작품의 누구’로 기억되고 싶어요. <해바라기>의 오태식, <닥터스>의 홍지홍, <소방서 옆 경찰서>의 진호개 식으로요. 모두가 제가 정말 치열하게 산 시절의 이름이니까요.
김래원의 인생 영화 5
<그랑블루> 뤽 베송, 1988
바다를 좋아하는 나로서 정말 많이 본 인생 영화. 바다를 향한 순수한 마음과 거기서 비롯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눈부시게 느껴졌다.
<인생은 아름다워> 로베르토 베니니, 1997
수많은 영화 속에 강인한 남자들이 등장하지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기한 아버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고 생각한다.
<프리다> 줄리 테이머, 2002
당장 내일 개봉하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영화. 셀마 헤이헥의 연기가 일품이다. 영상의 색감과 미술 세팅이 탁월한 작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웨스 앤더슨, 2014
평소 눈이 즐거운 영화들을 좋아한다. 너무나 재미있는 각본을 미술적으로 훌륭하게 구현한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 피터 시걸, 2004
쉽고 가벼운 영화. 그래서 자주 보게 되는 영화. 영화의 배경인 하와이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애덤 샌들러의 연기를 특히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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