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서은해와 <엽기인 걸 스나코>
서은해는 스스로 ‘백수가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백수가 어울리는 사람이라기엔 다양한 일을 해왔다. 서은해는 스무 살에 상경해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 중 하나인 케이크샵에서 총괄 코디네이터로 6년간 일했다. 이후 패션 브랜드 미스치프에서 해외 마케터로 일했고, 음악 플랫폼 ‘버드엑스비츠’와 글로벌 매거진 <하입비스트>에서 에디터로 근무했다. 서은해는 직업관은 언제든 바뀔 수 있어도 만화책 취향만큼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만화책을 처음 접한 곳은 약 20년 전 부산 수정초등학교 앞에 있던 만화방이다.
“이름은 기억 안 나요. 만화방 오빠가 꼭 야쿠자 같았는데 잘생겨서 좋았어요.” 서은해가 만화방을 드나들던 2000년대 중반에는 순정 만화가 인기였다. “저는 지금도 순정 만화만 봅니다. 야자와 아이의 <NANA> <파라다이스 키스>로 첫걸음을 뗐어요. 때마침 국내 순정 만화 <궁> <풀하우스>가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고요. 그러다 <엽기인 걸 스나코>를 발견했죠.” <엽기인 걸 스나코>는 2000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하야카와 토모코의 순정 만화다.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며 살아가는 소녀 스나코다.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유행할 때 나온 만화예요. 사실 스나코는 정말 아름다운 여자애거든요. 매일 검은 옷만 입고 어둠 속에 틀어박혀 살아요. 꽃미남들한테선 빛이 나잖아요? 그 빛을 마주치면 코피를 흘리면서 도망갑니다.” 자신이 아름다운 걸 모른 채 살아가는 엽기 소녀. 스나코의 사연이 더욱 궁금해졌다. 순정 만화만을 독파해왔다는 서은해에게 <엽기인 걸 스나코>를 최고로 뽑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순정을 좋아하려면 순정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야만 해요. <엽기인 걸 스나코>는 어둠뿐이던 소녀가 빛에 익숙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평생 스나코라고 생각해왔어요.”
서은해는 만화책만이 가진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다. “저한테 만화책은 사는 게 아닌 빌리는 것이었어요. 만화책을 빌려 보는 건 내 앞과 뒷사람을 생각하면서 향유하는 일이잖아요. ‘너무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돌려줘야 된다’는 약속 같은 느낌이 좋아요.” 지금도 서은해는 만화책이 필요하면 한남동 순천향대학교 앞에 있는 ‘공간만화’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늘 과자 짱구와 레쓰비를 먹는다. 인터뷰 내내 짱구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서은해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만화책은 어린 시절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연결고리를 어른이 지켜나간다는 점이야말로 만화책이 아름다운 이유죠.”
에디터 서은해의 인생 만화 5
<엽기인 걸 스나코>, 하야카와 토모코
<언니의 결혼>, 니시 케이코
<남자의 일생>, 니시 케이코
<도쿄 후회망상 아가씨>, 히가시무라 아키코
<나의 지구를 지켜줘>, 히와타리 사키
실리카겔 최웅희와 <BECK>
‘가장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를 만드는 밴드.’ 4인조 록밴드 실리카겔의 슬로건이다. 최웅희는 실리카겔에서 베이시스트를 담당한다. 그를 로큰롤의 세계로 인도한 건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과 해롤드 사쿠이시의 <BECK>이다. “그런 학생 있잖아요. 매일 새벽까지 공부하는데 성적 바닥치는 애들. 제가 그랬어요. 공부할 때 라디오 켜놓는 거부터 말이 안 되죠.” 최웅희는 ‘마왕’ 신해철에 이끌려 레이지본, 레드 제플린, 딥 퍼플에 매료됐고 급기야 음악 만화까지 섭렵한다.
“밴드 하는 사람들에게는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만화죠.” 최웅희의 인생 만화 <BECK>은 해롤드 사쿠이시가 2000년부터 8년간 연재한 음악 만화다.
<BECK>의 작품성은 음악인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 사이에도 익히 알려져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2019년 발표한 ‘일본의 걸작 만화 20선’에 <BECK>을 선정했다. 해당 리스트에는 <나루토> <슬램덩크> <GTO> <시티 헌터> <몬스터> <헌터×헌터>가 올랐다. <원피스> <강철의 연금술사> <도쿄 바빌론>은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주인공 밴드가 범죄 조직이랑 잘못 엮여서 곤란해져요. 그래서 내기를 합니다. 만일 메인 스테이지보다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면 우리를 내버려둬라. 그리고 비등한 관객 수를 동원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최웅희는 스스로 말도 안 된다고 말한 그 에피소드 장면을 <BECK> 최고의 명장면으로 골랐다. 살다 보면 이성과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만화를 보다 보면 ‘저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싶은 게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항상 저를 건드는 것 같아요.”
<BECK>은 2004년 <벡: 몽골리안 찹 스쿼드>라는 이름으로 애니화됐다. 고바야시 오사무가 연출을 맡았고 일본 인디 밴드 다수가 사운드 제작에 참여했다. 최웅희는 그래도 <BECK>을 볼 거라면 만화책을 권한다. “사실 기껏해야 종이 쪼가리죠. 그런데 제가 3만 명 앞에 선 것 같은 전율을 느끼게 해줘요. 좋아하는 장면에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으니까. 명작일수록 본인만의 속도감으로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최적화된 게 만화책이고요.” 최웅희는 이날 인터뷰를 위해 특별한 티셔츠를 입고 왔다. 생일 선물로 받은 <도로헤도로> 티셔츠다. 같은 티셔츠를 입고 친구를 만났다가 ‘그런 걸 왜 입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최웅희는 티셔츠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좋아하는 건데 어떡해요.”
실리카겔 최웅희의 인생 만화 5
<BECK>, 해롤드 사쿠이시
<도로헤도로>, 하야시다 큐
<더 화이팅>, 모리카와 조지
<플루토>, 우라사와 나오키
<폭두 타나카> 시리즈, 노리츠케 마사하루
작곡가 송영남과 <호문쿨루스>
송영남의 직업은 작곡가다. 열일곱 살 때 처음 드럼을 배웠다. 군대 전역 후에는 DJ로 활동하다 전자음악에 빠져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피아니스트 임채린과 함께 재즈 앨범 <저 너머 뒤편에>를 발매했다. 앨범 첫 번째 트랙 제목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주는 즐거움’. 어린 시절 송영남에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주는 즐거움은 만화책이었다. 사전 인터뷰에서 그에게 인생 최고의 만화를 묻자 단숨에 대답이 돌아왔다. “야마모토 히데오의 <호문쿨루스>.”
<호문쿨루스>는 주인공 나코시 스스무가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트리퍼네이션’ 수술을 받는다. 인간 내면의 뒤틀림 ‘호문쿨루스’를 보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다. 이후 나코시는 사람들의 결핍을 해결해 주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 나선다. 송영남이 <호문쿨루스>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은 마지막 15권에 있다. ‘나를 바라봐줘. 나도 봐줄 테니까.’ 송영남은 만화책을 만지작거리며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사실 만화책의 가장 큰 목적은 재미죠. 재미있기만 해도 충분히 좋은 만화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호문쿨루스>는 달랐습니다. 처음으로 질문을 던진 만화예요. ‘이 사람은 왜 이럴까?’ ‘인간은 뭐지?’ ‘나는 뭐지?’ 하는 질문들. 그 질문에는 지금도 답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호문쿨루스> 작가 야마모토 히데오는 극단적인 사실 묘사로 일본에서도 논란을 빚었다. 비슷한 이유로 만화 팬들은 선뜻 자신이 특정 작가의 팬임을 밝히기 어려울 때가 있다. 송영남은 어떨까? “누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만화라고 대답해요. 그럼 상대방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립니다. 티를 안 내려고 하는데 티가 나죠. 그때 혼자 생각해요. 내가 요리나 운동이라고 해도 그럴까?” 하지만 송영남은 억울하지도 서운하지도 않다. “만화는 집에서 혼자 즐기는 취미잖아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송영남이 좋아하는 만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의 심리를 무의식 밑바닥까지 내려가 집요하게 묘사하는 만화. 괴랄하고 섬뜩해도 마음 한편에 떠나지 않는 질문을 남기는 만화. “만화책이 특별한 건 진입장벽이 아주 낮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안 통해도 돼요. 그림만 보면 바로 흡수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심어진 기억, 이미지는 평생 가요.” 어린 나이에 자극적인 만화를 보는 걸 염려하는 시선도 있다. 송영남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답했다. “저도 만화책 보고 깡패 놀이 했다가 엄마한테 죽도록 혼난 적이 있어요. 잘못 행동할 수 있죠. 그때는 부모님이 잡아주면 되고요. 언젠가는 놀이터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때가 있잖아요.”
작곡가 송영남의 인생 만화 5
<호문쿨루스>, 야마모토 히데오
<20세기 소년>, 우라사와 나오키
<미노타우르스의 접시>, 후지코 F. 후지오
<도박묵시로 카이지>, 후쿠모토 노부유키
<소용돌이>, 이토 준지
포토그래퍼 배추와 <힙합>
“서울에서 사진 찍는 배추입니다.” 배추의 작업실 책상에는 라이카 M7과 후지 GS645가 놓여 있었다. 배추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자신이 일하던 클럽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사진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클럽을 찾은 디제이, 댄서, 래퍼, 스케이터를 취미 삼아 카메라에 담았다. 지금 서울 서브컬처 신에서 배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몸담고 있는 서브컬처에 눈을 뜬 계기는 만화 <힙합>이다.
“그때는 ‘국힙’이라는 단어도 없었죠. ‘힙합’ 하면 H.O.T.가 가장 먼저 떠오르던 때니까요. 하지만 단숨에 빠져들었습니다.” <힙합>은 1997년부터 2004년까지 <아이큐점프>에 연재된 만화다. 만화가 김수용의 출세작으로 줄거리는 비보잉에 매료된 고등학생의 성장기를 따라 전개된다. 김수용 만화가는 실제 비보이 출신이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힙합 김수용’을 운영 중이다. 2021년 김수용 만화가는 세계 최초로 5대 메이저 비보이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쥔 진조크루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웹툰 <진조크루>를 연재하기도 했다.
“지금 보면 뻔한 스토리일 수 있어요. 싸움 잘하는 주인공이 우연히 누가 춤추는 걸 보고 비보잉에 빠지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슬램덩크>와 비슷하고요.” 그럼에도 배추가 <힙합>을 인생 만화로 꼽은 이유는 무엇일까? “터무니없이 단순한 이유로 무언가에 빠지는 모습이 좋았어요. 주인공 성태하가 춤추기 시작한 데 거창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멋있어 보이고 싶었던 게 다예요. 하지만 모든 걸 쏟아붓습니다. 이게 멋 아닙니까?” 성태하도 강백호도 처음에는 별 뜻 없이 춤을 추고 농구를 한다. 하지만 ‘무의미한 계기’가 두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진 못한다.
초등학생이었던 배추는 어느 날 무단결석을 했다. 그냥 게임이 너무 하고 싶어서 그랬다. 성인이 된 그가 촬영장에 무단결석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대책 없는 행동이 유익하고 때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책 없는 짓 안 하고 살면 삶이 너무 지루할 것 같은데요.” 마지막으로 배추에게 <힙합>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물었다. 그는 24권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주인공들의 뒷모습과 함께 이런 대사가 적혀 있었다. ‘단지 자기가 좋으면 그만이니까!!’
포토그래퍼 배추의 인생 만화 5
<힙합>, 김수용
<괴짜가족>, 하마오카 켄지
<도라에몽>, 후지코 F. 후지오
<겁쟁이 페달>, 와타나베 와타루
<GTO>, 후지사와 토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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